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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08화 (108/541)

숙군(1)

제국최고회의가 열리는 구 중서문하성 청사에, 긴장이 감돈다.

의원들은 수군거림까지 멈추고, 발언대를 향해 걸어가는 한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정식 의사당 건물은 아직 짓는 중이기 때문에, 의원들은 다소 불편하게 붙어 앉아야 했다. 그래도 급하게나마 건물 내부를 손봐서, 처음 의장 미리안을 선출할 때처럼 아예 다 서 있어야 할 정도로 좁은 건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몰려 있는 얼굴들을 흘낏 바라본 안세규는, 들고 있는 서류를 매만졌다.

발언대에 서기 직전, 의장석에 앉은 소녀의 얼굴을 본다.

제대로 말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눈빛이다. 중학생 같은 몸집과 얼굴로는 상상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진다.

지난 몇 달간의 내전을 통해 저 여자는 성장했다. 이제는 더욱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주견하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훈련시켜, 자신은 그 뒤에서 모든 판세를 조종하고 있다.

안세규는 이 거래 후에 요구할 것들을 머릿속으로 가늠하며, 발언대 위에 섰다.

외무장관의 울림이 큰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내각의 일원인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존경하는 의원님들께 호소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아주 조금, 몸을 앞으로 기울여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미 귀띔을 받은 사람이든, 아니면 처음 듣는 사람이든.

“지난 내전에서, 우리 군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란군에 맞서, 제국과 황제 폐하를 지켜냈습니다. 그 노고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군 장병들의 위대한 분투는 영원토록 칭송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규는 잠시 말을 멈췄다. 말하기가 망설여진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미 사정을 아는 자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모르는 자는 궁금해하겠지.

“극히 일부, 내전을 틈타 자신의 추악한 사욕을 채운 자들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이에 외무성과 법무성을 비롯한 내각 일부는, 군의 협조를 얻어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그 결과…… 도저히 우리 군이 행했다고는 믿기 힘든 참상들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안세규는 들고 온 서류를 넘기며, 거기 적힌 사건 중 몇 개를 읽어나갔다.

물론 안세규의 말에선 생략됐지만, 이 조사에는 미리안이 깊이 개입했다.

각종 약탈.

민간인 학살.

그에 수반한 다른 추악한 범죄들.

안세규의 말을 듣는 의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섭다. 그 사건들을 상상하며, 역겨워하고, 분노한다.

자신이 소속된 당의 이익이나 전략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런 문제를 떠나, 지금 안세규의 입에서 나오는 사건들은 ‘선을 넘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법뿐만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문제까지 넘어간다.

어떤 이들은 법만 어기지 않으면, 도덕이나 윤리의 선을 넘나들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법에서는 형벌에 제한을 두지만. 도덕, 윤리에는 그 제한이 없다. 멍청이들이나 법망을 피해갔다며 기뻐한다.

아무리 부패한 정치가라도 위신의 손상을 극히 꺼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사회라는 시스템은 절대로 이 선을 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법적으로는 귀족이나 대자본가의 지위, 경제적 이익을 유지할 수 있어도, 사회적으로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정략결혼의 길이 막힌다든가, 거래가 서서히 줄다가 끊긴다든가 하는 식으로.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위신의 문제다.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다. 도덕과 윤리는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이렇게 철저한 보복이라는 시스템을 통해서 유지되는 것이다.

사회는 이 ‘보복기능’이 마비됐을 때 비로소 붕괴한다.

따라서 모든 의원은, 안세규의 다음 제안에 찬성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 제가 말씀드린 사례는 극히 일부입니다. 이는 우리 군과 혁명 정부, 제국최고회의의 명예를 철저하게 짓밟은 죄악입니다. 신민을 보호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에 대한 항명죄이자 반역죄입니다.

따라서 저 외무장관 안세규는, 의원님들께 범죄 사실의 더욱 정확한 조사와 책임 규명, 그리고 처벌을 위한 법안을 마련해달라 호소하는 바입니다.”

의원들은 분노를 감추지 않고 모두 동의를 표했다. 물론 진심으로 분노한 이도 있고, 분노를 표하는 게 이익이 되기에 분노를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분노에 이성적 찬물을 끼얹어 손해를 보려는 멍청이는 없었다.

***

군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는 군법으로 처벌한다.

그러나 안세규가 제안하고, 제국최고회의가 의결한 법은, 이 관습을 철폐하기로 했다.

어떤 이들에겐 원칙의 침해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군을 민간 권력의 통제 아래 두겠다는 미리안의 의지는 확고했다.

“저는 내각의 수장인 태사입니다만, 제국최고회의의 의장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러 의원님께서도 궁금해하실 사안에 대해 외무장관께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안세규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소 긴장했다. 평범한 여자애의 목소리지만, 그 안에는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라는 압박이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 부분이 바로 연극의 절정부였으니까.

“제가 답할 수 있는 선에서는 전부 답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향후 법무성이나 내각의 다른 장관들과 협의해 제대로 된 답변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미리안은 안세규의 말에는 직접 답하지 않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책임자를 규명하고 처벌한다면, 그 범위는 어떻게 돼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사건을 저지른 범행 당사자를 일차적으로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범죄가 상관이나 동료의 강요로 이루어졌을 경우 등은, 명령 혹은 강요한 자를 우선 처벌하고, 실행자에 대해서는 정상참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나, 범죄자들이 소속된 부대의 상관들은 어찌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물론, 부대의 기강을 확립하지 못한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 마땅합니다.”

대충 이 정도다. 이젠 다른 의원들에게서 질문을 받을 차례다. 다른 의원들이 할 질문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고, 안세규는 충분히 대비해뒀다.

하지만, 리안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연극 대본에는 없던 질문이 날아왔다.

