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코룸(10)
루우를 비롯한 4개국 군주들이 각자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을 때, 견하와 재연은 막 카라코룸 역에서 내리고 있었다.
앞서 내린 견하는 뒤따라 내려오는 재연의 모습을 봤다. 이번 여행 동안 재연은 깔끔한 정장 차림을 줄곧 유지했다. 그 모습이 미소년의 얼굴과 잘 어울려, 견하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수도 동명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친구끼리만의 여행.
아마 내전이 없었다면, 그래서 재연이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수학여행을 오고, 재연과 견하는 한 조가 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녔을까?
문득, 효윤도 루우도 지나도 수영도, 그냥 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구체적인 이미지가 되기 전에 곧 털어냈지만.
“아, 오셨습니까!”
몽골군 장교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경례한다. 견하는 미소지으며 경례를 받아줬다.
견하의 계급은 대령이지만, 아무래도 나이 때문에 격에 맞는 계급의 장교를 대할 땐 부담스럽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젊은 소위가 안내해줬으면 좋겠다고 특별히 부탁했는데, 공적 방문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여행을 온 덕분인지 몽골 측에서 그렇게 해 줬다. 중위였지만.
“고려말을 잘하시는군요.”
“아, 예. 진급할 때 도움이 되니까요.”
전통적 우방인 몽골과 고려는 간혹 합동군사훈련을 할 때도 있다. 그때 외국 연줄을 만들기 위해, 장교들은 상대국의 언어를 배워두기도 한다.
몽골어 공부를 좀 더 철저히 해야겠다고, 견하는 반성한다.
“여행 동안 머무실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견하는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연에게 손짓한 후, 두 사람은 장교를 따라 걸었다.
장교의 군복 덕에, 복잡한 역 안에서도 별달리 막히는 일은 없었다. 세 사람은 카라코룸 역 밖으로 나왔다.
“두 분 모두 상당히 미남이십니다.”
여자애들이 견하와 재연을 보며 시선을 멈추거나, 대담하게 미소까지 짓는 걸 보며 장교가 말했다. 견하는 대충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장교의 안내에 따라 차에 올랐다. 차는 카라코룸 시내 중심가의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낮은 건물 여러 동을 넓게 분산시킨 형태다.
“특이하게 생겼네요.”
견하가 그렇게 감상을 말하자, 장교가 설명했다.
“높이 제한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도시 외곽 쪽은 조금 덜하지만, 도시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엄격해지죠. 황궁이나 문화유산이 많은 도시니까요.”
견하는 이해했다. 이곳은 동명시와는 달리 유서 깊은 곳이다. 개발보다는 전통이 좀 더 중시될 수밖에 없다.
아마 평양이 잿더미가 되지 않았더라면,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겠지.
장교는 견하와 재연을 방까지 안내해주고, 연락처를 남기고 옆 방으로 들어갔다. 견하와 재연이 몽골에 체류하는 동안 그가 안내를 계속할 것이다.
이제 견하와 재연의 자유 시간이다.
물론 느긋하게 여행을 즐길 수는 없고, 카라코룸에 온 목적대로 도시를 견학해야 하지만.
“태사께 말씀드린 대로, 몽골계 주민의 이주 현황, 그리고 신도시 건설을 견학할 거야. 하지만 우리가 여기 온 가장 중요한 목적은……”
“카라코룸이, 장래 다이온 연방의 수도로서 적합한가 하는 것, 이지.”
견하의 말을 재연이 담담히 받았다. 그는 아직도 견하의 발상에 반신반의했다.
황제 루우에겐 견하의 생각을 보고하지 않았다. 재연도 카라코룸의 현황을 직접 보고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재연은, 칸발리크나 동명시가 바다에도 접해 있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해서 두 도시 중 하나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카라코룸은 너무 내륙에 있다. 철도를 연결해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대규모 인구가 생활하기엔 너무 춥지 않을까 싶다.
견하는 ‘민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만 생각하는 걸까?
