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90화 (90/541)

카라코룸(2)

한재연은 자신이 내려놓은 서류를 뒤적이는 안세규의 모습을 봤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급조된 이론.

민족 단위를 초월해, 몽골과 고려를 하나의 틀로 묶자는 기획.

중세 시절,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던 대제국 다이온을 모델로 한 국가의 청사진.

이 모든 것은 루우의 의지와, 재연의 공허함이 만든 합작품이다.

재연은 솔직히, 저 안에 진심을 전혀 담지 않았다. 그저 루우의 뜻을 반영해, 어쭙잖게 펜을 놀렸을 뿐이다.

그래도 루우는 별다른 추가 요구 없이, 거의 초안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이윽고 서류를 어느 정도 훑어본 세규가 고개를 들어 루우를 바라봤다.

“중세 제국의 이름을 딴 연방 국가를 창설해, 그 안에 고려와 몽골을 포괄할 계획이군요.”

“안 장관이 이야기한, 두 나라의 의회를 유지하자는 생각도 반영해볼까 해요. 첫 단계에서는 그렇게 하는 한편, 연방 통합 의회를 구성해 점차 두 나라를 완전히 하나로 만드는 거죠.”

안세규는 안경을 밀어 올렸다. 이건 잘 계산해야 한다. 루우가 꺼낸 「다이온(大元) 연방 창설 계획」, 여기에 협력하느냐, 아니면 잠시 물러서서 루우와 그 주변 상황을 재보느냐.

일단 루우는 세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사를 보였다. 거부권 문제에 대해 협상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세규는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에 협력하라고 요구받을 것이다.

만약 협력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계획대로라면 기껏 제국최고회의의 권한을 확립해도, 언젠가 구성될 연방 의회의 하위 기관, 고려 ‘지방’ 의회가 돼버린다.

새롭게 형성할 다이온 연방 의회가 잘못 돌아가면, 세규는 철저하게 루우의 의도대로 놀아날 수도 있다.

루우의 입맛대로 구성된 다이온 연방 의회가 고려 제국최고회의를 찍어누른다면, 마땅히 저항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역시 시레문의 죽음은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고, 따라서 다이온 연방 의회라는 것도 아직은 머릿속에만 있는 기구다.

협력하지 않았을 경우, 세규가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여기서는 일단 협력하는 게 좋지 않을까.

루우에게 협력하면서, 저 ‘다이온 연방’이라는 계획이 현실화하기 전에 미리 대책을 세워두는 것이다.

“폐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저와 고려국민당 또한, 고려와 몽골이 한 분의 성상을 모실 수 있도록 힘을 다하겠습니다. 다만, 고려국민당이 바라는 거부권 문제를 확실히 결단해주셨으면 합니다.”

“황제에게 무한한 권력이 있다면, 그것 또한 국가의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 있겠죠. 황제 역시 인간이고, 그렇다면 황제 본인이 먼저, 자신이 실수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 대책으로서 거부권에 제한을 두는 안 말인데…….”

루우는 그렇게 말하곤 세규의 눈을 들여다봤다. 단순히 신비한 소녀라고만 생각했던 눈빛이, 이제는 리안에 버금가는 의지를 지니고 찌르고 들어온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감추고 있던 걸까, 아니면 권력이 사람을 이 정도로 변모시킬 수 있는 걸까.

“유럽 입헌군주제를 참고해보는 게 어떨까 해요. 황제는 제국최고회의가 상정한 법을 단 두 번만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처음 거부된 법은 다음 회기 때 다시 상정할 수 있고, 두 번째 거부 때에는 제국최고회의 해산.

재선거를 거쳐 다시 구성된 제국최고회의는, 의원 과반의 동의를 얻으면, 같은 법안을 3차 상정할 수 있고. 이때는 황제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으로.”

세규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았다. 신이나 다름없는 초월적 존재인 황제의 권력을, 어쨌든 ‘법으로’ 제한하는 첫걸음을 뗀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한 성과다.

황제가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제한을 뒀다는 것 자체보다, 황제를 ‘법 아래의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세규는 끄덕이면서, 루우에게 넌지시 다음에 논의할 이야기를 암시하기로 했다.

“폐하께서 내리실 칙령의 경우, 그 책임이 어디에 미치게 할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봅니다만, 아무래도 오늘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긴 어렵겠지요.”

“짐도 동의해요. 짐은 법안을 상정하거나 하는 식으로 국정에 직접 개입할 생각은 없어요. 따라서 그런 논의는 다른 시점에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그보다도…….”

루우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우리가 한 논의를, 태사나 다른 정당에서도 동의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았죠.”

다른 정당, 이라고 하면 여당인 ‘제국입헌당’을 말하는 것이리라.

만약 제국입헌당이 황제의 강력한 권력을 바탕에 두고, 태사 미리안을 중심으로 힘을 행사할 생각이라면, 이런 식의 거부권 제한에 반대할 것이다.

“제가 직접 태사와 담판을 지어야겠군요.”

세규는 리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리안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선, 세규가 방금 생각한 것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야 할 것이다.

리안은 ‘거부권’을 내주는 한편 다른 이득을 취하자고 생각할 수 있다.

흘끔, 소년감찰국 제복을 걸친 소년과 소녀를 본다.

