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6)
방으로 돌아온 루우는 대충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고 등을 효윤에게 기댄다.
“누르지 마. 그리고 옷 좀 입어.”
“싫어. 피곤해.”
효윤은 읽던 책을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꼭 누구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라는 게, 이렇게 일 끝나고 돌아오면 체면이고 뭐고 일단 옷 다 벗어 던질 정도로 피곤한 건가.
루우는 고개를 돌려 효윤이 읽다 만 책에 눈길을 준다.
“무슨 책 읽고 있었어?”
“견하한테서 빌린 역사책.”
“지루하지 않아?”
“그냥 기다리고 있는 것보단 덜 지루하니까.”
솔직히 역사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리안과 견하의 대화를 따라가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가끔, 결정을 망설이는 리안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주려면 그에 맞는 교양이 필요하다.
역사뿐만 아니라 철학, 사상, 경제, 군사 관련 책들도 조금씩 읽고 있다.
루우가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불길하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견하랑 대화할 거리를 만드는 거야?”
여기서 당황하면 그냥 놀아나게 된다. 정면으로 맞서자.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루우의 얼굴이 의외라는 표정을 띤다. 효윤은 약간 만족감을 느꼈다.
“리안 언니를 보좌하면서, 그리고 너를 수행하면서, 나도 참 모르는 게 많구나, 하고 느꼈어. 그러니까 틈날 때마다 공부해야지. 칼만 휘두를 줄 아는 사람이 되긴 싫거든.”
루우는 그대로 등을 기댄 채, 팔만 들어서 효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기특해.”
효윤은 머리를 흔들어서 그 손을 떨쳐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다.
대신 다른 생각을 한다.
리안이나 견하와 몇 주나 보지 못했다. 언니는 또 밤을 새우진 않을까. 관리해주는 사람이 옆에 없으면, 일상생활이 쉽게 엉망이 되는 사람이다.
리안도 지금 여기의 루우처럼 지내고 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견하는, 어떻게 지낼까.
죄의식, 에서 비롯된 걸까, 이 감정은.
그 날렵한 옆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효윤은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다.
고민에 잠긴 얼굴. 대책을 궁리하는 얼굴. 집중하는 얼굴. 어딘가…… 슬픔에 잠긴 얼굴.
그 슬픔을 막지 못한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다. 효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묘한 곳까지 전진한다.
견하의, 전투가 끝나고 짓는, 미소.
그 모든 게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한다.
견하의 ‘집무실’을 떠올린다. 서류와 책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책상. 소년은 그 엄청난 양의 정보를, 흡입하듯이 읽어내고 있었지.
나는 이렇게 몇 권 가져와서 읽는 것도 힘든데, 견하는 정말 대단하다.
……라고 생각하려다, 효윤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냥 대단한 게 아니다.
루우는 분명 견하의 높은 지능이, 이단이 되면서 생긴 ‘이상 현상’이라 말했다.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뜻.
‘특수한 사례’인 만큼, 그게 견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 견하의 지능, 신체 능력 등이 높아진다면 분명 좋겠지만…….
아예 걱정을 놓을 수는 없다.
작은 하얀 괴물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그 얼굴. 루우는 견하가 그것들을 ‘아이들’이라 표현했다고 했지.
돌이켜보면 정말 이상하긴 하다.
허동주를 죽였던 신환도역 전투에서도, 견하는 눈에 띄게 지쳐갔다. 견하는 나약하지 않은데, 그렇게 빠르게 지쳐갔다는 건, 분명 다른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
허동주를 추격할 때 타고 갔던 ‘기갑사’라는 병기가 사라진 것도, 루우의 말에 따르면…….
아니, 아닐 거야. 지나친 걱정이다.
평범한 소년이 이단이 된 지 아직 1년도 안 지났다.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다. 지능도 원래 소질이 있던 게 여러 사건을 계기로 꽃피운 거다.
그래, 그 소년이…… ‘괴물’이 된다든가, 할 리가 없다.
***
“진짜 피곤하다.”
