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군(4)
효윤은 맞은편에 앉은 루우를 바라봤다.
루우는 고급스러운 표지로 감싼 문서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중이다.
리안과 달리 책상 체질이 아닌 루우는 서류 일에 그닥 집중하지 못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리안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루우는 또래보다는 훨씬 서류 처리 같은 일에 능숙하다.
하긴 어려서는 몽골 황실에서 최상급 교육을 받았을 테고, 또 본인도 ‘황제가 되고 싶다’는 야심 하나로 외국의 내전에 뛰어드는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루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난 4월의 일이 떠오른다.
지금 루우가 앉은 자리에 리안이 앉아 있었지. 그때도 이렇게 제국태사 전용열차를 타고 가다가, 습격을 당하고, 모든 일이 시작됐다.
그때는 리안과 효윤도 형식적인 관계나 다름없었다. 견하같은 일반인 소년과 친해질 거라는 상상도 못 했고. 그냥 그런 날들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만 막연히 생각했다.
“이제 곧 해가 바뀌네.”
효윤이 중얼거리자 루우가 서류에서 눈을 뗀다. 마치 ‘효윤이 말을 걸 때까지만 읽어야지’라고 생각했다는 듯이.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게. 1930년인가.”
의자 위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다가, 허리를 앞으로 내밀 듯하면서 몸을 쭉 편다. 마치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는 것 같다.
“정말 별일이 다 있던 한 해였어.”
“루우 너야 이 나라의 황제까지 순식간에 올라간 해니까.”
루우는 표정 변화 없이, 이번엔 다리를 테이블 밑으로 쭉 뻗었다.
“올해 안에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어. 그건 타이시의 발상이었지. 나는 거기에 적응해나갔을 뿐이고. 또……”
“또?”
“그건 내 개인적인 일이라는 느낌이야.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신문에 실릴 법한 대사건이지만. 나한테는…… 올해 3월에 있었던 선대 태사의 죽음이 더 충격이 컸어.”
“아.”
그렇게 살짝 놀란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효윤의 초점은 거의 항상 리안에게 맞춰져 있었기에, 이렇게 다른 생각을 못 떠올릴 때도 있다. 효윤 스스로도 시야가 좁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 세상 전체로 보면, 리안의 일만 중요한 게 아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이었을 루우의 눈에는, 그리고 다른 외국인들의 눈에는, 태사 미승휴가 죽고 그 조카가 지위를 계승한 일이 꽤 큰 사건으로 느껴졌겠지.
미승휴는 지난 세계대전의 거목이기도 하니까. 어떤 이들은 ‘이렇게 역사의 한 장이 저물어간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또는 스무 살 여자가 얼마나 권력을 오래 유지할까, 결국 고려도 지도자 한 명의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이다…… 그런 전망을 했을지도.
하지만 리안은 고려 내전에서 승리해 정권을 유지했다. 물론 이제는 제국최고회의라든가, 황제 같은 새로운 요소들이 생겼지만, 어쨌든 리안은 최고권력자의 자리를 지켜냈다.
효윤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살고자 발버둥 쳤을 뿐인데, 그런 행위들이 겹치고 겹쳐서, 예상하지 못한 미래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1929년 한 해 동안 쌓인 일들은, 1930년에는 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오늘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혹은 약간의 변덕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1930년을 만들어내진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효윤은 루우가 보고 있던 서류의 내용을 입에 담았다.
“다행이야. 어떻게든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양보를 얻어내서.”
요 며칠 사이에 이루어진 극적인 합의. 4국의 대립은 어느 정도 공통의 이익을 찾아 합의를 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건은, 보다 긍정적인 1930년을 가져오겠지.
“아직 관세동맹이 정식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야. 입헌군주제의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것 정도지. 내가 한 일도 그렇게 밑바탕을 만드는 거였고. 이제 태사나 제국최고회의, 그리고 외무성과 재무성이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할 차례야.”
루우는 신중론을 내세웠다. 그 말대로다.
‘절대로 안 된다’에서 ‘일단 협상은 해보자’는 수준으로 양보를 끌어낸 것이다.
그래도 얼마 전에 생일이 지나,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소녀가 한 것 치고는 어마어마한 성과다.
“그것만 해도 어디야. 그 정도면 리안 언니나 다른 사람들이 일을 처리하기가 엄청 수월해지지 않았을까?”
“아예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래도 걱정은 돼. 내가 괜히 다른 곳에 걸림돌을 만든 건 아닐까 싶어서.”
몽골이야 고려와의 관세동맹을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환영하는 편이다. 몽골이 진행 중인 경제 진흥 정책에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시레문과 루우 두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는 이단 관련 문제에서도 교류가 원활해질 테니까.
하지만 키타이 측에선 ‘과연 그게 키타이 경제에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몽골과 고려의 동군연합이라도 성사되면, 키타이는 어마어마한 강대국과 긴 국경을 마주해야 한다.
그러니 키타이는 관세동맹에 앞서 안전 보장이 필요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관세동맹의 가맹국들은 서로를 병합하지 않는다…….”
루우는 중얼거렸다. 요컨대, 시레문이 후계 구도를 확정 짓지 못하고 사망해도 루우는 몽골 황위를 잇지 않는다고 선언한 셈이다.
또한 루우나 시레문이 울제이와 게레센제의 영토를 넘보지 않는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어떠한 경우에도’라는 조건은, 키타이나 낭키아스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둥의 핑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보호’를 핑계로 상대 국가에 군사력을 투입하고, 서서히 합병으로 몰고 가는 수법의 역사는 꽤 오래된 편이다.
