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코룸(4)
토칸은 육포를 씹으며 증오스러운 군주의 비행선이 멀리 떠나는 걸 바라봤다.
며칠 동안 깎지 않아 까끌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살이 더 빠졌나? 손에 잡히는 볼과 턱이 작아진 것 같다.
토칸은 다시, 카라코룸을 본다. 새로 형성되는 시가지 반대편에는, 이른바 조드 빈민촌이 있다.
혹한에 전 재산을 잃자, 유목 생활을 더는 유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카라코룸의 빈민으로 전락해 정착한 곳.
“카간을 계속 추적할까요?”
부하 하나가 묻자 토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차피 다음 일정은 군사기지 시찰이야. 우리로서는 더는 접근하기 어렵지. 카간 감시는 그쪽에 있는 동지들에게 맡기자고. 그보다, 봐라.”
토칸이 손을 뻗어 도시 빈민가를 가리키자, 세 사람의 부하들도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군주의 존재가 어떤 폐해를 남기는지 말이야. 물론 근대 이후로도 유목민의 전통을 고집스레 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 전통을 버려야 한다면,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둔 다음이어야 해.”
그러나 시레문 카간은 그러지 못했다.
세계대전 중에 황위에 오른 청년 카간은 급속한 중공업화 정책을 몽골 전역에 강요했다.
물론 그건 수도 칸발리크가 함락되고, 초원으로 태평천국의 대군이 속속 몰려드는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던 조치이긴 했다.
그래도 너무 많은 사람의 삶이 희생당했다.
“몽골의 공업은 빈민의 피로 이룩됐다. 뿐만 아니라,”
토칸은 이번에는 건설 중인 신시가지를 가리켰다.
“군주 한 사람의 잘못된 결정이, 민족의 생활 터전까지 좁히고 있지.”
토칸, 그리고 그가 속한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이상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시레문은 걷고 있었다.
토칸이나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생각은 이랬다.
동포들이 살던 동부 국경지대, 혹은 고려의 서북부는 몽골과 고려 사이의 교집합으로, 머지않아 ‘알타이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될 두 나라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런 상징을 멋대로 제거하고, ‘거대한 하나’가 되어야 할 두 민족을 아예 분리하려 들다니.
시레문에게 과연 이상이란 있는가?
“이 모든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군주를 제거해야 한다.”
다른 부하 하나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왔다.
“대장, 대장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아니지만, 저는 정말 이해가 안 돼서 그렇습니다. 굳이 카간을 제거하지 않아도, 이를테면, 그냥 허수아비로 만드는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토칸이 고개를 돌려 부하를 봤다. 사막처럼 메말랐지만, 그런 사막에 뜬 별처럼 더욱 날카로운 빛이 도는 눈빛이다.
부하는 움찔했지만, 토칸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만약 보르지긴 황실이 다른 유럽의 군주들 같은 존재였다면, 자네 의견도 일리가 있지.”
“카간의 권력이 강하긴 하지만, 그건 신성 제국이나 프로이센 같은 나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 내가 말하는 건 권력의 세고 약함이 아니야. 권력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즉 ‘권력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지.”
유럽에서는 무수한 피를 뿌린 끝에, 왕권신수설은 폐기됐다.
신성 제국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 아래 들어가 국민에게서 황제권이 비롯된다는 이념을 세웠다. 혁명의 영향을 받은 프로이센이나 다른 군주국들도 이런 생각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로마 제국은 진즉에 『로마법대전』에 그렇게 성문화시켜 뒀다.
“하지만 몽골은 어떤가.”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사이에서 태어난 보르지긴 가문. 몽골의 모든 전통신앙뿐만 아니라, 아시리아 동방교회까지 카간의 신성성을 보조한다.
아무리 카간이 권력을 양보하고, 입헌군주제를 흉내 낸다 해도, 그것은 카간이 베푸는 은혜이지 인민의 의지가 될 수는 없다.
