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코룸(6)
견하는 재무장관 여준설과 아즈텍 측의 협상 자리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리안에게 보고했다.
수도로 돌아온 리안은 오랜만에 루우를 만나 함께 견하의 보고를 들었다.
“곡물 생산 증가량이 통제가 안 되는 바람에, 가격폭락도 막질 못한단 말이지…….”
“곡물뿐만 아니라, 그 외의 상품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에요. 여준설 장관은 이 문제를 세계 각국이 분담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고려의 부담을 줄여보려 하고요.”
이번에는 효윤이 물었다.
“그, 아즈텍 해군이 우리 쪽 영해 인근에서 훈련한 이야기는 안 나왔어?”
“안세규 장관도 참관하긴 했는데, 이번에는 말을 아끼더라고. 재무장관의 무대니까 끼어드는 것도 실례라고 생각했겠지만…….”
리안은 견하의 말을 이어받았다.
“굳이 그 문제를 언급해서 서로 감정 상하는 것보다는, 경제적 타협으로 풀어나가면서 덮는 게 낫다고 생각했겠지.”
견하는 끄덕였다. 이제 9월 말. 삼한반도 남부도 평정되면서 내전은 끝났지만, 내전의 손실을 복구하는 일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게다가 루우의 말에 따르면, 내전 중 낭키아스의 배신행위가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다른 나라와 외교적인 갈등을 또 벌일 수는 없었다.
벌이더라도, 일단 낭키아스 문제는 해결한 이후여야 한다.
“좋아. 견하는 계속 재무장관 협상에 참관하면서 보고를 해 줘. 배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많이 배워 두고. 물론 나도 나중에 재무장관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효윤이 조심스레 리안의 다음 일정을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외무장관과 이야기를 해봐야지. 아즈텍의 외교 정책뿐만 아니라,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파악된 게 있는지. 아, 전쟁장관도 같이 이야기를 해봐야겠네. 아즈텍 내의 민족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꺼냈으니까 말이야.”
침묵이 찾아왔다.
응접실의 주인인 루우는 계속 말이 없었다. 리안, 견하, 효윤은 이제 루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황제 역시, 그간 있었던 일을 정리해서 이야기할 차례였다.
“지금 아즈텍과의 무역 문제 말인데,”
루우가 그 부분에 관해 이야기할 줄은 몰랐기에, 리안은 조금 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그동안 짜 둔 몇 가지 계획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루우는 자신이 황제임을 강조해야 하는 상황일 때나, 여기 세 사람 외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짐’을 칭했다.
하지만 이렇게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 자리에서는 ‘나’라는 일인칭을 썼다.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을 말하는 건가?”
견하의 물음에 루우는 끄덕였다. 견하는 오늘 이렇게 모이기 전, 유지나와 한재연에게서 대략적인 계획안을 들어뒀다. 물론 리안과 효윤도 견하에게서 요약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게 지금 경제 문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듣고 싶은데.”
리안의 말에 루우는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려가 져야 할 부담을 몽골과 나눠서 질 수 있다면, 혹은 더 나아가 키타이나 낭키와스와도 나눠서 질 수 있다면, 아즈텍의 요구도 어느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안세규와 달리 내가 네 야심을 지지하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 당장 그렇게 되긴 곤란하지 않을까?”
몽골과 고려의 동군연합이라는 게 실현된다고 해도, 가까운 시일 내에 가능하리라 보긴 어렵다. 루우도 리안도 중년에 접어들었을 때나 이뤄질 것이다.
루우는 그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른 일을 생각해 봤어. 언젠가 몽골 황위를 노리는 데 도움이 되면서, 동시에 지금의 경제 문제에도 대처할 하나의 방안.”
효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조금 이상한데. 하나의 방안으로 두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거야?”
“엄밀히 말하면, 완전한 해결에 이를 수는 없겠지. 내가 생각한 건 ‘완화’ 정도.”
“자세히 이야기해봐.”
이번에는 그렇게 말하는 견하 쪽으로, 루우는 고개를 돌렸다.
“‘관세동맹’을 제안하는 거야.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에.”
리안의 눈이, 매섭게 가늘어졌다.
“몽골, 고려, 키타이, 낭키아스, 4국이 일종의 경제블록을 형성하자는 건가.”
경제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만, 관세동맹이 아주 잘 작동한다고 가정했을 때, 어쨌든 그 규모만큼은 아즈텍이나 다른 강대국과의 무역에서 본 손실을 감당할 정도는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잘 작동한다고 가정했을 때.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의 관점에서 보면, 연방을 이룰 나라들끼리 ‘물질적 토대’를 공유하게 하자는 건가.”
견하의 중얼거림에 루우는 끄덕였다.
“정신적 토대를 만들어서 그걸 꾸준히 선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질적인 토대’가 이를 뒷받침한다면 더 효과적이겠지.”
이질적인 집단들이 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면, 여기에 연대 의식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이 경우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에서 진행될 ‘알타이 민족’이라는 개념을 들 수 있겠지.
사람들은 ‘알타이 민족’을 감정적 동질감이나, 학문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당장 피부에 와 닿는 경제적 이익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 도움이 된다면, 부를 안겨준다면, 그것만큼 환영받는 개념도 없다.
‘관세동맹’을 통해, 물질적 토대를 공유하는 한편으로, 꾸준히 ‘알타이 민족’이라는 환상을 선전하며 정신적 토대를 다져간다.
