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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96화 (96/541)

카라코룸(8)

“2년만…… 인가?”

차창 밖 풍경을 보며, 루우는 중얼거렸다. 몽골 제국의 수도 칸발리크의 시가지 윤곽이 멀리서 다가온다.

루우의 중얼거림을 들은 효윤은, 무심히 물었다.

“고향에 돌아오니까 기분이 좀 이상해?”

루우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애착이 가는 도시도 아니고.”

이를 악물고 떠났던 도시기도 하다.

몽골 황위 계승권에서 숙부들에게 밀리자 아버지에게 항의하고, 다투고, 분노한 끝에 떠난 도시.

-그렇게 생각하니 마치 가출했다가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잖아.

루우는 그런 생각은 속으로 삼켰다. 효윤에게 보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열차가 서서히 역을 향해 다가간다. 장교 하나가 와서 준비를 요청한다.

“폐하, 이제 칸발리크역에 도착합니다.”

“알겠다. 준비하지.”

곧 내려야 한다. 다시 창밖을 보자, 과연 칸발리크역의 웅장한 모습이 보였다.

발해만에서 칸발리크까지 이어진 운하. 그 옆에 세워진 철도역.

중세의 산물과 근대의 산물이 나란히 자리한 모습이, 재미있는 대비를 이룬다.

똑같은 모습을 본 효윤이 묻는다.

“강…… 인가?”

키득, 루우는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효윤의 소녀다운 호기심에 무심코 나온 웃음이었다.

“강이라고 할 수도 있지. 인공적으로 만든 강이지만.”

“운하구나.”

“제국을 세운 몽골인들, 그중에서도 쿠빌라이 카간은 ‘물 위의 길’이라는 개념이 참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그 ‘물 위의 길’로 거둘 이익까지.”

루우의 말대로, 몽골은 새로운 수도 칸발리크와 기존의 대운하를 연결했다. 운하의 끝이 황궁 안까지 닿도록.

말하자면, 카간 자신이 가장 중시하는 가치가 물자의 유통이라 선언한 셈이다.

그렇게 해서, 몽골, 다이온은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경제를 초원과 실크로드로 엮으면서, 수도 칸발리크를 그 중심 도시로 만들 수 있었다.

중세 세계 경제의 중심지 중 하나를 방문하면서, 이제 또다시 경제 문제를 논의하려 한다.

“슬슬 일어나자. 황제의 위엄은 황제 자신뿐만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에게서도 비롯되지. 잘할 수 있겠어, 중장?”

루우의 물음에 효윤은 씩 웃었다.

“황제가 돼서 고향에 돌아왔다고 긴장하지나 마. 나는 높으신 분 수행에는 베테랑이니까.”

***

루우가 몽골 황실의 일원이 아니라, 외국 군주로서의 대우를 강력히 원했기 때문에, 시레문 카간도 그에 맞춘 의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에도 시레문 카간의 공주인 루우 테무르라는 이름과 함께, 고려 황제 왕서라로 정확히 서술돼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렇게 카간 급의 화려한 의전을 받으며, 루우는 아버지 시레문과 악수했다.

“오랜만입니다, 황제.”

아버지는 딸을 애정 어린 미소로 맞이했다. 딸이 직접 산동 전선에도 나갔던 이야기를 하며, 걱정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루우의 형식적인 미소 앞에 막혀버렸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카간.”

시레문은 한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일단 황궁으로 가도록 하자.

두 사람은 동명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함께 차에 올랐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자마자, 루우는 딱딱한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경제 문제라면 재무장관이나 양국의 중앙은행장끼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요? 외교 문제라면 외무장관끼리 해결할 문제고요. 정 급하다면 양국 태사끼리도 할 수 있고.”

리안도 황제가 가야 한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그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건 몽골 측에서 먼저 국가원수 간 회담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시레문이 고려에 왔으니 이번에는 루우가 가는 게 맞다, 라는 논리는 그럴싸하지만 구실에 불과하다. 군주끼리 이야기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부른 것이다.

