혼돈획책(3)
칸발리크에서 열리는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비밀회의에, 토칸도 참석했다.
토칸 역시 검은 털모자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회의장에 입장했다. 회의에 참석할만한 자격이 있다는 표식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었다. 누가 왔는지는 회의 참석자끼리도 모르는 게 좋았다.
그래야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감시하는 누군가도 참석자들을 파악하기 힘들 테니까.
공연 소품 따위는 다 치워버린 자그마한 극장 안,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구석에서 쇳가루를 비벼대는 듯한 목소리를 낸다.
“오늘 모이시게 한 것은, 급박한 정세 변화에 대한 행동 방침을 의논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논의에 왜 일선의 행동대장급인 토칸을 초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비밀회의에 대체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이, 몇 명이나 참석했는지도 알 수 없다.
토칸은 이번 회의를 포함해서 몇 번 정도 비밀회의에 참석해봤지만, 자신이 모든 비밀회의에 참석했었다 자신할 수는 없었다.
아마 저 ‘윗선’ 누군가의, 어떤 의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겠지.
일선 행동대장인 자신이 필요한 논의라는 게 대체 뭘까. 토칸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황실은 고려, 키타이, 낭키아스와 함께하는 관세동맹을 끝내 승인했습니다. 키타이와 낭키아스 사이에 약간의 잡음은 있겠지만, 각국 정부는 무난하게 이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술렁임은 퍼져나가지 않았다. 그럴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다들 삼켰을 것이다. 그러나 토칸은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거나, 아니면 자신처럼 눈살을 찌푸렸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이상에 반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관세동맹은 범죄 민족인 한족의 기업가들에게도 기회를 주어, 우리 몽골의 민족산업에 위협으로 작용케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관세동맹은 한족이 상당한 발언권을 확보한 정치적 통합체의 출현을 예고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바라지 않는 사태다. 모두가 한족이 저지른 범죄를 기억하고 있다. 한족은 철저하게 몽골인의 통제 아래 있어야만 한다. 영원히.
그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때는, 몽골의 언어와 문화를 익혀, 한족이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고 몽골에 동화되었을 때뿐이다.
그런 한족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몽골인과 대등하게 발언할 수 있는 연방체제의 출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한다.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는, 몽골인, 더 나아가 범 알타이 민족의 절대적 우위를 보장하는 체제뿐입니다. 그런 지위를 위협한다면 고려, 키타이, 낭키아스와의 그 어떤 제휴 시도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잠깐 소리의 공백이 극장 안을 돌았다.
그 공백을 뚫고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인민동맹의 지도부는 관세동맹 승인을 황실의 실책으로 보는가?”
“예.”
즉답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질문한다.
“볼로드 행정부는 관세동맹을 통해 손상될 우리의 이상을 고려하고 있는가?”
“타이시 볼로드는 카간의 대변인에 불과합니다.”
역시 망설임 없는 답이 나왔다.
이 시점에서, 토칸은 오늘 비밀회의의 성격을 깨달았다.
말의 ‘의논’을 한다는 것이지, 실은 이미 결정된 방침을 ‘전달’하는 자리다.
“우리는 더는 침묵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일선 행동대장인 토칸을 부른 건, 준비를 하라는 신호다.
“자세한 사항은 지도부 회의의 결의를 통해 하달될 것입니다만, ‘모든 것은 칸발리크와 카라코룸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목소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끊겼다.
어두컴컴했던 극장 안에 불이 들어왔고, 극단의 단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각종 소품을 들고 무대를 꾸미기 시작했다.
객석에 앉아 있던 회의 참석자들은 천천히 일어서서 극장을 빠져나갔다.
토칸도 그 무리에 섞여 극장을 나와, 뒷골목으로 숨어들었다.
“‘혁명’이 시작되는 건가……?”
부하들에겐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지만, 흥분과 긴장으로 입안이 마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윽고 헤실헤실 웃음이 나왔다. 토칸은 걸음을 빨리했다. 오늘 밤은 자그마한 여관방에서 신세를 지고, 내일 카라코룸으로 출발한다.
다음날 토칸은 카라코룸으로 향하는 열차 객실에서, 칸발리크와 카라코룸에서 동시에 시작될 혁명을 준비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꽤나 상세한 내용이었지만, 토칸은 여느 때보다 훨씬 집중력을 발휘해, 모든 내용을 암기했다. 지령이 적힌 종이는 태워버렸다.
***
눈앞의 남자는, 고등학생이라기엔 지나치게 눈빛이 차가웠다. 이익서 병장은 그런 생각을 했다.
보통 고등학생이라면 반항기나 치기가 어린 눈이든, 호기심이나 천진함이 어린 눈이든, 어쨌든 ‘어린애’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 남자는 아니다. 도저히 ‘남자애’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남자, 주견하는 이익서가 그 어떤 장교나 부사관에게서도 보지 못한 눈빛을 하고 있다.
굳이 비슷한 걸 찾자면 헌병대? 아니, 그것도 아니다. 헌병의 눈빛은 군율의 엄격함을 보여주는 눈빛이지, 지금 주견하처럼 온몸을 난도질할 듯한 눈빛을 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주견하가 이익서를 노려보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다.
한참 동안 이익서를 바라보던 주견하가 드디어 입을 연다. 이익서는 더욱 몸에 힘을 주며 자세를 바르게 했다.
“이익서 병장. 평양 탈환전과 남부전선 소탕전에 참전했다지. 거기서 아군 구출 등, 상당한 공을 세웠고, 덕분에 갓 일병이 돼야 했을 시기에 병장까지 특진. 내전이 끝나고선 그대로 전역을 앞두고 있다, 라.
여기 적힌 내용을 다 믿는다면, 그 전투 역량 하나는 뛰어나다고 봐도 되겠지?”
