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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01화 (101/541)

대공황(2)

여준설은 숙소에 돌아와 머리를 싸쥐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누구도 손해 보지 않으려 한다. 누구도 세계 경제의 파멸을 막겠다는 생각은 없고, 눈앞의 손해에만 전전긍긍한다.

이미 쿠아우테목의 주가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에 반해 물가는 기괴할 정도로 곤두박질친다.

실제로 필요한 물품의 거래에 풀려야 할 돈이, 주식이라는 투기에 위험할 정도로 몰렸다.

여기에 비정상적으로 망가진 국제교역, 관세, 차관 등이 기름을 붓는다.

“……정치 문제에서 자유로운 경제 논의는 불가능하단 말인가.”

한숨을 길게 내쉰 끝에, 그런 푸념이 나왔다.

직접 들어 본 브리튼의 주장도, 신성 제국의 주장도, 모두 일리는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국민의 지지를 받아 탄생한 ‘정권의 관료’들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배운 이론만으로 활동할 수는 없다. 모든 행동에 정치적 사정을 고려해야 하기에.

이 모든 일의 근원은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교 국가 티무르 울루스를 무너뜨린 이슬람 대봉기. 그 힘은 폭발적으로 확장해, 페르시아 일대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시리아와 아라비아로, 이집트로 번져나갔다.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이 폭풍 같은 힘은 주변 세력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 악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하나의 국가로 재탄생했다. 이것이 자칭 ‘다르 알 이슬람’이라고 하는, ‘신 이슬람 제국’이다.

그 후 얼마 동안은 잠잠한가 했더니, 침략 전쟁을 개시했다. 그들이 처음 탄생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아프리카에서의 확장은 에티오피아 제국의 주권을 침해했고, 이는 에티오피아의 동맹인 로마 제국의 신경을 건드렸다. 뿐만 아니라 역시 아프리카 식민지를 확장하던 브리튼과도 충돌을 일으켰고.

동쪽으로는 인도양, 힌두쿠시 산맥에서 무굴과 몇 차례 전쟁을 치렀다.

로마 제국의 국경인 아나톨리아 남부에서도, 지중해에서도. 더 나아가 북아프리카에서도 해협을 지나 에스파냐를 다시금 공략하려 들었다.

주변국들은 이런 만행을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몰렸다.

특히 중세 시기 이슬람의 폭발적 침략을 기억하는 유럽인들은, 아예 새로운 ‘십자군 전쟁’까지 외치며 신 이슬람 제국을 없애야 한다고 떠드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렇게 외교적으로 고립된 신 이슬람 제국이 택한 동맹이, 먼 동방의 태평천국이었다.

그다음 일들은 고장 난 기관차처럼 멈추지 않고 일어났다.

태평천국이 고려와 몽골을 침략한 것과 거의 동시에, 신 이슬람 제국도 로마, 에티오피아와 에스파냐를 침략한 것이다.

에스파냐의 동맹이자 아프리카의 이권을 지키려는 브리튼이 동맹을 명분으로 참전했고, 심지어 에스파냐, 브리튼과 경쟁 관계에 있던 신성 제국까지 지중해에서의 안보 위협에 침묵하지 않기로 하면서,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은 크게 확장됐다.

신 이슬람 제국의 동맹인 태평천국, 그와 맞선 고려, 몽골, 일본 등의 나라가 이 유럽의 나라들과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이른바 ‘연합국’이라는 집단이 형성된다.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국’ 가맹국들을 토대로 국제기구를 설립하자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결국 다들 자기네 이권을 찾느라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마치 지금처럼.

“우리가 에스파냐나 신성 제국, 로마, 에티오피아에 제공한 차관, 아라비아 칼리프국이 갚아야 할 배상금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입니다. 브리튼 국민 중 누구도 ‘희생적 양보’를 하는 정권을 지지하진 않을 겁니다.”

브리튼 측의 말이었다. 더 설득할 말이 궁해진 여준설에게, 브리튼 재무장관은 몇 마디 더 덧붙였다.

