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코룸(5)
재무장관 여준설은 땀이 촉촉하게 배어 나오는 이마를 훔치려다, 얕보일 것 같아 멈췄다.
그는 경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어떤 상대라도 아닌 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는 건, 상대도 같은 종류의 인간일 경우다.
“아즈텍 연방의 요청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세계대전 당시의 차관을 상환받고자 합니다.”
아즈텍 대사와 함께 들어온, 저쪽의 경제 교섭 담당자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차관. 빌린 돈.
선대 태사 미승휴가 상경을 중심으로 동북지역을 급속히 공업화한 건, 일단 고려인들의 초인적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을 들여야 할 공장의 ‘기계’나 ‘원천 기술’은 어디서 사들여 온 걸까?
그리고 본격적으로 국산 무기를 생산하기 전, 당장 군대에 보급할 무기들은 무슨 돈으로 샀을까?
“아즈텍 정도의 경제 대국이 급하게 차관을 돌려받아야 하진 않을 거라 봅니다만, 가능하다면 고려도 경제에 부담되지 않는 형태로 상환하고 싶습니다.”
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 하는 시점이었고, 또 전쟁 후에도 국토를 급히 재건하느라 정신없이 빌려댔다.
여준설은 솔직히 이 문제가 자기 임기 동안에는 어떻게든 유야무야 넘어가길 바랐지만…….
“장관님, 우리도 더는 허세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당장 세계 곡물 가격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는 장관님도 잘 아시겠지요?”
잘 안다. 그리고 올해는, 아마 세계의 주요 곡창지대에서는 상당한 풍작을 예상한다고 들었다.
곡식이 농민의 배를 채우고도 넘쳐나면 시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너도나도 시장에 곡식을 내놓으면, 가격은 경쟁적으로 바닥을 향한다.
아즈텍 측에선 진지한 얼굴로 자기네 의도를 꺼내 들었다.
“우리는 두 가지 상환 방법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차관의 상환을, 고려가 아즈텍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의 ‘관세’를 낮추는 방식으로 대체하는 것. 그리고 고려가 해외 은행에 보유한 금을 우리 아즈텍 측으로 넘기는 것.”
여준설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일부러 지은 표정이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기색을 통해, 협상의 주도권을 넘겨받으려는 표정.
“잠깐 쉬었다 이야기하도록 하죠.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요.”
***
여준설과 아즈텍 측의 협상 자리에 참관하러 들어갔던 주견하는, 역시 참관하던 안세규와 함께 복도로 나왔다.
“장관께선 어떻게 보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세규는 견하의 얼굴을 흘끔 보고는, ‘잠시 같이 걷지’라며 등을 돌렸다. 견하는 그 등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허세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저들의 주장은 사실일 걸세. 최근 몇 년간 세계 곡물 가격은 정상이 아니야.”
“갑자기 그렇게 된 이유가 대체……?”
“여러 가지가 있겠지. 일단은 농업 기술이 좋아졌어. 농부가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때가 되면 거두는 전통적인 농경의 시대는 이제 지나갔어. 당장 비료만 해도 상당히 개량돼서 생산량 증대에 일조했다더군. 게다가……”
“거기서부턴 내가 설명하지.”
갑작스레 들려온 말소리에 두 사람 모두 돌아봤다. 재무장관 여준설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안세규와 견하 쪽으로 걸어왔다. 걸어오면서, 뚫어져라 견하의 얼굴을 본다.
견하는, 이 사람은 지금까지 봐 왔던 사람들과는 다르다 느꼈다. 여준설은 자신의 설명을 이해할 만한 지성이 견하에게 있는지, 그걸 재보고 있었다.
여준설은 정치경찰실, 소년감찰국 국장 주견하가 이 협상 자리에 참관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태사의 연인, 뭔가 정치적 뒷공작을 꾸미는 데에서 상당한 재능을 보인다는 소년.
