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획책(1)
리안은 정말 오랜만에, 제1대학교 캠퍼스를 걸었다.
방학에도 남아 있는 몇몇을 제외하면 캠퍼스는 거의 비어 있었다.
해가 바뀌어 1930년이 된 지도 13일째. 겨울 한복판, 그것도 월요일에 할 일 없이 캠퍼스를 혼자 걷지는 않는다. 당연히 옆에는 견하가 있었고, 지금은 손을 잡고 걷는다.
“바람이 안 불어서 다행이야.”
“이 추위에 바람까지 불면 이렇게 못 다니죠.”
소년은 그렇게 대답하고 키득, 웃었다. 소년다운 웃음이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가 작년에 겪었던 상처는 아물어가는 듯하다.
“이렇게 같이 놀러 나올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고.”
그렇게 말하며 슬쩍, 견하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리안보다 좀 더 큰 키. 사춘기 이후의 남자애들은 이렇게 훌쩍 자란다. 때문에 옆얼굴보다 턱선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갸름하면서도 단단하다.
그래 이렇게 보면 연상의 연인과 걷고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고.
그러면서도 분명히 연하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 괴리감 때문에 야릇한 기분이 된다.
봄이 오면 리안은 대학교 3학년이 되고, 견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된다.
둘 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학점이나 출석 일수는 거의 채우지 못했지만, 어쨌든 특권 계급은 무난하게 다음 학년으로 진급하게 된다.
나이 차가 확 두드러지는 그 학년 차이에, 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멋있고 잘생겼고 든든한 연인이지만 그래도 연하에 미성년.
충동적인 입맞춤을 한 그날 전에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연인이다. 솔직히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가책과 가슴 한구석 아릿한 느낌이 뒤섞이기 직전에, 견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슬슬 배고픈데요. 따뜻한 거 먹었으면 좋겠어요.”
가라앉는 기분을 전환해 주는 것, 견하의 여러 면모 중 리안이 참 좋아하는 부분이다. 리안은 얼굴 가득 미소를 담았다.
이런 태사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지구상에 견하 뿐이겠지.
리안은 자신의 손을 잡은 견하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는 것도…… 좋았다.
“제가 내후년에 대학에 진학하면, 4학년이 된 누나하고 같이 다닐 수 있겠네요.”
리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녀의 연인, 소년은, 그녀와 함께하고 싶은 것만 생각한다.
리안도 소년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발그레진 얼굴을 숙이며 말했다.
“한 해 휴학할까? 그러면 2년 같이 다닐 수 있잖아.”
리안을 내려다보며, 소년은 미소지었다.
“그것도 좋고요.”
두 사람은 그렇게 계속 손을 잡은 채, 리안의 기숙사…… 라는 이름의 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관세동맹은 차근차근 진전을 보였다.
고려의 중앙은행장 차무룡이 새로 재무장관으로 발탁되어,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의 경제계 인사들과 협상에 들어갔다.
관세동맹 문제가 일단락될 시점이면 다른 나라들도 슬슬 새로운 협의를 할 준비가 될 것이다.
그때는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도는, ‘세계경제회의’ 같은 걸 생각해봐야겠지.
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각료회의의 첫머리를 열었다.
“키타이와 낭키아스는 신수덕 관련 조사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나요?”
리안의 물음에 안세규가 답한다.
“황제 폐하께서 협의하셨던 것처럼, 4국 공동 수사가 차근차근 진행되는 중입니다. 이로 인한 갈등의 징후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다소 혼란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소의 혼란?”
“예. 조사단 쪽에서는 ‘신수덕은 마지막 공방전에서 요새를 탈출하다 전사했다,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신이 망가져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가고 있던 듯합니다만…….”
류성일이 그 말을 받았다.
“지난 반란 시도 때 잡힌 자들이, 배후에 신수덕이 있다고 자백했지.”
“예. 정말로 신수덕이 사주했는지, 아니면 반란군이 신수덕의 이름만 빌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자가 살아있다는 거죠.”
신수덕이 살아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어쨌든 정권을 위협했다.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허동주의 시신을 광장에 전시했듯, 이번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듯, 신수덕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고려 제3제국을 위협하는 자의 말로가 어떠한지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중요한 문제다. 공포감이 흐릿해지면, 아무리 작은 반대 세력이라도 슬금슬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한 번 고개를 들면, 덩치를 키우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신수덕의 대략적인 행선지까지 파악하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아즈텍 연방…… 으로 향했더군요.”
“……아즈텍 연방이라.”
세계 제1의 초강대국. 여기로 갔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물론 아즈텍과 고려는 우방국이니 신수덕의 체포 및 신병 인도 등의 요청이 거부당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즈텍이 거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줄 여유가 있는지는 별개 문제다.
“지난번, 아즈텍 해군의 도발 문제는 결국 덮고 넘어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죠.”
리안의 시선이 전쟁성 장관 강태훈을 향한다.
“예. 말씀하셨던 대로. 단순한 사고 또는 실수…… 로, 서로 잘잘못을 따지지 않기로 하고 넘어갔습니다. 대신 그쪽 군 내부 사정을 조금 알아낼 수 있었죠.”
“상당한 성과군요.”
군 내부의 사정.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보통은 어떤 불만이 있다 한들 외부자에게 드러내는 건 꺼리는 법이다.