두 소년은 잠시 쉬었다가, 거리로 나섰다. 몽골 중위에게는 사복 차림으로 나와달라고 했다. 계속 군복으로 돌아다니며 이목을 끌 수는 없으니까.
세 사람은 별달리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거리를 쏘다녔다. 그러다가 가끔 견하가 질문을 던진다.
10년이나 20년 전의 카라코룸은 어땠는지, 요즘은 어떤 식으로 새로운 단지가 건설되는지, 등.
중위도 전문가는 아니기에 아는 선에서만 대답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라는 걸 제외하면 지방의 중소도시 정도로 전락했다가, 세계대전 때 임시수도가 되면서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군수공업 위주로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했다 들었습니다.”
그런 사정은 고려의 상경과 유사하다. 상경도 세계대전 때 임시수도였고, 동북부 공업지대의 중심지가 되었으니까.
“그렇다면, 카라코룸 토박이는 많지 않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대부분 공장에 취업하려고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니까요.”
중위의 답을 들으며 견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역색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 ‘도시 노동자’ 계층이다.
견하는 경제적 조건에 따른 수도보다는, 리안의 정치기반이 될 수도를 원했다. 전통적인 유목 생활을 하는 이들이나, 농민, 지방 도시의 토박이가 아니라면, 좀 더 유연한 사고를 기대해볼 만하다.
여기에 규모를 좀 더 키워서, 고려 각지에서도 도시 노동자 계층을 유입시킬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에게서 지지를 받아낼 수 있다면?
강력한 지지층으로 뒤덮인, 리안의 도시가 탄생하지 않을까?
“아, 벌써 시간이. 두 분,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중위의 물음에 견하와 재연은 마주 봤다. 조금 출출하긴 했다.
“호텔에서 드시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시는 게 좋지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따로 안내하고 싶은 식당이 있습니다.”
***
양고기는 처음이었다.
화로 위에 올린 꼬챙이. 그 꼬챙이에 꽂은 양고기가 익어가는 걸 보며, 견하는 약간 긴장했다.
어쨌든 여기서 자신은 외국인이다. 외국인에게 자기네 요리를 대접한다는 건, 의도야 어쨌든 좋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떻게든’ 맛있게 먹을 필요가 있다.
꼬치를 들고, 걸린 고기 한 조각을 이로 끌어다 씹는다.
식감은 돼지고기와 소고기의 중간쯤에 놓인 듯하다. 기름은 적당하다.
향이 무척 독특했는데, 어떤 이에게는 누린내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향이었다. 싫어하는 사람은 역하다며 못 먹겠지.
하지만 계속 씹다 보니, 누린내와는 다르다. 양 기름만의 독특한 향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앞에 놓인 붉은 가루, ‘쿠민’이라는 것에 찍어서 다시 먹어 본다.
어떤 매콤한 국물을 졸여서, 그렇게 말라붙은 국물을 빻아 가루로 만들면 이런 맛이 날까? 조금 날카로운 향이 난다.
이국적이긴 했지만 꽤 먹을 만했기에, 견하는 계속 집어 먹었다. 옆을 보니 재연도 별다른 저항 없이 먹고 있다. 견하는 속으로 안도를 삼켰다.
미성년이기에 술은 거절했고, 대신 음료를 시켰다. 중위는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고려의 내전과 그 뒷수습, 몽골군과 고려군 등 4개국 군대의 합동작전에 대한 잡담이 오갔다.
중위는 고려 측 고위 인사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라 여겼는지, 견하의 말을 열심히 듣는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중에, 견하의 귀에 익숙한 단어가 들렸다.
고려어의 낱말이다.
금세 지나가 버려서 정확히 듣진 못했지만, 분명 고려어였다. 말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몽골인 몇몇이 앉은 다른 탁자에서 이야기가 나온 듯하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대화 자체는 몽골어로 하고 있는데, 간혹 고려어 어휘가 섞여 있다.
