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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97화 (97/541)

카라코룸(9)

“고려에도 있고, 몽골에도 있다면, 다른 어딘가에 또 있을 수 있어.”

루우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효윤 역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파멸인, 파멸인류……. 루우, 나는 일단 견하와 태사께 이 문제를 알릴게. 여기 나와 있는 우리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일은 아니니까.”

“그 두 사람 외에는 알지 못하게 해야 해. 보안에 특히 신경 써 줘.”

효윤은 알겠다고 끄덕이다,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외무장관한테도?”

“안세규가 지닌 정보는 ‘하얀 괴물’ 수준에 머물러야 해. 지금 안세규가 이걸 알면 독자적으로 파멸인류 연구에 달려들 수 있어.”

잘은 모르겠지만, 루우는 이 문제에 안세규의 영향력이 개입하는 걸 꺼리는 듯하다.

효윤은 루우가 머무는 방을 나서기 전에, 보고에 보충할 내용 하나를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봤던…… 그 ‘하얀 괴물’과, 나랑 태사가 안동에서 본 ‘파멸인류’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거야?”

루우는 효윤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을 지었다. 살짝 당황하며, 이 정보를 효윤에게 공유해야 하는가, 망설이는 표정.

물론 망설임은 짧았다. 루우는 이런 일로 시간을 끄는 성격이 아니다.

“내가 고려에 오기 전까지 알고 있던 지식만으로 설명하는 거라 정확하진 않을 거야.”

그래도 듣겠어? 라고 루우는 물었다. 효윤은 그래, 라고 답했다.

“이번에 발견된 ‘파멸인’과 ‘하얀 괴물’은 외형부터 차이가 나지. 그 특유의 하얀 표피는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냥 ‘하얀 괴물’에는 없는 게 있어. 얼굴이나 사지 같은 것들.”

“그건 나도 알아. 직접 봤으니까.”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파멸인’은 ‘하얀 괴물’의 보다 완전한 형태, 가 아닌가 해.”

“‘완전한 형태?’”

어떻게 그렇게 추측하는 걸까, 하다 효윤은 납득했다. 어쨌든 뭐라도 하나 더 달린 괴물이, 덜 달린 괴물보다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다.

“그리고 둘의 차이는, 어떻게 ‘탄생’했느냐 하는 차이로부터 비롯된다고 봐.”

“……분명 목격 사례로는, ‘파멸인’은 그 징그러운 ‘구체’에서 튀어나온다고 하던데.”

그 말은, 밋밋한 표면의 ‘하얀 괴물’은, 다른 방식으로 태어난다는 말인가.

“‘하얀 괴물’은 어떻게 나오는 거지?”

효윤의 물음에, 루우는 또 한 번 망설이다 답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능력을 갖춘 ‘이단’들이 있어. 그중에는, 선천적으로 살아 있는 ‘하얀 괴물’을 소환하는 이단들도 있고.

몽골 정부는 그런 능력을 지닌 이단을 따로 모아서 ‘하얀 괴물’을 추출하는 실험을 했어. 그리고 그 ‘하얀 괴물’을 일반인과 접촉하게 했고.”

“그런 이단이 있다면……!”

왜 알려지지 않았느냐, 라고 물으려다, 효윤은 입을 다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을 감쌌다.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니까.

있다. 효윤의 주변에도, 한 명.

주견하.

비록 크기는 작지만, ‘하얀 괴물’을 소환해낸다.

“물론 우리 같은 다른 이단들도 ‘하얀 괴물’과 아예 관련이 없는 건 아니야. 우리가 소환하는 무기들, 무생물이지만 그 재질은 하얀 괴물과 거의 같으니까.”

말하자면, 우리의 무기는 하얀 괴물의 시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견하는 특이해. 첫째로, 하얀 괴물을 소환하는 능력은 선천적인 거야. 하지만 견하는 후천적으로 그 능력을 얻었어. 비록 소형 개체의 소환이긴 하지만.”

루우는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일단 누군가 하얀 괴물을 소환하면, 이것을 일반인과 접촉하게 한다. 그러면 그 일반인은, 주견하나 다른 인위적으로 양성된 이단이 그러하듯, 이단으로 거듭난다.