여기는 그 소년, 주견하의 시야가 미치는 장소다. 그렇다면 주견하와 미리안의 관계를 생각해봤을 때, 주견하나 미리안이 이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에 어느 정도는 관여돼 있다고 봐야 할까?

세규는 복도로 물러 나오며 생각했다.

방심할 수 없겠다, 고.

***

안세규가 방에서 물러나면서, 유지나도 안세규를 안내하기 위해 따라 나갔다. 방에는 한재연과 루우 두 사람만 남았다.

“정말로 이런 「계획」을 진행할 생각이십니까.”

“이 「계획」이 완벽해서 진행하는 건 아니야. 모든 거창한 계획의 초안은 형편없는 망상이지. 그래도 네 계획안은 핵심적인 부분을 잘 찌르고 있어.”

‘다이온’은 역사적으로, 이른바 중원, 즉 지금의 키타이, 낭키아스, 탕구트, 대예, 보우슈엥 전역을 지배했던 국가다. 이 중 키타이와 낭키아스는 루우의 숙부들이 다스린다.

만약 ‘다이온 연방’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형성된다면, 적어도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연방 가입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다.

고려 민족의 패권 확립이라는 천손민족협회의 이상. 그 이상을 지금도 가슴에 품은 재연이었기에 이런 발상이 가능했다.

“천손민족협회라는 출신은 속일 수 없는 모양이군.”

황제 루우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는 정말 순수하게 즐거워서 짓는 것일까. 혹은 재연의 행동이 루우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데서 오는 비웃음일까.

“폐하를 섬기는 것과는 별개로, 폐하의 나라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건 제 신념의 문제니까요.”

안세규가 생각한 ‘느슨한 동군연합’과 달리, 한재연이 세운 계획은 ‘고려 민족 주도 하의 다이온 연방 결성’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아까 외무장관이 지적했던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몽골인의 동의 없이 두 나라를 하나로 합치는 건 무리야. 강제로 합병할 수 있다 해도 막대한 비용이 소모될 거야.”

합병에 반대하는 몽골인 세력의 끝없는 반 고려 활동. 그걸 억누르기 위한 경찰력의 투입. 이렇게만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리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한재연은 고개를 저으며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저는 인간의 못된 습성을 이용하면 쉽게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인간의 못된 습성?”

“누군가 자기 위에 서는 것보다, 밑에 있던 인간이 자기와 동등해지는 걸 더 싫어하는 습성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나 귀족과 평민 간 차별이 없어졌다. 평민들은 모두 열광했을까?

아니다.

이 ‘평등’을 극구 거부하고 혁명에 광적으로 반발하는 ‘평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왜일까.

자기 밑에 있던 노예들과 평등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습성을 이용하면, 몽골인들에게 얼마든지 매력적인 이익을 던져줄 수 있습니다.”

루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의 관리에 몽골인을 동원하자는 건가?”

재연은 끄덕였다.

실질적으로는 고려의 주도 아래 통합을 이루되, 몽골인들을 공동통치 민족으로서 대우해주는 것이다.

몽골인들은 고려인들이 자신의 윗선에 서는 걸 불쾌해하기보다,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을 관리하는 ‘지배민족’이 된다는 사실을 반길 것이다.

다만…….

재연은 이게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몽골인이다. 황제 본인이 이런 계획을 불쾌해하지 않을 것인가.

“괜찮은 발상이군. 계속 발전시켜 봐. 기대하지.”

재연은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상은 권력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

세린전 밖으로 안내하겠다고 따라 나온 소녀, 유지나는 세규의 앞에서 걷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 루우의 권력욕이 폭주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하러 주견하를 찾아갔었지.

그런데 주견하의 부하들이 이렇게 루우가 권력욕을 드러내는 자리에 함께 있다. 주견하는 그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주견하의 영향력이 끼치지 않는 곳까지 루우가 침투한 걸까.

혹은, 루우는 이미 주견하를 자기 영향 아래 두고 있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주견하는 태사와 황제 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있나?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판단을 내릴 근거가 부족하니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게 전부인가.’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일단은 계속 정보를 수집하자.

생각을 하다 문득, 세규는 지나가 자신을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보게. 여긴 밖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잖은가.”

복도 앞뒤, 시야가 닿는 곳 안에는, 다른 사람은 전혀 없다.

지나는 빙글 돌아섰다.

고려국민당 내 안세규의 반대 파벌을 숙청하러 왔을 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저희 소년감찰국은, 장관님을 위해 고려국민당 내부를 ‘청소’하는 데 협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랬다. 태사와 세규 사이의 거래이기도 했지만, 주견하가 약속의 ‘증표’로서 행해준 일이기도 하다.

“이제 장관께서 약속을 ‘이행’ 해주시길 요청합니다. 그전까지 저희 국장은 다른 협력을 보류할 것입니다.”

지나의 말을 듣자 퍼득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그랬다. 주견하가 루우의 폭주를 견제해주는 대신, 안세규와 고려국민당이 해야 했을 일.

“우리가 먼저 움직이기 전에는 주견하 국장도 안 움직일 생각이란 말인가?”

지나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렸다.

“이쪽으로 따라오시면 곧 출구입니다.”

지나의 차가운 말을 들으면서, 세규는 생각했다.

세규가 견하에게 약속한 것. 내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이행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할 수 있는 것.

‘숙군(肅軍)의 때가 다가오고 있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