쉽게 알아낼 수 없는 정보는, 그저 가진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아즈텍 내부의 민족문제, 혹은 민족 간 갈등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습니다. 그 갈등이 계층 간 갈등, 육해공 각 군 간 갈등과 겹치면서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문제가 됐죠.”
유럽과의 대서양 전쟁에서 승리.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두 차례의 승리는 세계 1위의 국력이라는 아즈텍의 위상을 확고하게 만들어줬다.
문제는, 그런 승리가 아즈텍이 내적으로 안고 있던 모순을 그냥 덮어 누르는 데도 일조했다는 점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마약과도 같아서, 내부 모순으로 인한 고통에 마취제로 작용한다.
하지만 마취제는 마취제일 뿐이다. 치료제도 아니고, 지혈제도 아니다. 내부 모순이라는 병마는 반드시 다시 얼굴을 들고 덮쳐든다.
아즈텍에겐 1930년 새해가 바로 그때가 된 셈이다.
“여기에 작년 10월 세계 경제 대공황, 쿠아우테목 시에서 있었던 테러가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로 인한 테러 집단 색출 작업, 특정 정치 세력이 테러 집단을 지원한다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정치적 공세, 테러 집단이 내세운 의의에 대해 지지를 표한 시민들의 시위까지…… 지난 두 달간 상황이 많이 악화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아즈텍 군부에도 그런 분위기가 확산됐다는 말이군요.”
“유럽계 인사들과 대륙 원주민계 인사들 사이의 민족 갈등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군 내부에도 이게 반영되어서 서로 견제가 심각한 듯합니다.
지난번 아즈텍 해군 일부의 도발도, 실은 우리를 겨냥했다기보다는 ‘우리를 도발함으로써 아즈텍 군 상층부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흠…….”
리안은 잠시 입을 다물며, 생각을 정리해 질문으로 만들었다.
“그 테러 집단이 내세운 명분도 민족문제와 관련이 있나 보죠?”
“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철혈의 꽃’이라는 집단인데, 대륙계 원주민들의 국가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건 모양입니다. 여기에 동조하는 자가 적지 않은 것으로…… 외람되지만, 허동주나 천손민족협회와 비슷합니다.”
다시 말해, 아즈텍은 지금 내전을 겪기 전 고려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경제 문제라도 어떻게 수습한다면, 혼란을 가라앉혀 볼 수 있겠지만…… 아즈텍은 그 테러가 일어난 당사국이죠. 쉽게 혼란에서 벗어나진 않으리라 보는 게 좋겠군요.”
“여기에 더해, 바라트 공산주의자들의 개입도 있는 모양입니다.”
약한 술렁임이 각료들 사이로 퍼진다.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리안은 되물었다.
“바라트 간첩들의 선동이라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것도 그렇고,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계층 간, 빈부격차 문제가 이번 대공황과 함께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생적인 공산주의자도 상당히 늘어난 모양이고, 장교 중에도 동조하는 자들이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리안은 안세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즈텍 정부는 그런 일련의 사태들에 대해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지, 알 수 있나요?”
안세규는 고개를 저었다.
“뚜렷한 대책은 없는 모양입니다. 억누르지도 못하고, 타협하지도 못하고, 그저 정체된 상태죠.”
“……국력과 지혜가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닌 모양이군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생각하며, 리안은 속으로 혀를 찼다.
고려는 어떤 면에서는 운이 좋았다. 허동주와의 내전에 돌입하면서, 지지세력이 필요했던 리안은 사회주의 세력, 혹은 노동권 신장 운동과 손을 잡았다.
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내전에서도 이겼고, 더 나아가 각종 노동 관련 개혁에도 손을 댈 수 있었다.
그런 개혁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세력의 지지를 낮추고, 사회를 안정시킨다. 붉은 혁명을 회피하는 가장 온화하면서도 지혜로운 방법이었다고, 리안은 스스로의 정책을 평가했다.
“지금으로서는 아즈텍이 제2의 바라트가 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요.”
아즈텍이 고려나 바라트처럼 내전에 휩싸이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그 파장은 고려의 내전이 세계 경제에 끼친 영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뭐 그렇게 해서 끝내 공산주의자들을 일소한다면 그 나름대로 의의를 찾을 수 있겠지만,
만약, 새로운 공산 아즈텍이 들어선다면?
옛 초강대국이 바라트의 든든한 우방국으로 국제무대에 나타난다면,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뭐 이렇게 생각해봤자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시 신수덕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라면서 리안은 화제를 전환했다.
“신수덕이 살아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낭키아스의 국토를 통과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세규는 리안의 추론에 동의했다.
“각하의 말씀대로, 신수덕은 낭키아스의 묵인 아래 에스파냐령 마카오에 들어가, 거기서 아즈텍행 배를 탔을 겁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키타이의 항의가 있겠군요.”
“아마도 항의 수준에서 머무를 뿐, ‘관세동맹’이라는 판 자체를 깨고 나오진 못하리라 봅니다.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서둘러 키타이에 대한 경제지원을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경제지원이 시작되면 그 단물을 뿌리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장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리안은 끄덕였다.
입과 눈, 그리고 두뇌의 절반은 관세동맹에 관한 논의를 이어나간다. 그러는 한편으로, 두뇌의 나머지 절반은, ‘신수덕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