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3)
“지금의 경제 위기의 타파를 위해, 우리 고려는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를 포함한 관세 동맹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좌중을 둘러보며, 여준설은 말했다.
좌중이라고 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죄다 국가 경제와 관련된 이들이다. 재무장관이나 무슨 준비위원회, 중앙은행장 같은 사람들.
주식시장이 붕괴하고 나서, 여준설은 아즈텍에 머무는 기간을 좀 더 늘렸다.
더 많은 나라에서 관계자들이 찾아왔고, 갑작스럽긴 했지만, 세계경제회의 비슷한 것이 열렸다.
“이미 일이 벌어진 마당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해봐야 합니다. 아울러, 각국의 재무장관님들, 중앙은행장님들께서도 호혜적인 관세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자국에서 힘써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미친 듯이 날뛰는 경제지표를 진정시키려면 어떻게든 정책으로 통제해야 한다. 통제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불필요한 변수를 줄여야 하고, 따라서 관세를 가능한 낮춰 둘 필요가 있다.
누군가 말한다.
“고려의 재무장관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각국 행정부나 입법부가 경제 전문가들의 견해에 모두 동의하진 않을 겁니다.”
그 말대로다. 결국 최종 결정권은 다른 이들에게 있다. 여기 앉은 이들 중에도, 여준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가 그렇다. 여준설과 고려의 대책이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론적으로 예측만 가능할 뿐, 또 어떤 변수에 의해 틀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다른 견해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와중에도 자국의 경제를 살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보호무역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올 수도 있어요.”
문제는 그런 견해가 틀렸다고 단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상품에 따라 보호무역이 답이 될 수도 있다.
지금과 같은 경제 붕괴의 시작점에서, 일단은 비상조치로, 자국의 주요 산업만큼은 관세를 통해 보호하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저는 근시안적인 생각이라고 봅니다. 당장은 자국의 특정 산업이 붕괴하는 걸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관세 인상은 돌고 돌아서, 결과적으로는 모든 산업에 독으로 작용할 겁니다.”
“그걸 우리 같은 사람들 모두가 동의한다고 해도, 국민들 생각은……”
“국민들을 설득하는 게 정치가들이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여준설은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죄송합니다. 조금 흥분했군요.”
야마시타 테조조목이 일어서서 진정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자, 자, 논의가 과열되는 듯합니다. 다들 피곤하실 테고, 조금은 쉬었다 다시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긴급 상황이긴 해도 이런 위기가 전례가 없던 건 아닙니다. 이번에도 우리는 잘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선배들이 그랬듯이 말이죠.”
***
여준설은 피로를 풀러 나간 옥외실에서, 로마의 제국중앙은행장 알렉시오스와 마주쳤다. 서로 눈인사를 나누고, 각자 다른 탁자에 앉아 차를 홀짝인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고려,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 4국 간 관세동맹, 잘 되겠습니까.”
“잘 되게 해야죠.”
“관세동맹이라는 게 말입니다.”
알렉시오스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여준설 쪽으로 돌렸다.
“단순히 경제적 의도만 갖고 이루어지진 않아요. 정치적 목적도 있죠. 아니, 오히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제를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여준설은 말을 아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저는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고려의 새 왕조를 연 황제 폐하, 몽골 출신이라고 하셨던가요?”
여준설은 일단 끄덕인다. 부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알렉시오스는 말을 잇는다.
“부각되진 않았지만, 몽골 카간의 따님이기도 하시고요.”
“말씀하시는 게 관세동맹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요.”
“이런 겁니다. 지금 장관께서 추진하시는 관세동맹, 실은 고려 황제 폐하와 정치권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위한 밑 작업이 아닌가, 하는 추측들을 할 수가 있다는 거죠.”
안 그래도 언짢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 여준설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지금 실례를 범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아까 같은 공식 석상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기에,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 로마로서는 고려에 악감정을 가질 일은 없어요. 그러니 나는 순전히 호의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요.”
여준설은 일단 가만히 들어보기로 했다. 헛소리를 한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그만이다.
“4개국 관세동맹이 체결되면 상당히 거대한 경제블록이 형성되는 셈입니다. 어떤 이들은 고려가 관세동맹으로 이득을 보면서, 관세동맹 밖의 국가들을 향해서는 관세를 올려 이득을 보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고려가 관세를 올리면 당연히 다른 나라들도 보복으로 관세를 올릴 겁니다. 그 정도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똑같이 관세를 올린다 해도 입는 타격은 다르겠죠. 경제의 덩치가 큰 나라와 작은 나라 사이엔 그런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고려는 관세동맹으로 몸집을 불릴 예정이고요.”
이제는 여준설도 알렉시오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게 고려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입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귀국의 황제 폐하는, 몽골의 황위 계승권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최소 동군연합, 혹은 황위 계승을 빙자한 무력 합병으로, 강제로 고려의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는 방법을 생각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겁니다.”
알렉시오스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에겐 여준설도 용의자다.
“경제적 혼란을 틈탄, 그런 군사적, 정치적 야망의 달성, 다른 나라들이 곱게 보진 않을 겁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을 지배하는 대제국이 갑자기 등장하는 건, 뭐 경제적 혼란도 가중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안보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관세동맹이, 나머지 3국을 고려가 합병하기 위한 밑 작업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런가.
여준설은 불쾌하긴 했지만, 현실에서 눈을 돌리진 않았다. 미처 생각하진 못했지만, 알렉시오스의 말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머리 좀 굴릴 줄 아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변국인 일본이라든가, 다리다 같은 나라에서는 비상이 걸리겠지.
