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4)
약속대로 안동에서 원본 자료를 올려보냈기에, 루우는 상당히 만족했다.
물론 만족을 얼굴로 드러내지는 않고, 심각한 얼굴로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자료 중 피가 묻어 알아보기 힘든 것들은, 부록에 내용이 옮겨 적혀 있었다.
서류의 산에 파묻히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게 루우의 성미에 맞다. 하지만 이 서류는 루우의 최대 관심사인 만큼 지겨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즐겁기까지 했다.
근처에는 타이시(太師)가 넘겨준 「쿠빌라이 문서」와 관련 자료들까지 있어서, 타이시 일행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심심할 일은 없다.
그러나, 서류를 한 장 한 장 읽어가면서, 루우의 기분도 표정만큼이나 심각해졌다.
“역시 그건 ‘불가살’ 단계였나…….”
이단이 겪을 ‘이’의 왜곡과, ‘칠정’의 마모, 그 부담을 기갑사로 돌린다고 해도,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불가살’에 도달한 경우엔 기계인 기갑사가 ‘이’의 왜곡을 겪어 생물 비슷한 상태가 된다.
“그 살덩어리 같은 표면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견하가 기갑사를 탈취, 허동주를 추격하러 나설 때, 아주 잠깐이지만, 기계의 강철 표면이 살점 같은 질감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폭주로 인해 불가살 단계에 이른 기갑사는 통상 기갑사보다 훨씬 강한 전투력을 발휘하지만, 감정의 마모 정도가 극심해 정신 붕괴를 일으키거나, 심한 경우 다시 탑승자의 육체에 간섭, 기계와 육체가 뒤섞이는 왜곡이 일어나기도 한다’…….”
루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산동에서 있었던 전투들을 떠올린다. 그때, 견하가 아주 이질적인 ‘검’을 만들어냈던 걸 기억해낸다.
두 칼날 사이, 정말 기계적이고 이질적인 ‘중심부’.
“역시…… 그때 견하를 찾으러 갔을 때 ‘기갑사’가 보이지 않았던 건, 전투로 파괴된 게 아니었던 거야.”
견하가 자신의 내부든 아니면 내부와 통하는 어떤 ‘공간’에든, 흡수해 버린 거지.
“보면 볼수록 재미있어. 특이체질인가 아니면 그냥 운이 좋은 건가. 어쨌든 지금도 멀쩡한 얼굴이니, 계속 지켜볼 필요는 있겠지.”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을 삼켰다.
배영훈은 그런 소년 소녀들의 모습을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아군이 이 시설을 발견할 당시에는, 연구소 자체적으로 제압에 성공한 뒤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연구소 인원의 9할이 이 괴물 한 마리한테 당해 혁명군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리안은 괴물의 시체에 가까이 다가갔다.
하얗고 미끈한 몸 거의 전체에 총알 자국이 남았다. 일단 이건 기억하는 ‘하얀 괴물’과 유사하다.
시신보관소의 냉기로 하얀 입김을 뿜으며, 사진에서 확인한 특징들을 실제로 확인한다.
지느러미와 팔, 다리가 뒤섞인 듯한 사지. 길쭉한 몸 끝에는 꼬리가 붙어 있고, 역시 긴 목 끝에는…….
“아무리 봐도 이건 머리라고밖에 할 수 없겠군.”
그렇게 말하며 돌아보자 견하와 효윤 모두 끄덕인다.
“실제로 보니까 정말 하회탈 같이 생겼어.”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보고 있자니, 죽어서도 비웃는 듯하다.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죠.”
견하의 말에 효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반대라니?”
“하회탈이 이 괴물의 모양을 본떴을 수도 있지.”
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말없이 견하와 효윤의 대화를 들었다.
“하긴 그래. 이 괴물이 출현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보장은 없지. 아니, 처음은 절대 아닐 거야. 우리가 본 ‘하얀 괴물’은 분명히 이런 놈들과 관련이 있어.”