“중위님, 저쪽 탁자에서 하는 대화, 대충 통역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중위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다시 똑바로 앉았다. 귀를 기울이며 듣는 듯하다. 한참 그러다, 약간 난처한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
“아, 두 분께 전해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고려에 관한 안 좋은 이야기인가요?”
“그렇기도 합니다. 몽골에 관한 안 좋은 이야기이도 하고요.”
“괜찮으니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위는 목소리를 낮췄다.
“저 사람들, 고려 서북부에서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중위의 말에 따르면 저들이 하는 말은 이랬다.
어쨌든 고려 국적을 갖고 고려인으로 살아왔는데, 수백 년 전 조상 혈통을 따져서 몽골로 추방한다니 섭섭하다.
고려 내에서도 몽골 문화와 언어를 지키며 살아온 건 맞지만, 고려에서 직업을 갖거나 사업을 일구며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그 관계를 다 단절하고, 본 적도 없는 몽골 내륙 도시에서 살라니.
나야 그렇다 치고, 고려인으로 태어나 고려인으로 살아온 우리 자식들도 친구며 공부며 다 끊고 와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몽골 정부가 새로운 직업과 집을 제공해주고, 재산도 보상해준다고 하지만, 삶의 뿌리는 이미 뽑혔다. 그런 나무를 조심스럽게 다른 곳에 심는다고 해도, 새로운 토양에 적응하는 건 온전히 나무의 몫이다.
새로운 나라에서 새롭게 기반을 다지는 것도, 결국 이주민 개개인의 몫이 된다.
지나치게 큰 부담이었던 건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민족과 국가 간에 얽힌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전쟁까지 치달을 수 있는 문제니,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그러나 낮은 곳에서 직접 겪어보면, 민족과 국가 간 문제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급한 사람들에게 민족이나 국가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일종의 정신적 사치, 또는 위정자들의 기만에 불과하다.
견하는 재연의 얼굴을 살폈다. 묵묵히, 그저 양고기만 내려다보고, 먹는다.
-타협할 수 없는 선, 이라는 건가.
견하는 쓴웃음 지으며 중위에게 감사하다고 말한 뒤, 식사를 이어나갔다.
***
“들었나?”
고려에서 온 이주민들이 앉은 탁자. 그 탁자는 견하 일행이 앉은 탁자와, 지금 토칸 일행이 앉은 탁자 사이에 놓였다.
그러니까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주민들이 앉은 탁자를 중심으로 견하 일행과 토칸 일행이 앉은 자리가 대칭되는 모양을 그린다.
견하가 이주민들의 말을 들었듯, 토칸과 부하들도 들었다.
“카간의 정책에 불만이 많은 것 같군요.”
“어떤 처지에 있든, ‘카간에게 불만이 있다’는 공통점이 중요해. 우리는 그 공통점으로 사람들의 힘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
“지지기반을 늘려가자는 겁니까?”
부하의 질문에 토칸은 씩 웃었다.
“맞는 말이야. 카라코룸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주된 지지기반이 되겠지. 하지만 상층부의 생각은 그보다 더 앞서 나가고 있어.”
부하들이 상체를 바싹 기울였다.
“상층부는 카라코룸을 ‘혁명’의 도시로 만들 생각이다.”
혁명.
그 말에 부하들의 눈이 커진다. 그런 말은 사회주의 혁명이나 공산주의 혁명에서만 들어봤는데.
“‘알타이 민족’도 혁명을 할 수 있어. 공산당에서만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혁명을 하려면 돈이나 무기도 많이 필요합니다. 카라코룸 시민들의 전폭 지지를 받는다 해도, 무기 없는 시민들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맞아. 그래서 상층부에서는 그쪽으로도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가는 모양이야.”
“저번에는 정치권에서 우리의 지지세력을 확보해 나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 방향으로만 뚫으려고 하면 막히는 거야. 카간의 수하들이 우릴 막지 못하게 하려면,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타격할 필요가 있어.”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언제가 ‘혁명’의 결행일이겠습니까?”
“글쎄.”
토칸은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친다.
“아마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