“국제 공조는 아무래도 힘들 겁니다. 원래는 브리튼, 칼마르, 에스파냐가 동맹을 맺고 신성 제국을 견제하는 구도가 유럽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 균형이 에이레 독립으로 깨졌습니다.

신성 제국을 견제하는 동맹 간 연결에 큰 구멍이 생겼어요. 신성 제국이 견제에서 벗어나려 하는 이 시점에…… 외교적, 군사적 갈등이 경제에서의 협력을 계속 방해할 겁니다.”

여준설은 그다음엔 신성 제국 측 사람들을 찾았다. 그들의 말은 브리튼 측의 입장을 딱 대칭이 되도록 뒤집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세계 3위의 경제력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국내 문제의 해결만으로도 급급합니다.”

“게르만계와 이탈리아계의 독립 움직임 때문입니까?”

나폴레옹 1세 보나파르트. 그는 프랑스의 황제가 된 뒤, 기존 신성 제국의 제후들과 거래를 했다.

신성 제국 황제를 퇴위시킨 뒤, 자신을 새로운 신성 제국 황제로 추대할 것.

이 거래에는 프로이센 왕국과 보헤미아의 독립 성향 귀족들이 응했다. 기존 황가였던 합스부르크는 저항했지만, 나폴레옹에게 분쇄 당했고, 지금은 마자르의 왕가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카롤링거 왕조 이후로 나뉘었던 게르마니아와 갈리아, 이탈리아 북부가 재통합된 제국이 탄생했지만, 근대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왜 게르만인들이 프랑스인 황제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

왜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인 황제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런 움직임을 뒤에서 선동하는 나라들이 있다. 칼마르, 프로이센, 마자르, 로마가 바로 그들이다.

신성 제국은 게르만계 국가들을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눠 통치했다. 북부는 게르마니아, 남부는 알레마니아.

여기서 게르마니아 지역의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나라는 프로이센과 칼마르이며, 알레마니아를 선동하는 나라는 마자르의 합스부르크 왕가다.

이탈리아는 독립의 욕구도 있지만, 동시에 옛 로마 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어서 사정이 조금 다르다. 당연히 이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건,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 제국.

로마는 지금 콘스탄티누폴리에 수도를 두고 있지만, 신성 제국으로부터 자국의 발원지를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튀어나오곤 한다.

신성 제국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역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

“주변국이 우호적으로 나와 줘야, 그래서 우리도 국내 사정이 좀 안정돼야 밖을 돕지 않겠습니까. 안으로는 흔들면서 밖으로는 도와달라니, 예의나 도리를 떠나서, 모순된 행동 아닙니까.”

여준설은 그 후, 에스파냐나 칼마르의 재무장관, 혹은 중앙은행장들을 만나 면담을 해봤지만, 사정은 어디나 비슷비슷했다. 국제 공조를 하기엔, 서로 간 신뢰가 너무 부족했다.

그래도 며칠 더 기다려, 뒤늦게나마 쿠아우테목시에 들어오는 로마 제국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과의 만남 역시, 여준설에겐 좌절을 안겨줬을 뿐이다.

“아라비아 무역 봉쇄 조약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자들이 무슨 이해를 구한답니까?”

굉장히 신경질적이고, 힐난하는 말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 제국은 고려처럼 세계대전으로 멸망할 뻔한 나라였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과거에도 수차례 했다.

이슬람은 탄생하자마자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로마의 영토인 북아프리카와 성지 예루살렘 등을 침략해 빼앗았다.

투르크계 이슬람 세력은 아예 아나톨리아를 넘어 헬라스 지역까지 침략했다.

그런 역사를 겪은 이후로, 로마에게 이슬람이란 ‘멸종시켜야 할 악’이지 공존의 대상이 아니었다.

세계대전의 결과로 북아프리카와 메소포타미아 등 광대한 지역을 식민지로 삼은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로마는 ‘아라비아 칼리프 국’으로 쪼그라든 신 이슬람 제국의 육로를 완전히 봉쇄하고, 에티오피아와도 협력해 해상 무역까지 막고 있다.