최소한 ‘귀족의 추대’라는 형식이라도 빌려서 ‘인간의 의지로 선출된 군주’가 아닌 이상, 그 혈통에는 신성성이 남게 된다.
“신성성이 남아 있는 한, 침범하지 못할 성역이 생기지.”
그리고 그 성역에서 벌어지는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
성역의 판단이기 때문에, 카간의 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인민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깊은 뜻’이 된다.
“그 실수가 사소하다면 뭐, 세월이 해결해줄 수 있어. 다음 대의 카간이라든가 하는 사람들이 바로잡아 줄 수 있지.
하지만, 당장 바로잡아야 하는 큰 실수라면? 그때는 누가 카간의 신성한 결정이 ‘틀렸다’고 말할 건가?”
부하들은 말이 없었다.
“시레문이 무슨 큰 죄를 지은 건 아니야. 죄가 있다면 그의 혈통과 그의 자리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제거해야 해. 카간 제도도 폐지해야 하고.”
토칸은 말에 올랐다. 부하들도 각자 말에 올랐다. 기차와 자동차의 시대가 왔지만, 여전히 말은 교통수단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다.
카라코룸을 향해 말을 몰자, 이번에는 또 다른 부하가 물었다.
“고려의 허동주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걸로 압니다.”
토칸은 살짝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까다로운 질문이 들어올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부하들의 사상 교육은 대장의 몫이다.
“그도 고려 인민의 의지를 담은 황제나 통령 같은 걸 세우려고 했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봉기는 실패했고, 그 자신도 죽었죠.
우리가 목표로 하는 카간 제거도…… 과연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토칸은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허동주의 실패는 확실히 의욕을 꺾는 일이지. 우리도 똑같은 길을 밟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돼. 기존 체제라는 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하는 벽을 느끼기도 하고.”
그렇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실패는, 비슷한 꿈을 꾸는 이들에게 좋은 교과서가 되기도 한다.
“물론 그런 큰 전략은 총재를 비롯한 상층부의 몫이긴 하지. 그래도,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어. 우리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낼 거다. 불법화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운동과 달리, 우리는 중앙 정계와도 연결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대장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토칸은 입을 다물었다. 내 생각, 이라.
카간을 제거하기로 한다면, 범 알타이 인민동맹 역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운동과 별반 다를 바 없어진다.
몽골 민족을 중심으로 ‘알타이 민족’을 통합하려는 것 정도만 다를까?
“……우리는 고려에서 ‘허동주’에만 판돈을 건 게 아니야.”
“……?”
“고려에도 군주제 폐지를 꿈꾸는 세력이 있지. 예전에는 ‘고려민국 임시정부’라고 불렸던 세력 말이야.”
부하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대장의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그쪽하고…… 허동주는 적 아닙니까?”
“맞아. 하지만 두 세력 모두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지.”
부하들 사이로 웃음이 지나갔다. ‘우리 편’이 상황을 주도한다는 유쾌함이다.
“그러면 어느 쪽이 이겨도 우리에게 득이 되는 거군요.”
“고려가 내전 중일 때는 그랬지. 하지만 이제 고려의 내전도 끝났어.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수장, 안세규는 그들의 황제체제와 싸워야 해.”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과 협력을 다져나간다, 는 겁니까?”
“고려의 새 황제는 카간의 딸이지. 그쪽을 흔들면, 몽골 카간도 흔들린다. 우리는 그 흔들림에 올라탈 거고.”
토칸은 입을 다물었다.
부하들은 토칸의 말이 끊기자, 그게 대장이 자신들에게 줄 수 있는 정보의 최대치임을 알았다.
다들 묵묵히 말을 계속 몰았다.
토칸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부하들에겐 안심하라는 듯 그렇게 말했지만, 결코 안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고려 내전에 양다리를 걸쳤듯이, 안세규도 몽골에서 양다리를 걸쳤다.
안세규는 ‘카간의 딸’을 고려로 데려간 장본인이다. 당연히 몽골 내 황실 옹호세력과 연결돼 있다고 봐야겠지.
쉽지 않은 싸움이다.