“어디까지나 만일입니다만, 장성급 이상에게 책임을 물을 경우, 혹시 거기에 일종의 ‘정치적 배려’가 필요하겠습니까?”

안세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감히 뒤도 돌아보지 못한다.

완벽한 무대, 완벽한 구도였으니까.

안세규는 발언대 위에 서 있고, 의원들의 눈은 거기에 집중됐다. 그리고 안세규의 뒤, 높은 의장석에 미리안이 서서, 내려다보며 질문을 던진다.

차마 이를 갈 수도 없다. 안세규는 함정에 걸렸다. 그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답은 한정되어 있다.

“……제국의 위신과, 황제 폐하의 존엄하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저는 감히 ‘정치적 배려’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안세규 스스로 이런 발언을 해버리면, 구 민국 정부 지지파 군대를 숙청에서 제외하기가 어려워진다.

미리안은 이 점도 계산하고, 법무장관 류성일이 아니라 굳이 안세규를 이 자리에 세운 거겠지.

황제와 주견하 사이의 일에만 집중하느라, 미리안에 대해서는 소홀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안세규는 침착을 유지했다.

동시에 앞으로 다시는 이런 실수는 없을 것이다, 라고 다짐한다.

***

처벌의 수위까지 순식간에 정해졌다. 최대 사형까지 가능하고, 유배나 강등, 징역까지 다양한 형량이 법에 포함됐다.

‘안전할 것이다’라는 귀띔을 받은 사람들은 담담하지만 조용히 몸을 숙였고, 그런 귀띔을 못 받은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당연히, 불안한 사람끼리 모인다.

친목이라는 목적을 가장한 술자리에서, 그렇게 불안한 군인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가 자기를 위해 얼마나 피를 흘렸는데 이런 대접인가!”

라고들 외치고 싶은 표정이지만, 누구 하나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러지 않으면 이 숙청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을 먼저 고발해서, 자신의 충성을 입증하고 싶은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불만은 꿈틀대고 있다.

아직 분명한 형체를 갖추진 않았지만, 이대로 불안과 압박이 계속된다면, 반드시 구체적인 모양을 띠게 될 것이다.

모두가 내전을 겪었다.

그 말은, 내전이 더는 돌발적 상황이 아니라, 고려해 볼 수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평화의 시대에는 군사적인 해결법에 현실감이 없다. 그러나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은, 군사적인 해결법도 ‘생각해봄 직한’ 대안 중 하나가 된다.

누가 그 생각을 먼저 꺼내고, 행동에 옮기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

당연히 태사부, 즉 미리안은 그 점도 예상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한 번 일어난 정변은 두 번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할 거야.”

리안은, 견하가 정말로 좋아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신감에 차 있고, 권력을 열망하며, 성취에 대한 기대와 환희를 담은 미소.

“숙군 작업이 시작된다고 해도, 당장 행동에 나설까요? 어쨌든 누나는 내전의 승자라는 위상이 있어요. 그 위상에 도전할 만큼 담이 큰 사람이 있을까요?”

견하의 물음에 리안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답했다.

“없으면 좋지. 이대로 그냥 조용히 숙청당해주면 나도 좋겠어. 하지만 우리는 늘,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도 대비해야 하지.

그래서 나는 정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가정 아래, 그 시점을 가늠해봤어.”

견하가 다른 질문 없이 표정으로 의문을 드러내자, 리안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새로 일어날 정변은 명분이 부족해. 그렇다고 허동주 같은 이데올로기를 갖춘 것도 아니지. 순전히 자기들 처벌을 피할 속셈으로, 정권 탈취를 꾀하는 거야.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정변 세력이 우선해야 할 것은 뭘까? 주견하 군.”

리안의 설명을 듣는 동안 이미 생각을 정리했기 때문에, 견하는 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럴싸한 명분을 먼저 확보하는 거겠죠.”

“맞아.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진 않지.”

“제국최고회의 의장, 혁명과 내전의 승자, 제국의 태사. 황실을 복구한 공신. 이걸 웃도는 명분은 찾기 힘들 테니까요.”

“그래. 그런데 딱 하나 있긴 하지.”

이제는 견하도 웃음을 짓는다. 쓴웃음이기는 했지만.

“황제 폐하인 루우가 있죠.”

“황제를 농락하는 권신이라는 이미지를 내게 씌우면, 뭐, 억지스럽긴 해도 일단 명분 자체는 만들어지지.”

“그렇다면…… 누군가 정변을 계획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실행일은,”

“루우가 귀국하는 날이지.”

“루우를 먼저 확보하려 들겠군요.”

말을 해놓고 나서 견하는, 자기가 한 말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루우는 일반인이 아니다.

“하지만 루우 정도 되는 이단을 누군가 납치한다든가 하는 게 불가능할 텐데요.”

허동주 토벌에서의 활약 덕분에, 사람들은 루우가 얼마나 강력한 이단인지 웬만큼은 알고 있다. 그런 애를 납치한다는 작전을 짜는 건 불가능하다.

“정변 세력은 루우의 맹점을 노릴 거야. 루우는 황제고, 어쨌든 정변 세력도 신민이지. 명백한 국가의 적이나 역적이 아닌 이상, 자기를 옹위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이단의 능력을 써가며 죽이는 건 불가능해.”

견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어떻게든 폐하를…… 황궁으로 무사히 모셔올 수 있도록 해야겠군요.”

리안의 미소가 장난스럽게 변한다. 이것도 견하가 참 좋아하는 미소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내가 괜히 최효윤을 루우 옆에 붙여뒀겠어?”

견하의 얼굴에도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이 떠오른다. 리안의 손가락이 견하의 코를 살짝 건드렸다.

“이런 상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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