“‘탈’이라는 건 원래 민간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어. 과거에 출현한 이 괴물을 주민들이 ‘신’으로 섬기면서, 노여움을 달래보려고 ‘탈’을 만들었을지도 몰라.”
마치, 고려 황실의 이단 혈통이 용으로 비유됐던 것처럼. 몽골 황실의 이단 혈통이 푸른 늑대와 흰 사슴으로 비유됐던 것처럼.
이단 관련 괴현상들은 민간의 주술, 설화, 종교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수도에서 루우가 몰두하고 있을 「쿠빌라이 문서」는 그 집대성이다.
“다만 한가지 이상한 점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 이게 우리가 본 놈과 완전히 동일하다면 이렇게 사체를 남기는 게 아니라 사라졌어야 해.”
“그 둘 사이에 ‘왜’ 이런 차이가 있는지, 그것도 알아내야 할 과제네요.”
추측은 해 볼 수 있다. 리안 일행이 목격한 ‘하얀 괴물’은 인위적으로 이단을 생산하려는 연구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그 하얀 괴물은 이런 놈들의 열화판이라 가정해 볼 수 있다.
열화판이라면, 시체를 남기지 못할 정도로 불안정한 존재, 일 수도 있고.
문제는, 그렇다면 이 하회탈 괴물과, 루우의 ‘용’ 사이에는 또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리안은 몸을 일으켰다. 다시 배영훈 쪽을 돌아보며 묻는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나?”
“청소 작업 전 핏자국…… 아마도 괴물과 사람의 것이 뒤섞인 자국인 듯합니다만, 그 핏자국을 통해 괴물 출현 이후 동선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동선을 알아냈다면, 이게 대체 어디서 출현한 건지도 알 수 있겠군.”
배영훈은 당혹스럽다는 듯, 다음 말을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일단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로서는 감히 뭐라 단정 지어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침착하게 안내하던 배영훈이 당혹감을 드러냈기에, 태사 일행도 다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배영훈은 연구시설의 더 깊은 곳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견하는 침을 삼켰다.
아마도 격벽 역할을 했을, 두꺼운 철제문이 완전히 찢어진 채 복도 벽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안에서 밖으로 부서졌어.”
효윤이 중얼거렸다.
그랬다. 그러니까 괴물은 지금 일행이 향하는 곳에서부터, 압도적인 힘으로 쇠로 된 문을 찢어발기며 전진해왔다는 이야기다.
그 정도 힘을 가졌으니, 사람이 어떤 꼴을 당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렇게 몇 개의 부서진 문을 지나, 마침내 일행은 괴물이 최초로 출현했다고 추정되는 장소에 도착했다.
리안은 비명을 억눌러야 했다.
“저건…….”
견하가 가장 냉정하게 반응했고, 효윤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붉은 구체가, 방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그냥 붉은 구체라면 견하의 팔에 이렇게 소름이 돋진 않았을 것이다. 그 구체 표면에는, 하얀…… 신체 부위들이 떴다 잠겼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까 그 하회탈 같은 얼굴뿐만 아니라 팔과 다리도.
사람 머리통만 한 눈알 십여 개가 한꺼번에 떴다가 잠겼을 땐, 리안도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신체 기관들이 떴다 잠기는 붉은 구체는, 분명 액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붉고, 끈적이는 액체.
그런 특징을 지닌 액체라고 하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핏덩어리 같군.”
간신히 공포와 역겨움을 삼킨 리안은 그렇게 감상을 뱉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피비린내가 나진 않는다는 걸까.
“저거, 아무리 봐도 죽었거나 활동을 중단한 건 아닌 것 같죠?”
“저렇게 꿀렁대면 잘해봐야 수면 상태라고밖에 할 수 없겠지.”
효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의견을 말했다.
“그러니까, 저기서 그 괴물이 나왔다는 거죠?”
눈만 돌려서 견하를 본다.
“견하 네가 하얀 괴물을 불러내는 그 작은 ‘공간’ 같은 거, 저거랑 관련이 있을까?”