궁극적 목표는 몽골과 고려의 동군연합. 괜찮은 계획이다. 장대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역시, 어디까지나 ‘잘 된다’고 가정했을 때의 일이다.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일까.”
리안이 말하는 ‘사람들’은 고려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의 몽골인들, 그리고 한족들까지 포함한 이야기다.
리안은 경제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워들은 건 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관세를 없앴으니 경제가 활기를 되찾고 모든 것이 잘 풀린다’는 건 환상에 불과했다. 경제는 좋아질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렇게 효과가 나타나기 전까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대다수 사람에게 ‘관세’란, 경제적 성벽이야.”
이른바 보호무역이라는 개념. 수입된 상품에 관세를 매겨 가격을 올리면, 그와 경쟁하는 국내 상품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 반대로 수출하는 나라는 수입국의 관세를 낮춰 자국 생산품의 경쟁력을 높이려 한다.
이런 관점에서 국제 무역은, 관세를 둘러싼 공성전이기도 하다.
“‘관세동맹’이라는 거, 누군가에겐 나라 팔아먹는 짓으로 보일 수도 있어.”
최악의 경우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몽골도, 고려도, 키타이도, 낭키아스도, 구축한 경제 시스템이 다르고, 규모도 다르다. 하루아침에 관세를 없애고 경제권을 통합시켜나가자고 하면, 크든 작든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이는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각국의 국민이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반발이 예상된다면, 각국의 정치가들은 이를 꺼릴 수밖에 없다.
리안의 말에 루우도 한발 물러섰다.
“뭐, 나도 하나의 아이디어를 꺼내 본 거야. 당장 이걸 밀어붙일 생각은 없어. 그보다는, 태사가 이걸 각료들하고 논의해줬으면 하는데.”
리안은 효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효윤에게 뭔가를 묻기보다는, 루우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으려는 움직임에 가까웠다. 효윤도 리안의 시선을 그저 덤덤히 받았다.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아이디어는 아니니까, 일단 논의는 해볼게. 하지만 각료들도 동의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야. 관련 입법을 하려면 제국최고회의까지 가봐야 하니까.”
우리는 일단 가볼게, 라 말하며, 리안과 효윤은 일어섰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견하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
루우나 리안, 효윤과는 조금 다른 생각이, 견하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몽골 황위를 향한 루우의 움직임, 너무 급한 건 아닌가.
그녀의 동기를 생각해보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움직임은 아니다.
국내에서 서서히 지지기반을 쌓고 다른 정치 세력들과 타협하며 권력을 쥐기보다는, 외부적인 요소로 단숨에 권력을 키우려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 주도 하의 동군연합이 성공한다면, 고려 내 루우의 인기는 어마어마하게 올라갈 테니.
안세규가 부탁했던, ‘루우에 대한 견제’를 떠올려 본다.
안세규와의 거래만 문제인 건 아니다. 루우의 권력을 견제하는 건, 리안의 권력을 지키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물론 루우의 계획을 리안에게 이익이 되도록 활용할 방안은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루우 위주로 흘러가기 전에, 이쪽도 고삐를 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무슨 수를 써야 할까.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에 대한 다소 간의 방해? 아니면 계획에서 소년감찰국이나 리안의 비중 늘리기?
막상 고삐를 쥐려 해도 도대체 어떤 고삐를, 어떻게 쥐어야 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견하는 볼을 긁적이다, 이 계획을 작성한 그의 친구, 한재연과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했다.
어쩌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좀 들어볼까.”
친구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완전히 상사가 부하에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재연은 감당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내전 초에 갈라섰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게다가 견하에게 별다른 보고 없이, 루우의 계획에 무작정 가담한 것도 재연의 독단이었다.
휴가에서 돌아오고 나서 재연의 보고를 듣긴 했지만, 일단 견하는 루우와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소년감찰국 조직 내 절차상 문제는 그보다는 덜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루우와의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온 견하는 재연을 호출했다.
“황제의 명령이었어, 견하야.”
재연이 할 말은 이 정도였다. 입헌군주국이라지만 황제의 명령은 어쨌든, 절대적 권위가 있다. 루우가 완전히 몰락해서 정신질환자라는 누명이라도 쓰지 않는 한, 그 말을 무시할 방법은 없다.
견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지나를 통해서 루우가 나에게 협력을 구한 데다, 일단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 자체는 루우의 손에 들어갔으니, 다시 물릴 수는 없겠지. 간단히 말하자면, 결국은 ‘덮고 넘어갈’일이야.”
견하의 말에 재연은 숨을 삼켰다. 하지만 안도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러나 네 의도를 파악하는 일은 넘어갈 수 없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황제의 말에 응했지?”
“짐작은 하고 있지 않아?”
재연이 곧바로 되묻자 견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짐작되긴 한다.
“비록 허동주는 패배했지만, 그 사상만큼은 제3제국 체제에서 실현해보고 싶다, 는 거겠지. 그래서 나에게 왔고.”
“맞아.”
“황제가 제시한 거래는 좋은 기회였겠지.”
재연은 여기서, 굳이 자신의 괴로움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사상이, 신념이, 누군가의 도구로 쓰이는 괴로움은…….
“그것도, 맞는 이야기야.”
견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책상에 앉아 재연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재연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그 추궁이 마치 위에서 떨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네 의도는 알겠어. 그럼 이제 그 의도가 「계획」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설명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