“몽골과 고려 양국은 키타이가 관세동맹 속에서 예기치 않은 경제적 손실을 입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산업 육성에 투자한다. 이러한 지원은 무상으로 이루어진다.”
루우가 중얼거린 두 번째 조건은, 첫 번째 조건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무리 병합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해도, 키타이의 상황이 극도로 악화한다면, 얼마든지 휴짓조각으로 만들 수 있는 약속이다. 국제정세에서 힘의 논리는 무시할 수 없으니까. 울제이 칸은 그것만큼은 막겠다는 심산이다.
몽골과 고려의 도움으로 키타이의 주요 산업을 크게 육성한다면, 혹시라도 관세동맹에서 올 수 있는 부작용을 방지하고, 더 나아가 키타이 경제 자체를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 튼튼한 경제 기반을 갖춘 나라는 합병하기도 곤란하다. 그런 계산이다.
물론 세계적 경제 대공황이 현실화하는 이때, 키타이에 대한 적절한 원조는 고려와 몽골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분야를 돕고 어떤 분야는 돕지 않을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도울지는 실무진들의 몫이 되겠지만, 어쨌든 루우는 첫 단추를 끼웠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조건인데……”
효윤은 계속 잠자코 들었다.
“신수덕의 행방 조사. 그 수사관들이 낭키아스의 영토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 이지.”
루우나 리안만큼의 지식은 없더라도, 효윤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했다.
타국의 수사기관 사람들이 제한 없이 드나든다는 건 쉽게 말해, ‘당신네 수사기관도, 그 기관이 발표한 결과도 못 믿겠다’는 뜻이다.
즉, 상대 국가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다는 뜻.
단순한 위신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무대에서 그 나라 자체를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문제다.
그렇기에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 않다면, 협조를 구하거나, 범죄인을 인도해달라고 요청하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울제이는 대놓고 작은 형의 나라를 못 믿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키타이가 문제가 아니라, 여기선 낭키아스를 설득하는 게 문제가 됐겠네.”
효윤의 말에, 루우는 끄덕였다.
“두 분 숙부님 사이를 중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
울제이는 자국민들을 위해 신수덕의 행방을 꼭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레센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그런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틴다.
“결국 낭키아스 측 입장을 배려해서 몇 가지 제안을 해야 했지. 수사 과정에는 반드시 4국 모두의 수사관이 참여하며, 4국 중 2개국 이상의 수사관 동의를 받은 증거만 효력이 있다, 는 식으로.”
효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궁금했는데, 이번 기회에 물어보자 싶었다.
“나는 그때 산동 전투에는 나가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루우 네 생각에는 어때? 정말로 신수덕이 낭키아스의 협력을 받아서 탈출한 것 같아?”
루우는 양손으로 뒷머리를 한 번 쓸어올렸다. 그 동작이 그리는 매끈한 선이 아름답다고, 효윤은 생각했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뭐라 말하긴 어려워. 신수덕이 살아있다면, 자력으로 탈출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지만, 아예 불가능했을 거라고 말할 수도 없어.”
“살아있다면?”
“포탄에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거나, 부하들이 시체를 불태워버렸다면 이렇게 추적이 안 되는 것도 설명이 되지. 혹은 탈출은 했어도 중간에 어떤 이유로든 죽었거나, 게레센제 숙부가 처음에는 탈출을 도왔다가 나중에 죽여버리고 모르는 척하는 걸 수도 있고.”
그래서 솔직히 이런 수사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라고 루우는 덧붙였다.
울제이 숙부의 기분을 달래기 위한 조차에 불과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뭐 그렇게 해서 일단 협상 테이블에는 다 앉혀놨는데…….”
“지금 제시해 놓은 조건들이 고려의 발목을 잡는 건 아닌가 걱정된다, 는 뜻이구나.”
루우는 끄덕였다.
“상황만 더 복잡하게 만든 건 아닌가 싶어.”
효윤은 일단은 격려의 말을 던져보기로 했다. 야심만만한 소녀지만, 그래서 홀로 외국으로 와 황제의 자리까지 도전해 끝내 그 자리에 오른 소녀지만, 어쨌든 이런 국제 정치 무대는 처음이다.
압박, 긴장, 공포…… 그런 것들에 짓눌려 조금 작아진 듯한 어깨를 감싸줄 필요가 있다.
“아무런 양보 없이 원하는 결과만 얻어내는 건 거의 불가능해. 태사 각하한테서 들은 이야기지만.”
“……대단한 사람이야. 이번에 확실히 느꼈어. 이 짓을 몇 년 만에 그렇게 능숙하게 해내는 건 미리안이니까 가능한 일이야.”
루우가 리안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말은 처음 듣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효윤의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래 뭐, 대단한 사람이지. 그런 대단한 사람이니까 뒷일도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
루우는 피식 웃었다.
“흠…… 그러면 골칫거리만 잔뜩 만들고 그냥 떠넘기는 셈이네.”
두 소녀는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이렇게 둘이서만, 평범한 고등학생 소녀들처럼 웃는 건 얼마 만일까. 이것도 처음일까?
웃음이 그치자, 루우는 조금 진지한 얼굴을 했다.
“곧 고려에 도착하면, 그때는 주견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보자.”
효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견하의…… 이단 능력에 관한 문제.
그리고 일부러 머릿속에서 치워두고 있었던, 루우의…… 문제.
“그래.”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쌀쌀맞지는 않았지만, 말끝이 어색하게 매듭지어진다.
열차는 고려와 몽골의 국경을 통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