서너 살은 어린 고등학생에게 이런 식으로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익서는 상관들에게 그러했듯 군기를 가득 실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하신 바는 전부 사실입니다. 전투 역량은…… 그저 최선을 다할 따름입니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이 소년, 계급이 대령이었다. 조심하자.
주견하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전역까지 할 사람을 왜 소년감찰국, 아니, 이제 감찰국으로 이름을 바꿀 텐데, 어쨌든. 왜 불렀는지 궁금하지 않나?”
보통은 질문이 있는지를 묻지, 궁금한가 아닌가를 묻진 않는다. 익서는 주견하가 대령 계급을 달긴 했어도 군 조직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보다 저런 질문에서 느껴지는 차갑고도 끈적한 느낌은…… 아주, 아주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대령님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주견하가 고개를 살짝 갸웃한다. 그 동작에서 새삼, 그가 상당한 미소년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게 호의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군인으로서는 아주 좋은 대답이지만, 내 조직에서는 좀 더…… 유연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어. 우리가 싸울 적들은 명령대로 달려드는 군인이 아니라, 교묘하고 민첩한, 어떨 때는 보이지 않는 그런 적이거든.”
그러고선 피식 웃는다.
“긴장 풀라는 이야기야.”
하지만 도저히 긴장을 풀 수 없는 내용이, 소년이 한 말에 담겨 있었다.
“대령님의 조직에서…… 일하게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그래. 전역은 예정대로 될 거니까 안심하고. 억울하잖아. 전역도 못 하면. 그러니까 민간인 신분으로 감찰국 직원이 되는 거야.”
“하지만 저는…… 전역하면 대학에 복학할 예정이었습니다.”
말을 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소년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 권한을 익서에게 준 적이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소년은 그 점은 지적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점도 안심해. 사예도에 있는 대학으로 복학할 예정이었지? 감찰국에서 일해도 대외적인 신분은 일단 대학생이 될 거야. 하지만 학적은 제1대학교로 옮겨줘야겠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익서는 가만히 있었다.
“제1대학교로 편입하라는 명령이야. 편입 절차는 이쪽에서 다 준비해 줄 거니까, 뭐, 편입 시험을 본다거나 성적이 안 된다거나, 아니면 본래 학교의 전공과는 전혀 다른 과로 간다거나, 그런 걸 걱정할 필요는 없어.”
“……질문이 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자세하고 친절한 견하의 설명이 끝나자, 간신히 그렇게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주견하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령님께서는……”
“국장님, 이 좋겠군. 대령보다는 감찰국 국장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해서. 아, 우리 직속 상관인 나제홍 정치경찰실 실장님도 익혀두는 게 좋아.”
“알겠습니다. 그럼 국장님께서는 저를 제1대학교에 파견해서, 감찰국에서 원하는 어떤 임무를 맡으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정확해. 음, 일단은 평범하게 대학 생활을 하면서, 두루두루 좀 친하게 지내 줘. 그러면서 여자친구를 사귀어도 좋고. 어쨌든 그러다가 동아리 비슷한 모임 하나를 만들도록.”
“그 모임은…… 감찰국의 영향과 명령을 받는, 그런 모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익서도 이쯤 되니 주견하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 알 것 같았다.
“기록을 보면 1학년밖에 안 다닌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래도 학교 분위기는 대충 파악했었을 거야. 전 학교에도 특정한 정치성향을 내세우는 모임들이 있지 않았어? 그 비슷한 걸 만들자는 거지.”
잠깐 말을 멈춘다. 뭐라고 설명을 덧붙여야 하나 고민하는 듯하다.
“어떤 형태든 합법적이기만 하다면 상관없어. 문제가 일어나도 내가 도움을 주겠지만. 그래도 조직의 성격이나 목표는 확고해야 해.
감찰국이 대학 내에 확보하고 싶은 조직은 제국입헌당, 현 정부, 궁극적으로 태사 각하를 위한 조직이어야 해. 나아가서는 고려국민당 등이 이미 만들어 둔 조직과 싸울 수도 있어야 하고.”
쉽지는 않을 거야, 라며 주견하는 덧붙인다.
“여기서 ‘싸운다’라는 건 물리적으로 부딪힌다는 의미보다는, 이론적으로 무장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 가까워. 깡패 냄새가 나는 집단에는 정상인을 끌어들일 매력이 없어. 나는 똑똑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잡배들을 끌어들이고 싶은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각종 이데올로기 학습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지.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이익서 병장과 그 조직원들은 토론에서 상대를 제압하고 이길 수 있어야 해. 그렇게 해서 대학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또 대학가의 분위기도 지속적으로 파악해서 국장인 나에게 보고해야 하고.”
주견하는 두 손을 책상 위로 모았다.
“지금 당장 숙지할 필요는 없어. 나중에 다시 차근차근 하달될 테니까. 지금은 일단 그런 일을 할 거라는 느낌 정도만 알아둬.”
역시,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원대에서 대기하면 되는 겁니까?”
“지금쯤 감찰국에서 관리하는 사택으로 짐을 다 옮겨놨을 거야. 그쪽으로 안내해줄 테니 오늘부터 거기서 지내면 돼. 전역도 여기서 한다. 아마 병영보다는 훨씬 쾌적할걸?”
감찰국 직원이라는 또 다른 소년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사택은, 주견하의 말대로 병영보다 훨씬 쾌적했다.
관물대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빼 온 짐들을 보고서야, 익서는 주견하에 대한 느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열 살은 더 먹은, 능수능란한 어른의 사기에 놀아난 것 같은 기분이다.
“대체 뭐야 그 괴물은…….”
그건 소년의 얼굴을 한, 무언가였다고, 어렴풋이 느꼈다.
“지금은 모르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