“정확히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얀 괴물과 접촉한 일반인은, 자신의 ‘이’와 ‘기’의 구성과 작동을 자각하는 모양이야. 그렇게 뇌의 어떤 부분을 깨운다고나 할까.”

문제는 이미 ‘이단’인 사람이 다시 한번 하얀 괴물과 접촉할 경우, 이렇게 자각된 ‘이’나 ‘기’의 체계가 흐트러진다. 그 결과 이단은 신체가 붕괴해 사망한다.

“하지만 견하는 자신이 소환한 하얀 괴물을, 적의 ‘이’를 교란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물리적인 타격을 주는 용도로 쓸 수 있어. 이게 두 번째로 특이한 점이지.”

‘파멸인’의 공격 방법도 지극히 물리적이다. 인간의 ‘이’, 즉 존재하는 원리 자체를 뒤흔들어서 붕괴시키는 공격법은 쓰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는 ‘하얀 괴물’과 ‘파멸인’을 구분하는 또 다른 차이다.

견하는 그 차이를 자기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는 이단이고.

“세 번째 특이한 점은, 견하는 하얀 괴물을 우리처럼 ‘무생물화’할 수 있다는 거야. 검이나 뭐 그런 거로. 그 반대도 가능해. 검에서 갑자기 하얀 괴물의 촉수가 뿜어져 나온다든가.”

덕분에 견하는 전투 중 변화무쌍한 공격을 할 수 있지만, 그게 견하에게 좋기만 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견하를 관찰하면서 알게 된 건 이 세 가지야. 아직 해명되지 않은 건…….”

견하가 ‘기갑사’를 흡수해 자신의 무기와 결합한 것 같다는 점.

그리고 하얀 괴물을 대하는 견하의 정신상태.

“견하는 자신이 소환한 하얀 괴물을 정말 아끼지.”

효윤은 처음 이단이 되고, 의식을 회복한 견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 첫 소환 때, 정말 아끼는 눈빛으로 그 괴물을 보고 있었어.”

“나는 그 애가 자신의 하얀 괴물을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들었어.”

“‘아이들’……?”

“지적해봤지만 그 애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도 못해.”

효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내용은…… 견하의 귀에도 들어가면 안 되는 걸까. 태사 미리안만 알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견하에게도 알리고, 함께 대응책을 찾아야 할까?

“그리고 말이지…… 견하의 지능, 그거 고등학교 2학년이라기엔 지나치게 높다고 생각하지 않아?”

태어나서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루우나, 리안과는 사정이 다르다. 견하가 지금 집중하는 공부와 경험은 고작해야 올해, 몇 개월 치뿐이다. 그전에 받은 고등학교 교육에서는 절대 지금 같은 지식과 판단력을 내놓을 수 없다.

루우의 눈빛이, 더욱 진지해졌다.

“그러니까 안세규에겐 알려선 안 돼. 안세규가 알게 된다면, 견하를 그대로 둘까?”

효윤은 안세규에 대해 잘 알진 못했지만, 확언할 수 있었다.

안세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견하를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려 들 것이다.

막아야 한다.

“알겠어. 보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히 해야겠네.”

두 소녀는 마주 끄덕였다. 효윤은 일어났다.

리안에게 보고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보고할 내용을 정리했다. 당장 보고할 것, 본국으로 돌아가서 보고할 것, 지금은 감출 것을 분류한다.

그러다, 우뚝 멈춰 섰다.

루우가 그럴싸하게 말을 돌렸지만, 한 가지 설명되지 않는 게 있다.

효윤은 돌아서서 루우를 똑바로 봤다.

루우는 이미 효윤을 보고 있다.

“아까, ‘우리’는 무생물 무기밖에 소환하지 못한다고 했었지?”

“……그래.”

“그럼 네 ‘용’은 뭐야?”

루우의 눈썹이, 뭐라 말하기 힘든 모양새로 꿈틀거렸다.

***

루우가 게레센제와 비밀 단독 회담을 하고, 효윤의 추궁을 받는 사이, 키타이의 울제이 칸도 칸발리크에 도착했다.

우람한 체격을 자랑하는 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큰형 시레문과의 단독 회담이었다.

“게레센제 형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막냇동생의 눈빛을 보고 이미 의도를 읽은 것인지, 시레문은 곧장 문제의 핵심을 찔렀다.