“일단은, 우리도 고려와 아즈텍 사이의 협상에 대해 듣고 있단다. 아즈텍 연방의 경제 규모를 생각해보면,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그건 루우가 방금 말했듯, 재무장관이나 중앙은행장끼리 먼저 논의할 문제였다.

“또 고려의 서북부나, 산동 상황의 최종 정리도 합의를 해야 하고.”

이 역시도 담당자들끼리 논할 문제다.

루우는 시레문의 말을 잘랐다.

“부수적인 문제들을 나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국가원수니만큼 빙 돌려서 하는 말에 시간 낭비할 수 없으니까요.”

시레문은 이제 한숨을 삼키지 않았다.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마. 안동에서, ‘그걸’ 발견했다지?”

루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거’라뇨?”

“빙 돌려서 하는 이야기가 싫다더니 왜 시치미를 떼는 거냐. 급한 문제다. 속이고 감추고 할 문제가 아니야. 「쿠빌라이 문서」, 수집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니?”

루우의 계산은 빨랐다. 시레문의 말대로다. 감출 일은 아니었다. 협력하고 아니고 와는 별개의 문제다.

“네.”

시레문은 한참 말이 없었다. 차는 어느새 황궁 구역으로 접어들었다.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하자.”

***

“네 성격상 「쿠빌라이 문서」에 대해 관여하지 말라고 하면, 어차피 듣지 않을 테지. 그러니 나는 국가원수 대 국가원수로서 정식으로 요청하고 싶다. 정보를 우리와 공유하자.”

한집에 같이 사는 사춘기 딸이었다면, 엄하게 가르치기라도 했겠지. 하지만 그 딸은 집을 나가 이웃 강국의 황제가 돼 버렸다.

부녀간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딸은, 보통 사춘기 소녀들보다 훨씬 머리가 좋다.

그래서 싫다고 하기보다는, 아버지의 의도를 재려 한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위험하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그 위험부담은 한 나라가 아니라 두 나라가 짊어지는 게 낫고.”

“…….”

말이 없다. 계산 중인 걸까. 아니면 「쿠빌라이 문서」에 얽힌 문제가 ‘위험하다’라는 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걸까.

“정보를 공유하면 우리가 받을 이익은?”

그 점에 대해서는 시레문도 대비하고 있었다.

서류 뭉치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루우 쪽으로 밀었다. 루우는 그 서류들을 받아 한 장 한 장, 넘긴다.

표정이 무섭게 굳는다.

“카라코룸 근처, 연대 불명의 사원에서 발견한 물체다. 생긴 것도 거부감을 일으키지만, 가장 큰 문제는…… ‘파멸인’을 토해내지. 루우 테무르 너는 아직 ‘하얀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을 테지만…….”

말을 하다 멈추고, 시레문은 루우의 반응을 다시 살폈다. 괴물체의 충격적인 모습에 굳었다기엔 너무 오래 서류를 보고 있다.

마치, 이게 왜 여기에, 라는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그런 반응은, 이미 저런 물체에 대해 알고 있을 때나 나올 수 있다.

“……설마, 파멸인류, 고려에서도 발견된 거냐.”

끄덕인다. 시레문의 머리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래, 고려도 성리학이 발전한 나라니, 나름 연구한 학자들이 있었겠지. 우리도 다이온 시절 한족 성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그 이름을 알게 됐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하나 이상일 줄이야.”

부녀는 말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서류에 인쇄된 기괴한 형상을 바라봤다.

“루우 테무르, 아니, 고려의 황제 폐하. 이건 국가의 존망뿐만 아니라 인류의 멸망까지도 초래할 수 있는 문제요. 정식으로 협력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

인류 단위의 초자연적 문제도 문제지만, 그보다 작은 단위, 즉 국가 간의 문제라고 해서 덜 중요한 건 아니다.