아라비아를 영원히 불모지로 만든다는 게 로마 제국 국방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슬람의 잔당이 퍼져나가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브리튼이나 에스파냐가 이런 전략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나머지 지역들은 독립된 나라로 놔둬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름 국가와 정권을 안정시켜야, 이슬람의 확산을 막을 수 있어요.

그런데 대체 브리튼이나 에스파냐는 뭡니까. 식민지를 확장한다면서 기존 아프리카 권력 질서를 다 파괴하고 있잖습니까.

이슬람을 막을 권력이 없는데, 어떻게 그 확산을 막습니까? 게다가 브리튼과 에스퍄나는 확산을 막을 의지도 없어요.”

에티오피아와 로마는, 자신들이 점령한 북동부 아프리카를 제외한 나머지 아프리카에 동맹국, 혹은 꼭두각시 왕국들을 세워서 아프리카 대륙의 질서를 잡으려고 한다.

문제는, 에스파냐나 브리튼이 세계대전에서 입은 경제적 손실을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식민지 확장으로 벌충하려 든다는 점이다.

“그것만이라면 우리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습니다. 석유에 눈이 멀어서, 우리 로마 해군의 경고에도 뻔뻔하게 아라비아와 교역을 하는 건, 그냥 로마와 전쟁을 하자는 거 아닙니까?”

아라비아도 로마의 경제 봉쇄에 저항해, 국제 경제에 참여하려 한다. 그러려면 매력적인 상품이 필요했는데,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대량의 석유 매장지들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진지하게, 아라비아의 모든 석유 생산 시설을 파괴할 계획도 세우고 있습니다. 로마 시민들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요. 언제 전쟁을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

“국민을 신경 쓰지 않고 소신대로 하는 정권이란 건…… 없는 건가?”

스스로 말해놓고도 참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싶다.

정치에서도 시장 논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정치는 국민의 표를 화폐로 하는 시장이다. 국민이 원하는 정책은, 말하자면 국민이 원하는 상품이다.

원하지 않는 정책? 인기 없는 상품이다. 안 팔린다. 그러면 정권도 잃는다. 국민은 얼마든지 소신대로 하는 정권을 짓뭉개고 입맛에 맞는 정권을 세울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민주주의가 문제라고. 개소리다. 차라리 브리튼이나 신성 제국의 민주주의가 소신대로 하기엔 더 적절하다. 브리튼이나 신성 제국, 아즈텍 연방 같은 ‘자유세계’ 국가들의 정권은, 국민의 뜻과 다소 어긋나도 그걸 견딜 방법이 있다.

바로 다른 정당들, 말하자면, ‘동료 정치인’들의 협력을 빌리는 방법이다.

그에 반해 이른바 독재정권, 특히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 같은 나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야 한다. 하다못해 강제로라도. 왜냐하면 그 나라 정치인들에는 ‘다른 정당의 동료들’이 없으니까. 지지가 무너지면 당의 붕괴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정치 역학을 제대로 공부한 건 아니지만, 여준설도 그 정도는 안다.

“문제는 지금 각 국가의 국내 정세든, 세계정세든, 자국민의 뜻을 거스를 정부나 정당은 없다는 거지.”

그래도 내일, 각국의 재무장관이나 중앙은행장들이 모인 회의가 열린다.

뭐라도 대책이 나오겠지.

***

여준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쿠아우테목의 한 노숙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빌딩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퍽, 쾅,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커다란 살덩어리들이 떨어졌다.

하늘에서 사람들이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노숙자는 그 광경에 울음을 터트렸다.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신세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세상이 불쌍해서 울었다.

그 울음에는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스며 있었다.

처참하게 터져버린 시체들은, 이제는 휴짓조각이 된 증권을 쥐고 있었다.

10월 29일, 쿠아우테목 주식시장 대붕괴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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