“……없다고 말하긴 힘들겠지.”
견하는 붉은 구체를 바라봤다. 리안의 말대로 잘해봐야 수면 상태라면,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재개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활동을 재개하면 또 그런 하회탈 머리 괴물을 뱉어낼 수도 있고. 그때는, 한 마리만 뱉어내리라는 보장이 없다.
“소령.”
리안의 부름에 배영훈은 즉각 응했다.
“소령 배영훈.”
“여기서 잡은 포로 중에, 연구원이었던 놈들 전부 데려와 줘.”
리안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잔인한 광경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상상 이상으로 기괴하군. 좀 쉬어야겠어.”
일행은 그 장소에서 도망치듯 돌아 나왔다. 지상으로 나와 다시 바깥 공기를 쐬자, 모두의 기분이 좀 나아졌다. 기운을 차렸는지, 리안은 부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저런 괴물을 부르는 말이 따로 있었지?”
배영훈은 끄덕였다.
“예. 퇴계 이황의 기록으로는 저런 괴물을 ‘파멸인(破滅人)’, 그리고 여기 연구원들은 저런 것들을 통틀어 ‘파멸인류(破滅人類)’라 불렀던 모양입니다.”
대체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나중에 파악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파멸인, 파멸인류, 한 글자 차이지만,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겼다.
저런 게 절대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
「쿠빌라이 문서」.
이름 그대로 쿠빌라이 카간 시대에 편찬된, 특수한 문서 군을 일컫는다.
“상관은 알고 있는데, 그 측근이 몰라서야 일이 안 돌아가겠지. 짐이 후배님을 부른 건 그래서야.”
유지나는 루우 선배, 그러니까, 황제 폐하를 알현하면서 리안을 대할 때만큼 당황했다.
“그, 폐하, 한재연이나 양수영에게는, 당연히 비밀로 해야겠…… 죠?”
“당연하지. 게다가 그 신참에게는 따로 맡긴 일이 있어. 이론가적 기질을 발휘해서, 민족을 초월한 황제, 보편 제국의 이념을 만들어보라는 거지. 기껏해야 고등학생이 쓰는 거니 초안 정도밖에 못 하겠지만.”
“저는 한재연의 일을 알지만, 한재연은 저의 일을 모른다. 즉, 제가 한재연이나 양수영을 통제하는 데 힘을 실어주시려는 거군요.”
루우는 웃지 않았지만, 지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만족스러운 웃음 비슷한 것이 도는 걸 봤다.
“확실히 영리해. 좋아. 지금은 국장이 여기 없으니까 우리 두 사람이 손발을 맞춰보자고.”
루우는 그렇게 말하며 꼰 다리를 풀고, 손가락으로 옥좌 팔걸이를 두드렸다.
“유지나, 고1이 배우는 세계사에서 다이온(大元)까지 진도가 나갔던가?”
“짧게 다루고 지나가긴 했지만, 주견하 국장이 공부를 해두라고 해서, 조금은 했어요.”
“마르코 폴로는 아나?”
“『동방견문록』의 저자죠.”
“그래. 음, 거기엔 마르코 폴로가 다이온까지 온 여행기나 체류 중 겪었던 여러 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지.
그리고 마르코 폴로는 자기가 쿠빌라이 카간의 총애를 받던 측근이라는 식으로도 적어놨는데, 그게 다이온의 역사서로는 증명이 안 돼.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는 마르코 폴로의 허세라는 게 주된 의견이었는데…….”
허세가 아니었다.
마르코 폴로에 대한 다이온 측 기록은, 고의로 누락된 것이다.
쿠빌라이 카간이 마르코 폴로를 내쳐서도 아니고,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카간을 배신해서도 아니다.
기록 누락은 두 사람이 합의한 일이었다.
“쿠빌라이 카간의 진정한 벗, 마르코 폴로에겐 ‘진짜 임무’가 있었거든.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죽는 날까지 그걸 비밀로 했다는 증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