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3)
“정리, 끝났습니다.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도산서원의 ‘지하 시설’ 청소에 대해, 연락을 맡은 장교는 그렇게 보고했다.
하루 신나게 놀았으니 이제는 일로 돌아가야지. 리안은 기지개를 켜며, 텐트 안에 함께 누운 견하와 효윤을 재촉했다.
키가 가장 작은 리안을 감싸듯, 두 사람이 좌우로 누워 있었다. 방금 장교가 와서 보고하는 소리에 이미 잠은 깼다.
“잘 잤어? 잘 잤어요?”
“음, 바닥이 딱딱해서 그런지 좀 뻐근하긴 하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각자 그렇게 아침 인사를 나눈다.
다행이다, 라고 리안은 생각했다.
어젯밤에는 가장 아끼는 두 사람 사이에서, 따뜻한 기분으로 잠들었다. 답답한 수도의 정세와 업무에서 벗어난 덕분일까.
이성이니 뭐니 따지기 전에 정말 즐겁게 놀았던 어린 시절 같은 기분으로, 놀다 지쳐 잠든 친구들 같은 느낌으로, 그렇게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장교가 물러나자 리안은 텐트의 입구를 걷었다.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또렷해지고, 상쾌한 아침 공기가 텐트 안의 따뜻한 공기와 뒤섞인다.
뒤돌아보자, 아침 햇살 속, 잠이 덜 깬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그 모습이 귀여워 키득, 웃었다.
“좀 더 휴가를 즐기면 좋겠지만, 이제 안동에 내려온 ‘진짜’ 목적에 따라 일을 할 시간이야. 준비하도록.”
***
도산서원은 겉으로 보기엔 그저, 조금 규모가 큰 기와집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멋진 경치 속에 녹아들 듯 자리 잡은 모습이 일반 가정집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견하의 눈에는 큰 차이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지상’에 드러난 부분은 지금 그들이 처리해야 할 일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정말 중요한 부분은, ‘지상’의 도산서원에서 좀 더 북쪽, 깊은 산으로 들어간 곳이었다.
여기서 별다른 특징도 없는, 토굴 앞으로 안내받았다. 입구는 사람 한 명이 허리를 조금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좁았다.
일단 들어가서 살짝 내리막인 흙길을 따라 걸어가면, 어느 순간 확 트인 공간이 나왔다.
온 사방이 철로 된 연구시설 혹은 군사시설, 또는 둘 다인 것 같은 공간.
토굴 입구에서 바로 이어진 곳에는 층계참 같은 자리가 있었고, 그 앞은 철제 난간이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철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역시 쇠로 된 차디찬 바닥에 발을 디디게 된다.
십여 미터 앞에, 강철로 된 벽이 있었다. 그 아래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지하’의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오랜만에 보는 배영훈 소령이 달려와 경례를 올린다. 리안은 그 경례를 받아주며 질문했다.
“이 시설…… 설마 퇴계 이황 때부터 이랬던 건 아니겠지?”
“찾아낸 기록에 따르면, 이렇게 현대적인 모습을 하게 된 건 제3제국 성립 이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퇴계 선생이 도산 서당을 만들 당시엔, 비밀 자료를 보관하는 토굴 정도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리안은 끄덕였다. 백부님은 이걸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허동주가 먼저 도산서원을 확보하고 비밀에 부쳤을까.
옛 고려민국 임시정부, 그러니까 세계대전 종전 직후 지하조직화 하기 전의 민국 정부는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몰랐을 가능성도 있지만, 알아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거나, 자료 분석이 끝나기 전에 선대 각하의 토벌을 당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혹은 기술이나 여력 자체가 없었거나.”
세계대전 기간에는 당장 ‘일반적인’ 무기들을 자기네 군대에 보급하는 것으로도 벅찼을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에는 제국 정부와의 협상에 온 신경이 쏠렸을 거고.
아무리 아즈텍 연방이나 일본공화국이 민국 정부를 지원했다 해도, ‘이단’ 관련 기술까지 적극적으로 제공했을 거라 보긴 어렵다.
태사 일행이 문 근처에 접근하자, 경계를 서던 병력이 경례를 올린다. 곧이어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펼쳐진 공간은 훨씬 깨끗했지만, 훨씬 차가워 보였다.
수도에서 받은 보고서. 거기 첨부된 사진에는 사람의 피와 살점이 낭자한 끔찍한 공간이었는데, 그새 다 치운 모양이다.
배영훈이 가장 먼저 안내한 곳은 서류들이 정리된 공간이었다.
“불태우거나 미리 빼낸 자료들 때문에 온전치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어떻게 남은 자료들을 수습해 뒀습니다.”
리안은 서류를 하나 집어 들었다. 피가 묻은 서류였다. 시설의 벽이나 바닥에 묻은 피는 닦아냈지만, 종이에 튄 피까지 닦아낼 순 없었겠지.
그리고 이 핏자국은, 왜 이 서류들이 처리되지 않았는지 알게 해준다.
“서류를 처리하려던 중에 그 ‘괴물’의 공격을 받았나 보군.”
“예. 때문에 일단은 피가 묻은 서류들을 낱장으로 조심스럽게 분리하고, 건조 작업부터 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자료는 피가 덜 묻은 축에 속합니다. 아예 안 묻는 서류도 있지만 심한 것은…….”
견하가, 배영훈이 예로 들려 했던 서류를 집었다. 아예 갈색 물이 든 서류는 그 글자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시신의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수습하는 데 애먹었습니다. 별로 권해드릴 만한 것은 아니지만, 괴물의 시체처럼 본 시설 내에 보관 중이기에, 각하께서 원하신다면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시체 보관이라니…… 냉동고라도 있는 건가?”