그런 소년을 여기 보낸 건 태사의 뜻이겠지. 태사가 여준설을 감시하라고 주견하를 보낸 건 아닐 테고…… 주견하에게 국가 경제에 대한 안목을 키워줄 생각일까.
그렇다면 미래에, 주견하는 정치경찰에서 벗어나 더 큰물에서 놀 수도 있다.
“주 국장, 전쟁에서 무기와 비등하게 중요한 요소가 뭐라고 생각하나.”
“아마, 식량이겠죠.”
“그렇네. 총알을 산더미처럼 쌓아도 병사가 굶어 죽어서야 아무런 쓸모가 없지. 게다가, 군인은 뭔가를 ‘생산’해내는 직업은 아닐세.
특히 시골 출신 병사들은 원래 농번기의 일손인데, 그런 중요한 인력이 싹 전쟁터로 끌려 나오면 어떻게 되겠나?”
“식량 생산에 차질이 생길 겁니다.”
“좋아. 고등학생 치고는 이해가 빠르군. 그리고 민간인들도 말이야, 피난민이 되어서 후방으로 몰려들면, 그 후방 지역에는 식량이 부족해지기 마련이야.
하지만 전쟁 통에 비축한 식량도 날아가 버린 국가가 그들을 먹일 수는 없지. 그럼 그 국민더러 다 굶어 죽으라고 할까? 아니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겠지.”
“외국에서 수입하겠군요.”
“그래. 그런데 이번엔 그 ‘외국’의 입장이 되어 보자고. 자기네 주요 수출품이 곡물인 나라는, 뭐 윤리 같은 건 집어치우고, 다른 나라의 전쟁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겠나?”
“……아마도, 큰돈을 벌 기회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런 기회가 온다면 그냥 계속 생산하던 대로 곡물을 생산하겠나, 아니면 내년에 거둘 더 큰 이익을 생각하면서 생산량을 늘리겠나.”
여준설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견하의 눈에서 이해의 빛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거야. 무굴 제국, 지금의 바라트도 태평천국과 이슬람 제국한테 좌우로 얻어터지느라 식량 생산에 차질을 빚는 틈에, 브리튼이나 아즈텍에선 자기네 곡물이 세계 시장을 장악할 기회라고 본 거지.”
“식량 생산국들의 생산량 증대에, 전쟁 후 농업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겹쳐, 곡물 생산량이 넘쳐버렸다…… 그리고 다 함께 사이좋게 가격폭락이라는 폭탄을 끌어안았다, 는 거죠?”
“이게 몇 년 지속하는 동안, 농민들은 내년에는 꼭, 내년에는 꼭, 하면서 빚을 잔뜩 불렸지. 이 농민들이 빚을 못 갚고 쓰러지면, 빌려준 금융권은? 같이 타격을 받는 거지.
그리고 연쇄적으로…… 아즈텍 연방은 이게 예상되니까, 우리더러 관세를 낮춰라, 금으로 차관 갚아라, 하는 걸세.”
농업에서 입은 타격을 다른 분야의 수출로 만회해야 한다. 농민들에게서 잉여 곡물을 사들여서 곡물 가격이 더 떨어지는 것도 막아야 하고.
그런데 여기에는 다 돈이 든다. 아즈텍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면 부담이 크다. 그러니 그 부담을 다른 나라에도 넘기려는 것이다.
문제는 아즈텍 같은 상황을 아즈텍만 겪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아즈텍 측의 발상대로라면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그냥 서로 부담을 떠넘기기만 하면서, 세계 경제는……
-무너진다.
***
여준설은 다시 협상 자리로 돌아가며 쓰게 웃었다. 사회주의 경제학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세계 경제의 붕괴라니. 정말로 그런 일이 내 시대에 일어날까?
문득, 대학을 막 졸업하고 이쪽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느꼈다. 대학에서 배운 건 ‘밀폐된 실험실 환경’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실무’는 전혀 다르다는 걸.