그냥 두들겨 패기만 하면 되는 싸움은 쉽다.
싸우다 표정 싹 바꾸고 웃는 얼굴로 끌어안기도 해야 하는 싸움은 다르다. 그 시기를 제대로 재지 못하고, 적대감만 계속 불태우는 멍청이가 가장 먼저 패배한다.
군주의 제거라는 공동 목표가 있다면, 범 알타이 인민동맹은 때로는 ‘붉은 정당들’과 손을 잡기도 해야 할 것이다.
언제든 그 손을 놓고 싸울 준비를 하면서.
어느덧 토칸과 일행은 카라코룸 빈민가로 녹아들 듯 들어섰다.
***
“재미있는 아이디어 같지 않아?”
재연은 황제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녀 뒤쪽에 있는 갑주에 시선을 던졌다.
황금빛 고려 갑주.
속에 받침대를 둬서 마치 장수가 앉아 있는 모양을 만들어 둔 저 갑주는, 의도된 장식이다.
유럽과의 교류가 늘면서 그 문화가 많이 유입됐지만, 그래도 아시아의 귀족들은 어떤 ‘위엄’을 보여야만 했다.
즉 우리는 당신네 유럽인들의 문화를 이해할 만큼 교양있지만, 동시에 당신네가 범접하지 못할 고유문화도 있다고 내비치는 것이다.
그러려면, 유럽인이 이해하는 ‘오리엔트’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편집한 ‘오리엔트’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고유문화라고는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을, 유럽인들이 받아들이기 편하면서도 경탄을 자아낼 ‘선택적’ 오리엔트.
아마 이 방에 들어올, 이를테면 루스계 공국의 대사들이나 브리튼 대사는 감탄할 것이다.
하지만 루우가 저 장식용 갑주를 걸칠 일은 거의 없겠지. 잡지에 실릴, ‘연출’된 사진을 위해서라면 모를까.
“황제야말로 고려 전통문화의 정점에 있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무의 기풍도 선전한다. 누구나 좋아할 법한 이야기지.”
“……그럴 것 같습니다.”
루우는 흐응, 하면서 고개를 약간 젖히고, 내려다보듯 재연을 훑어봤다.
“못마땅한가?”
“못마땅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루우는 말을 고르는 재연의 얼굴을 참을성 있게 바라봤다.
“폐하께서 명하신 몽골과의 동군연합, 만약 폐하의 고려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거기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그걸 우려했습니다.”
“일리 있어. 똑같이 몽골풍을 연출하면 될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내가 고려의 황제인 이상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
“그래서 저는, 중간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간단계……?”
재연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게 좋은 일일까.
“허동주는 죽기 전,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라는 단체와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루우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이다.
“정확하게 어떤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는지, 말단인 저로서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두 조직은 ‘미래에 고려와 몽골을 통합한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협력한 건 압니다.
물론 한쪽은 고려 주도 하의 통합을, 다른 쪽은 몽골 주도 하의 통합을 꿈꿨겠죠…….”
루우의 머리 회전은 빨랐다. 그녀는 재연의 다음 말을 가로챘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아이디어를 차용하자, 는 말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알타이 민족’이라는 보다 큰 민족의 틀을 차용하는 겁니다.”
“고려 민족과 몽골 민족이 결국 하나의 큰 틀로 묶일 수 있다면, ‘알타이 민족’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상관없겠지.”
“예.”
원래 민족이라는 단위는, 정치적 필요로 창작된 것이니까.
그렇다. 이제 한재연은 여기까지 왔다. 민족에 대한 신념을 지키려다, 신념의 수단이 신념의 자리마저 위협하는 지경까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때그때 적당한 논리를 맞출 뿐이다.
한재연의 가슴 속 허무를 아는지 모르는지, 루우는 계속해서 명령을 내렸다.
“관련 언어학자나 역사학자를 동원할 권한, 자금 얼마든지 줄 테니까 한 번 해봐. 괜찮다 싶으면 바로 교육, 선전에 들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