“예. 시신 보관시설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여기서 진행한 ‘실험’의 사망자가 나오면 그 시신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었을지…….”
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시신까지 나올 정도의 실험이 행해졌다면, 그 윤리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실험 자체가 굉장히 과격했다는 이야기다.
대체 무슨 실험을 어떻게 하면 사망자가 나올 수 있는가? 아니, 사망자가 발생할 것을 미리 ‘예상’해서 보관시설을 만들어 두었다면…… 계획 단계에서 이미 그런 실험 일정이 잡혀 있던 것이겠지.
“이른바 ‘척준경 프로젝트’…….”
효윤이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듣자, 리안과 견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광경이 있다. 이단의 능력을 어마어마하게 증폭시켜주는 기계 갑옷. 제1제국의 전설적인 무사에게서 이름을 따 온 그 프로젝트.
“여기서 그 실험을 했던 걸까?”
포로로 잡거나 투항한 연구자들은 그 기계 갑주를 ‘기갑사’라 불렀다.
심문 결과 그것은 ‘기’의 발현인 ‘칠정’을, 즉 탑승자인 이단의 욕망이나 감정을 연료로 삼아 작동한다고 한다.
욕망 또는 감정을 연료로 삼는 것은, 이단이 자신과 다른 원리로 구성된 기계의 ‘이’에 간섭할 때 이단의 ‘이’가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신환도역 전투에 동원된 기갑사들은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완성작이었던 것 같지만, 그전에는 분명, 무수한 미완성작들이 있었겠지.
리안도 세계대전을 다룬 여러 문헌을 통해, 이단이 기계의 ‘이’에 간섭하면 어떤 끔찍한 결과가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태평천국군의 평양 폭격. 당시 태평천국은 항공기나 비행선의 작전 범위, 내구도를 높이기 위해 조종사와 이단을 함께 태워, 이단의 능력으로 비행기의 성능을 높였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어날 문제는 예상치 못했다.
“녹아내리듯이 신체가 붕괴했다지.”
일종의 부작용, 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인간과 기계, 생물과 무생물, 전혀 다른 ‘원리’로 구성된 두 요소 사이에 그 ‘원리’를 주고받는 길이 열리면, 당연히 어느 한쪽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다.
많은 경우, 인간의 육체가, 육체를 구성하는 ‘원리’가 왜곡돼,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린다. 당연히 이단은 사망.
반대로 이 부담을 기계에 돌리면 이단의 육체가 붕괴하는 일은 막을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돌리냐는 것이다.
당연히 실험이 필요했을 테고, 처음부터 완벽한 기술은 없을 테니, 사망자가 나왔겠지.
“그렇다면 여기에 시체보관시설이 있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리안이 그렇게 말하자, 배영훈이 덧붙였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요인입니다만, 이 시설에서는 다른 연구도 행해진 모양입니다. 세계대전의 경험 덕분에, 이단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무리하면 그런 죽음에 이르는지는 자료가 충분합니다. 따라서 이단이 실험 중 사망에 이르는 일은, 사고가 아닌 이상 잘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리안은 이 회사원 같은 장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심부름꾼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똑똑한 것 같다. 하긴 그러니 허동주 편이 아니라 리안의 편에 잘 섰겠지만.
다른 마음만 품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출세를 보장해주는 게 좋겠군.
“그렇다면, 소령. 그 시체보관시설은 실험 중 사망한 ‘이단’만을 위한 게 아니다?”
“예. 저는 여기서 발생한 사망자의 대부분은 이단이 아니라 ‘일반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반인은 ‘민간인’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이단이 아닌 다른 모든 인간이라고 봐야겠지. 리안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일리가 있군. 다만, 배영훈 소령도 그 ‘일반인’들이 사망한 실험의 구체적 내용까지는 모르겠지?”
“그렇기는 합니다만, 짐작되는 건 몇 가지 있습니다.”
“말해보도록.”
“인위적으로 이단을 만들어내는 실험입니다.”
효윤과 견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긴, 견하가 아직 ‘일반인’이고, 하얀 괴물의 습격을 받아 쓰러졌을 때, 대충 그 사정은 들었을 것이다. 배영훈 소령 정도의 위치면 오가는 소문도 얻어들을 수 있었겠지.
긴장한 얼굴로, 배영훈은 덧붙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견된 괴물이, 그 실험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리안은 대답 없이 서류를 뒤적였다. 그러면서 견하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견하는 고개를 숙였다.
배영훈 소령의 말대로, 그 괴물이 견하를 공격한 ‘하얀 괴물’과 같거나 비슷한 것이라면, 그 괴물을 통한 ‘이단의 양산’ 역시 가능은 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단을 죽였을 때 나타나는 ‘하얀 괴물’. 그것과 접촉한 일반인은 ‘이단’이 된다. 루우와 안세규의 말은 그랬다.
문제는 ‘그렇다면 애초에 그 괴물은 어디에서 오는가’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설에서 볼 ‘괴물의 시체’는, 그 문제의 답이 되거나, 못해도 실마리는 되겠지.
그다음으로 또 고려해야 할 일은, 이 정도까지 진상에 접근한 배영훈의 처분이다.
제거할 것인가, 아니면 그 충성심을 한 번 믿어봐야 할까.
생각을 정리한 다음, 입을 열었다.
“일단은 이 자료들의 사본을 만들고, 원본은 황성에 계신 폐하께 보내는 것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괴물’을 먼저 살펴보죠. 괴물에게 당했다는 시체들도 보고요.”
배영훈에 대한 판단은 괴물의 시체를 보고 난 다음으로 미루자. 견하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