인간의 최우선 가치는 돈이 아니다.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말도 안 되는 목적을 위해 거리낌 없이 경제적 이득을 포기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합리적 경제 주체라면 도박꾼이라는 게 생길 수가 없다.
국가 사이의 자존심, 민족의 자존심, 그걸 이용하는 자들의 권력욕, 그게 충족되지 않은 자들의 분노.
모든 것이 대학에서 배운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통해 작동했다. 여준설은 그걸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아니, 교과서적으로 흘러가게 해보려고 혼자 발버둥 치는 존재에 불과했고.
다시 아즈텍 측 담당자와 마주 앉은 여준설은, 생각해둔 이야기를 꺼냈다.
“관세를 구체적으로 얼마만큼 낮춰야 할지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겠습니다만, 낮춰야 한다는 점에는 우리도 동의하겠습니다. 그 대신 우리도 조금 여유가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고려는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 내전도 지금의 경제적 혼란에 일조했다. 세계 5위의 경제를 자랑하는 나라가 내전에 휩싸여, 몇 달 동안이나 세계 시장과 차단되었다.
고려만 경제적인 손실을 본 게 아니다. 고려와 무역을 하던 나라들 모두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게다가 배급제의 성공적인 시행, 그리고 내전의 조기 종결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농업 강국들은 향후 고려의 식량 사정이 악화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에 식량 수출을 계획 중이었는데, 그런 나라들의 농업도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이해합니다. 식민지에서라도 얻어내면 좋겠지만, 고려는 지금 그 식민지가…….”
신수덕과의 전쟁으로 초토화된 데다, 동맹국들과 재분배하면서 그 규모가 많이 줄었다.
아즈텍 측이 어느 정도 양보할 기색을 보이자, 여준설은 한 가지 제안을 더 꺼냈다.
“그 외에도, 아즈텍과 고려가, 아니 더 많은 나라가 함께 협력할 사안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어떤 겁니까?”
“바라트 연방과의 무역 문제입니다.”
공산 혁명 이후의 바라트는 철저한 통제 경제를 유지하며, 세계 경제의 흐름과는 따로 놀고 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세계 경제의 흐름에 멋대로 올라타서 이익만 취하려 하고 있다.
바라트는 티베트나 버마, 페르시아의 공산화를 차근차근 진행하며 세력을 확장 중이다. 당연히 강력한 공산군이 필요하다. 그리고 군대는 중공업을 통해 무장해야 한다.
그러나 처절한 공산 혁명과 내전으로 경제가 망가진 탓에, 중공업화를 위한 경제 기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은, 일단 되는 대로 국내에서 생산 가능한 물품들을 세계 시장에 내놓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곡물이다.
이 공산주의자들은 세계 경제에 대한 이해가 없는 건지, 아니면 다른 나라들의 경제 균형이 망가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지, 마구잡이로 수출을 감행했다.
최근 곡물 가격폭락에는 바라트의 이런 만행도 한 가지 원인이 됐다.
“세계 경제의 참여자로서 이익을 얻고 싶다면,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자본가’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양식은 있어야 한다는 걸, 그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자들이 자본가의 착취나 뭐 그런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나라 자본을 착취해선 안 된다는 걸 확실히 가르쳐 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즈텍 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실은 브리튼이나 신성 제국 쪽에서도 논의되고 있는 일입니다. 바라트에 대한 무역 봉쇄 조치, 말이죠.”
이미 저쪽은 그러고 있었나. 그렇다면 고려로서도 더는 거리낄 것 없는 일이다.
“우리도 그 논의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로마 제국을 비롯해 더 많은 강국들이 협력한다면, 바라트라는 세계 경제의 불안 요소를 어느 정도나마 억누르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일단 이 곡물 가격부터 안정시켜 나가면 다른 쪽에도 손을 대볼 수 있을 테고요.”
아즈텍 측 교섭 담당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못마땅하다기보다는, 조금 곤란하다는 찌푸림이었다.
“그게, 로마 제국 쪽 협력을 구하는 데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놓고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