갑자기 루우가 그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켰다.
이번엔 효윤이 루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매끈한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허벅지에서 무릎, 정강이와 발목, 발등까지.
기지개를 켜면서 발가락도 쭉 펼치는데, 그 모양이 귀엽다. 무심코 웃을 뻔했지만, 효윤은 표정을 굳혔다.
“당장 옷 걸치라고는 안 하겠지만, 자기 전에 일단 씻는 게 어때?”
그러자 루우는 어깨 근처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냄새나?”
“냄새가 나야 씻는 건 아니잖아?”
굳이 루우에게서 냄새를 따지자면, 아주 좋은 향기가 난다.
그 향기에도 루우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그녀만의, 소녀다운 향기.
무심코 끌어안고, 쓰다듬고 싶을 정도로 좋은 향기다. 효윤에게 루우는 ‘연하 같다’는 느낌이 강해서, 정말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 머릿속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싹 가시지만.
문득, 루우가 두 번이나 ‘피곤하다’고 했던 데 생각이 닿았다. 넌지시 물어본다.
“많이 피곤해?”
루우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효윤을 두 팔로 껴안고 쓰러뜨린다.
더 확실하게 끼쳐오는 향기와 맨살의 감촉에 당황해, 뭔가 말을 해보려 했지만, 루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연히 피곤하지.”
목소리가 묘하게 잠겨 있다.
“나도 아버지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싶진 않아. 굳이 외국까지 나가서 황위를 쥔 다음, 내가 태어난 나라를 협박해서 계승권을 따내는 것도 마냥 기분 좋진 않아.
그냥 공주였다면 명절에 숙부들과 웃으며 이야기 나눴겠지. 하지만 지금은 숙부들과 웃는 얼굴로 으르렁거려야 해. 그것도 신경을 갉아 먹어.”
루우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얘도 그냥 여자애구나. 나랑 같은, 그런 생각이 든다.
효윤은 그녀를 일으켜서 얼굴을 볼까, 아니면 그 푸념을 계속 듣고만 있을까 고민했다. 혹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진 않을까.
“하지만 절대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아. 날카로운 신경을 유지하는 고통보다, 몽골의 황위를 갖고 싶다는 야망이 훨씬 커. 웃기는 점은, 야망이 고통을 없애주진 않는다는 거지.”
부모님을 비롯한 일가친척이 없는 효윤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모순된 감정이 든다. 최소한 효윤의 마음속 ‘부모님’은 그녀와 갈등하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루우는 살아있는 부모와 싸워야 한다. 어쩌면…… 피를 보는 적이 될지도 모르지.
만약 루우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다, 효윤은 물었다.
“……모후(母后)와는 이야기하지 않는 거야?”
루우는 몸을 살짝 일으켰다.
정면에서 효윤을 내려다본다.
효윤은, 떨림마저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굳었다.
루우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기에.
“어머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병상에 누워 계셔. 십수 년째 의식도 없이.”
왜, 하고 물을 수도 없었다.
이제 조금 루우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루우도, 견하나 효윤, 리안처럼, 결국 고아다.
“왜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지 않아?”
속삭이듯 말한다.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감히 끄덕이지도 못하고, 깜박이지도 못하고, 그 큰 눈동자만 들여다본다.
“지난번에 하다 만, 내 ‘이단’ 능력에 관한 이야기랑 관련이 있는데. 어떻게 할래. 듣고 싶어?”
***
안세규는 주견하와의 ‘약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안세규 혼자 일방적으로 주견하의 의도대로 놀아나선 곤란하다. 그러니까 먼저, 주견하의 의중을 파악해 둬야 한다. 움직이는 건 그다음이다.
소년감찰국장실을 방문했을 때, 주견하는 몇 개월 전보다 더 날카롭게 벼려진 듯한 모습이었다.
하얗고, 붉은 선이 들어간 제복을 걸쳤다. 눈꼬리는 팽팽하게 당겨져 안세규를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지만, 전처럼 몸이 바짝 긴장하고 있진 않다. 힘을 뺀, 여유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거만하진 않다. 딱 ‘이 애가 이젠 이쪽 일에 익숙해졌구나’하는 느낌.