태평양 건너편 아즈텍 연방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아즈텍은 국내 민족 갈등이 거세지는 만큼, 아즈텍의 지위를 위협할만한 새로운 강대국의 출현을 경계할 것이다.
그래도 여준설은 할 말을 해야 했다. 그는 지금 고려의 대표로 여기 나와 있으니까.
“세계대전이나 공산 혁명이 아니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는 바라트 측 대표도 나왔을 겁니다.”
미묘한 폐쇄경제. 일단 돈이 되는 물건들만 시장에 내놓고, 수입은 철저히 규제하면서, 세계 시장과는 벽을 세우고 있는 나라.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
당장 무굴 제국 시절만 해도, 세계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나라였다.
그랬던 나라가 혁명과 동시에 뚝 떨어져 나갔으니, 남은 나라들의 경제에는 지진이 일어날 수밖에.
실제로, 지금의 경제위기도 자본주의 세계를 붕괴시키기 위한 바라트의 음모가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랬다면 우리들의 논의도 좀 더 여유가 있었겠죠.”
알렉시오스도 아쉽다는 듯 그렇게 덧붙였다.
“무굴 제국 시절의 경제 규모를 생각해보면, 어떻게 다들 머리를 맞대면 지금보다 더 나은 대책이 나왔을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무굴 제국의 빈 자리, 아니, 단순히 빈 자리가 아니죠.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은 어떤 식으로는 좋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니까, 그것까지 무마할 경제 대국을 하나 만들어내야 한다고.”
알렉시오스는 흘리듯 웃었다.
“그게 고려를 포함한 4개국 관세동맹이라는 겁니까.”
“어쩌겠습니까. 바라트에 개입해서 반혁명을 지원하려는 각국의 시도는 무산된 지 오래인데.”
바라트 공산 혁명 직후 있었던 일이다. 바라트 정부는 신 이슬람 제국 및 태평천국과 단독 강화를 맺고, 내전에 들어갔다. 몇몇 나라들이 그 내전에 개입해, 반혁명 정권을 지원했다.
개입은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브리튼이 바라트 내에 보유하고 있던 조차지나 점령지가 싹 날아간 것도 그때였다.
당연히 바라트의 비 공산권에 대한 불신만 깊어졌다.
“바라트가 대체 언제 ‘정상적’인 세계 경제의 일원으로 복귀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니 남은 우리라도 어떻게든 해야죠.”
알렉시오스는 여준설의 속을 읽어보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여준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유라시아의 기존 경제 교류망을 회복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전통적인 실크로드 기반 경제망 말인가요?”
물론 옛날 낙타나 말을 타고 다니며 교류하던 그대로의 길이 아니다. 그 길 위에는 철도가 놓였고, 기차가 대량으로 물자를 싣고 다녔다.
이 역시,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로마 측에서는 이런 망을 복원하는 데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더군요.”
이번에는 여준설이 역공을 취한다.
“어쩌겠습니까. 국내 문제가 급한 것을.”
기존에 보유하던 국토 면적을 훨씬 넘는 광대한 식민지.
그 식민지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 신자들이나, 민족주의 독립 여론을 진압하는 데에는 막대한 군사 비용이 든다. 로마는 그걸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하다못해 좀 더 관용적인 정책을 펼치면 좋으련만, 로마의 시민들부터 정치가들까지, 절대로 그런 타협을 하려 들지 않는다. 갈등은 심해져만 간다. 언젠가는 피비린내 나는 결말을 맞이할 터.
“그토록 번영하던 바그다드 무역로의 영광도 이제는 옛날 일이죠. 거기서 동쪽으로 페르시아를 타고, 몽골과 고려까지 이어지던 무역로, 이제는 버려진 철길이 된 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페르시아까지 번진 공산화의 물결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한때 세계 무역의 교차점이나 다름없던 메소포타미아는, 이제는 공산주의를 막는 방벽의 역할밖에 못 한다.
“4개국 관세동맹은 그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몽골 카간께서는 카라코룸을 특히 신경 써서 개발하고 계신다더군요.”
그리고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한 철도망도.
“카라코룸에서 이른바 옛 ‘초원길’을 따라 이어지는 철도망을 보강하고, 흑해 연안의 항구까지 이은 다음, 거기서 콘스탄티누폴리까지 육로든 뱃길이든 이어놓는 겁니다. 우리는 이 길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는 거죠.”
“그 길 양 끝에 있는 게 로마 제국과 4개국 관세동맹이라면…… 흥미로운 생각이긴 합니다.”
지난 19년간 망가진 구 육상 무역로를 다시 활성화한다면, 지금 일어나는 대공황에 대한 또 다른 대처법을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막연한 상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일단 사람들은 그런 작은 희망이라도 품었다.
***
세계 경제의 거물들은, 밖에서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희망적인 대책을 이야기해주려고 한꺼번에 밖으로 나왔다.
경제 문제는 사람들의 심리적 안정도 중요했다. 그래서 ‘이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대책을 연구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그들은 폭이 넓은 계단을 굳이 함께, 여유롭게 걸어 내려왔다.
기자들이 소란스레 다가섰다. 카메라 불빛이 시끄럽게 터져 나왔다. 아즈텍 재무장관이 상황을 정리하러 앞으로 나선다.
바로 그 순간,
한 청년이 사람들을 뚫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뭐라고 괴성을 지른다. 그러나 누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청년은 품에서 폭탄을 꺼내 던졌다.
여준설을 포함한 대다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