“게레센제에게 신수덕 문제를 추궁할 수 있다고 보느냐.”

“아무리 형제라지만, 그리고 낭키아스의 칸이라지만, 형님의 아우이며 가문의 전통대로라면 신하입니다. 추궁은 해야 합니다.”

“형제끼리 지나치게 의가 상하고 싶진 않다. 내가 왜 중세도 아닌데 너와 게레센제에게 분봉을 했는지 알지 않느냐.”

울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형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태평천국의 영토를 분봉한 건, 동생들에 대한 애정이기도 하고, 한족에 대한 확고한 통제를 위함이기도 했으며, 형제간 우애를 바탕으로 한 평화를 원해서, 이기도 하다.

“형님, 그럼 다른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키타이도 낭키아스도 하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저와 게레센제 형은 두 나라의 국가원수들입니다. 저는 키타이 국민이 흘린 피에 대해 낭키아스의 칸에게 물어야 합니다.”

시레문은 눈을 감았다. 이런 점에서는 울제이는 게레센제와 참 많이 닮았다. 아마 게레센제도, 낭키아스를 위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덮고 넘어가면 안 되겠느냐.”

울제이의 이번 침묵은 좀 더 길었다.

“결코 안된다고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형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나도 몽골이라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답하고 싶구나. 그리고 키타이와 낭키아스, 고려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울제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무골(武骨)인 덩치에선 연상하기 어렵지만, 그도 정치가다.

“어떤 관련성이 있습니까?”

“아즈텍 측이 고려에 관세의 인하 등을 통해 차관을 갚을 것을 요구해왔다. 경제 규모가 세계 제일이라는 그 나라가 말이지.”

아즈텍의 사정이 평소와 같았다면, 고려에 그런 ‘조급한’ 요구를 해 올 일은 거의 없다. 시간을 들여 차분하게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즈텍이 그렇게 나온다는 건.

“그쪽도 시간이 없다는 뜻이지.”

게다가 고려령 극북 인근 해협에서의 해군 훈련. 어찌 보면 무력시위라고도 할 수 있을, 큰 결례다.

“아즈텍은 거대한 나라지만, 거대한 만큼 많은 문제를 안은 나라다.”

유럽 세력의 식민지와 대결하면서 원주민들끼리 뭉쳐서 만들어진 나라. 하지만 애초에 원주민끼리도 그 성질이 다르다. 문화, 제도, 사회, 사고방식. 그걸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어 어찌어찌 이어 왔을 뿐이다.

“거기에 유럽 세력의 식민지를 정복하면서 흡수한, 유럽인들도 아즈텍의 구성원이 됐지.”

“형님은, 아즈텍의 민족문제가 심각하다 보십니까?”

“평소라면 아즈텍은 자신들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 아즈텍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연방제도가 얼마나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재난이 닥쳐와도 정상적으로 작동할까?”

울제이는 시선을 내리고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형님, 혹시 그 아즈텍 해군의 무력시위도, 실은 고려를 향한 게 아니라 아즈텍 내부를 향한 거라 생각하십니까?”

“다민족으로 구성된 군대에는 그 민족 구성만큼의 문제가 있겠지.”

“그 민족문제…… 심하면 어디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상상하긴 어렵습니다만, 아즈텍이 경제 문제를 조급하게 고려에 떠넘기려 한다면, 분명…….”

“상당한 수준의 경제 불황을 예상하고 있는 거겠지.”

“경제 ‘붕괴’라고 부를만한 수준이겠습니까?”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제 ‘호황’을 어디까지 예상할 수 있었느냐?”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파멸의 밑바닥도 예상할 수 없겠지.”

울제이는 입술을 핥았다. 그도 다음 말을 꺼내는 데에는 많은 망설임이 필요했다.

“아즈텍이 민족 간 내전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이웃 나라 고려도 얼마 전까지 내전 상태였다. 아즈텍이라고 다를까?”

시레문은 간곡히 부탁한다는 어조로, 막냇동생을 향해 말했다.

“세계 경제 1위의 대국이 경제 붕괴를 일으키고, 내전까지 치닫는 건, 모든 요소가 불안정해진다는 뜻이다. 세계는 바로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될 거야.

우리는 최대한 그 불안정 요인을 억제해야 해. 그러니 신수덕 문제는 잠시라도 접어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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