모든 문제는 산발적으로 터지고, 동시에 해결 절차를 밟고, 순서 없이 마무리된다.

산동 분할은 끝났지만, 원흉인 신수덕을 잡지 못했다.

“수천 명의 허동주 추종자를 총살하고 수십 명의 산동총독부 책임자를 처형한다 해도! 신수덕 하나를 매다느니만 못해!”

연합군 사령부의 누군가가 그렇게 노성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외교관들 사이에 나돈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한 누군가가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그 이야기는 고려를 비롯한 4국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전하고 있었으니까.

다들 논리적으로 생각할 머리는 있었기에, 신수덕을 탈출시킨 주범 역시 낭키아스의 게레센제 칸으로 좁혀지는 상황이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중이지만, 그냥 내버려 두기만 해서는 장기적으로 손해겠지.

게레센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응천을 떠나 칸발리크로 향했다.

고려와 몽골 간 정상회담에 낭키아스도 참여해 달라는 요청에 응한 것이다.

게레센제도 국가원수긴 했지만 의전은 몽골 황실 구성원에 준한다. 그는 루우보다 계승권에 가까이 있는 데다, 낭키아스는 신생국과 몽골의 점령지 사이에 애매한 지위를 유지하는 나라니까.

고려 황제와 몽골 카간의 환영을 받고, 만찬에 참여했다. 여기까진 게레센제도 예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슬슬, 신수덕 문제에 대한 추궁이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을 때.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루우가 게레센제에게 비밀 단독 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거절할 구실이 마땅치 않았기에, 게레센제는 일단 응했다.

“숙부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우리 고려는, 몽골에 ‘관세동맹’을 제안할 거예요. 아니, 몽골뿐만 아니라 키타이와 낭키아스를 포함하는 거대한 경제공동체를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게레센제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관세동맹’이라. 일단은 형님부터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 듣기로 고려는 아즈텍에 대해서도 관세 인하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네.”

“관세동맹은 가맹국끼리의 관세를 철폐함과 동시에, 그 외의 국가에 대해서는 같은 관세를 매기는 걸 알고 있나?”

“그것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고려가 아즈텍과 협의해서 내린 관세는, 고려와 관세동맹을 맺는 모든 나라도 따라야 해. 그런데 몽골도, 키타이도, 낭키아스도, 각기 사정이 달라. 무작정 아즈텍과의 관세를 인하해버리면 경제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을지 내다보기 어려워.”

게레센제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아즈텍으로부터의 경제적 압박, 고려 혼자 짊어지기 싫으니까 관세동맹이니 뭐니 해서 나누려는 것 아닌가?”

루우는 다리를 꼬았다. 새삼, 그 어린 조카가 이제 서서히 여자로 성장해간다는 걸 실감한다.

그것도 굉장히 영리하고, 무서운 여자.

“신수덕. 숙부님을 아무리 추궁한다 해도 못 잡겠죠.”

“…….”

여기까지 와서 시치미를 떼봤자 아무 소용 없다. 거래 내용만 모를 뿐, 신수덕과 게레센제 사이에 거래가 있었음은,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테니까.

게레센제는 침묵으로 대응했다.

“낭키아스를 제외한 3국이 전쟁을 선포해도 못 잡을 거예요. 이제 신수덕은 모두의 능력 밖의 일이 됐으니까.”

입술을 움직여, ‘웃는’ 모양을 만든다. ‘미소라는 표정을 연출’하기 위한 입술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 행위.

“저는 신수덕 문제를 덮자고, 아버지와 울제이 숙부에게 제안할게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보르지긴 가문의 사람들끼리 싸울 순 없죠. 대신, 게레센제 숙부님은 관세동맹을 강력하게 지지해 주셨으면 해요.”

소녀는, 상체를 슥 기울였다. 그것은 제안과 동시에 협박을 의미하는 동작이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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