단 몇 달 만에 이 정도 성장이 가능한 걸까.
“피차 바쁘긴 마찬가지니,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할까.”
“외무장관님의 효율적인 일 처리는 저도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장관님 말씀대로, 바로 중요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자기가 먼저 이야기를 하겠다며,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간다. 이렇게 되면 무슨 말이 나올지 안세규가 긴장하게 된다.
“황제 폐하께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옆에서 힘써 보필해달라는 말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나 저희 소년감찰국에서도 어느 정도 폐하의…… 성향을 파악하고 부탁하신 일에서도 성과를 보고 있고요.”
“성과……? 주 국장, 실례되는 말인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최근 주변국과의 외교는 황제 폐하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과연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나?”
주견하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안세규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짐작도 못 했다는 듯한 태도다.
“장관님께서도 폐하께 받아보시지 않았습니까?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 말입니다.”
안세규는 속으로 으음, 하고 신음을 흘린다. 그 자리에는 소년감찰국 소속 두 남녀가 있었다. 그래, 간과했지만, 주견하의 눈과 귀가 미치는 자리였다.
“그 「계획」 자체에 반대하는 건 어렵습니다. 장관님께서도 그렇기에 일단 폐하께 협력해드린다고 말씀하셨고, 대신 황제의 ‘거부권’에 제한을 두는 약속을 받아내셨잖습니까?”
“그랬지.”
“저희도 외무성의 방침과 같습니다. 폐하를 정면에서 반대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면 폐하와 대립할 뿐입니다. 어쨌든 정부 기관인 저희 소년감찰국으로서는 이의를 제기하거나 재고를 요청할 수는 있어도 ‘항명’은 어렵습니다. 따라서 저희도……”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 자체에는 협력하면서, 다른 ‘부드러운’ 방식으로 황제의 권력을 견제하며 제동을 걸 수밖에 없다. 주견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것치고는 카라코룸까지 방문하는 등, 꽤 적극적으로 「계획」에 관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황제의 권력을 어떻게 ‘견제’한다는 건지, 주 국장의 생각이 듣고 싶군.”
안세규의 눈에 서늘한 빛이 감돈다. 견하가 보여준 의외의 총명함에 당황하긴 했지만, 안세규는 아직은 견하가 넘볼 수 없는 인간이다.
견하는 조금 긴장하며, 설명을 시작한다. 여기서 안세규를 납득시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각 도시에는 ‘색깔’이라는 게 있습니다.”
도시의 여론을 주도하는 세력, 그 세력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 그리고 그런 세력과 시민의 ‘역사’. 그게 도시의 ‘색깔’을 만든다.
“동명특별시는 선대 태사께서 건설하신 이래, 제국입헌당의 색깔이 강한 곳입니다. 내전을 거치면서 더욱 강해졌죠.”
안세규는 머릿속에서, 읽어뒀던 「계획」의 내용 일부를 꺼낸다. 분명 연방의 수도는 ‘동명특별시’로 한다고 되어 있었지.
“따라서 연방의 수도를 동명으로 유지하면, 황제는 현 여당인 제국입헌당과 타협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강화하려 들 수 있습니다.”
안세규는 오른쪽 눈썹을 뒤틀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이 소년은.
“몽골의 현 수도인 칸발리크 역시, 몽골 황실의 색깔이 강한 곳입니다. 여기를 연방의 수도로 둔다면, 어쨌든 보르지긴 황실의 일원인 루우는 어렵지 않게 권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안세규는 이제 그 다음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계획」에 수정을 가해, 연방의 수도를 새로 정하자는 거군? 그리고 그 수도 후보는, 몽골의 옛 수도이자 한창 개발이 이루어지는 ‘카라코룸’이고. 그래서 사전 답사차 다녀온 건가?”
소년은 미소지으며 끄덕였다.
“아직 누구의 ‘색깔’도 칠해지지 않은 곳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