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2)
견하는 리안의 작은 발가락들이 물의 차가움에, 그리고 바닥의 돌들을 디딜 때 힘을 주느라 움츠러드는 걸 봤다.
귀엽다고 생각하며 다시 리안의 얼굴을 본다.
딱 그녀 나이대답게 휴가를 즐기는 소녀의 모습에, 자신도 미소를 짓게 된다.
“시원하다.”
효윤이 그렇게 말하자 견하도 끄덕였다.
9월, 여름의 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그래도 여름의 끝자락은 여전히 이 고장에 남아 있었다. 그런 열기를, 계곡의 바람과 물이 씻어낸다.
쿡.
효윤이 왜 그렇게 웃나 생각하기도 전에 물이 먼저 견하의 얼굴을 덮쳤다.
엇, 하는 견하의 뒤로 리안도 꺅, 하는 소리를 낸다.
눈가의 물을 거칠게 씻어내고 견하도 웃으며 반격에 나선다.
효윤은 순식간에 물에 쫄딱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긴다.
티셔츠의 소매를 어깨 위로 말아 올린다. 물에 젖은 티셔츠가 몸매를 드러내고, 짧은 바지 아래 하얀 다리 위를 구르는 물방울이 햇살에 반짝인다.
하지만 견하는 소녀가 성숙해가는 여자임을 확 느끼게 하는 그 광경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보다, 이 상황 자체가 따스해서, 즐거워서 웃었다.
모두가 웃는다.
힘들었던 일들은 잊어버리고.
물이 튀는 느낌, 장난스러움, 그리고 서로의 웃음소리. 그런 것에 간질간질한 기분이 되어서, 물 위로 넘어지고 옷과 머리칼이 엉망진창이 돼서도, 배가 아플 만큼 웃었다.
그래.
잠시라도, 잊는 거다.
피와 진흙, 먼지와 오물의 참호를.
정치와 권력, 음모와 술수, 험담과 찬양이 뒤덮은 수도를.
지금은 이렇게 즐거운 일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착각에 잠겨 있도록 하자.
***
구워 먹을 고기를 들고 오며, 효윤은 견하의 얼굴을 본다.
숯에 불을 피우려고 집중하고 있다. 저렇게…… 어딘가에 몰두하는 모습이 좋다. 진지하고, 항상 자신의 의무 혹은 일에 책임감을 가진 모습이.
그래, 이것으로 좋지 않은가.
정말 오랜만에 생긴 여유.
진짜 가족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이렇게 추억을 쌓는다. 추억이 쌓일 것이라는 예감만으로도, 그리고 웃음과 시시콜콜한 잡담이 오가는 이 따스한 분위기만으로도.
효윤은, 충족감을 느꼈다.
“고기는 어젯밤부터 양념에 재워뒀으니까, 지금 구우면 맛있을 거야.”
견하가 석쇠 위에 고기를 올린다. 고기가 익는 지글거리는 소리. 그리고 양념과 구이의 맛있는 냄새.
집게로 고기를 들고 뒤집는 소년. 가위로 자르는 소년. 적당한 크기로 잘린 고기를 굴리며 굽는 소년.
소년의 손, 손목, 팔, 팔꿈치를 본다. 이번 산동 원정 때 좀 탔나? 탄 피부 아래, 적당한 근육이 움직이는 게 눈길을 끈다.
집게로 집은 고기를, 눈으로 익은 정도를 확인하고, 소년은 입에 넣는다. 우물우물 씹어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소년은 하나 더 집어서 효윤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살짝 놀라긴 했지만, 효윤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고기를 받아먹었다.
맛있다. 양념, 육즙이. 신선한 고기를 가져온 데다 잘 구웠는지 누린내도 나지 않고. 불맛이 골고루 잘 배었다.
이번에는 리안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는 소년을 보며, 리안은 다시 충족감을 느낀다.
평화롭다.
그래.
잘생긴, 언니의 남자친구를 보는 느낌.
이 느낌을 지켜나가자.
유사가족이 진짜 가족이 되는 거다.
그렇다면 좀 더 시간이 지났을 때,
사춘기의 콩닥거림으로, 그런 추억으로 꺼내 볼 수 있겠지.
***
재연은 어슴푸레한 빛에 눈을 떴다. 정말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친구는 휴가를 갔다. 그래서 아무런 지위가 없는 재연 역시 자연스레 휴가를 맞게 됐다.
침대 위에 앉은 채로 커튼을 살짝 걷었다. 이미 한낮이다.
햇살을 받으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걸까.
허동주, 문하시중 각하가 전사하고, 모두가 혼란에 빠졌을 때. 자신도 허겁지겁 짐을 챙겨 평양을 빠져나왔다.
지도부를 따라, 군식구처럼 딸려서, 남부 전선의 후퇴에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겨우 전선이 좀 안정됐다 싶었을 때, 남부전선 사령부로 산동 총독 신수덕의 연락이 왔다.
허동주의 뒤를 이어 자신이 총지휘를 맡겠다는 내용으로.
그렇게 노선 갈등이 폭발했다.
처음에는 신수덕을 따르겠다는 자들과, 신수덕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자들 사이의 싸움이었다. 신수덕은 삼한반도 남부 전선의 의향은 듣지 않고 추가적인 명령을 보냈다.
남부 전선은 즉시 지하조직화 하여, 게릴라전에 돌입할 것.
학살과 파괴 등, 수단을 가리지 말고 미리안 정권을 뒤흔들 것.
이 명령으로 인해 허동주의 유지를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상의 문제로 발전했다.
신수덕을 따르는 자들은, 한편으로는 허동주에 대한 복수를 내세웠고, 또 한편으로는 ‘황제’가 자신들을 ‘역적’으로 규정한 마당에 극단적인 투쟁 방법만이 남았을 뿐이라 말했다.
신수덕을 거부한 자들은, 아무리 그래도 ‘고려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웠던 허동주의 의지를 배신할 수는 없다 말했다.
무장한 적을 죽이는 건 불가피하다. 타민족의 침략을 받는다면 죽여야 한다. 그러나 같은 민족의, 비무장 민간인을 죽이는 건 그저 동족상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수덕 반대파는 신수덕에 대항할만한 구심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즉, 조직화하지 못했다.
때문에 이들은 하나둘, 그저 남부 전선 사령부를 떠나 어딘가로 모습을 감추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재연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뭐가 달라졌을까.”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여기 이렇게 무기력하게 누워, 어두워지면 잠들고, 한낮이 다 돼야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하는,
실패한 이론가가 하나 있을 뿐이다.
어리석고 어리석었다. 고등학생치고는 똑똑하다는 칭찬에 우쭐해서, 자신의 길이 옳다고 믿고 날뛰었을 뿐이다.
민족의 분리니, 제국 내 민족 간 역할이니, 그저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조합해서 글로 써냈을 뿐.
실제로 가 본 전장은 글과 달랐고, 실제로 본 정치가들도 글과 달랐고, 그의 이상도 글과 달랐다.
처음에는 견하의 여자친구인 줄 알았던, 그 몽골계 소녀가 ‘황제’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앞에 세웠을 때, 재연의 세계는 무너졌다.
***
루우는 귀국 후, 재연에게 알현의 기회를 줬다.
“정말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는, 어쩌면 있을지도 몰라.”
화려한 예복의 힘일까. 아니면 ‘황제’라는 자리의 힘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루우 자신의 기백일까. 재연은 소녀에게 압도됨을 느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에겐 아니지. 결국 힘, 즉 ‘권력’의 획득, 유지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야, ‘민족’은.”
황제는 옥좌에 비스듬히 기대듯 앉아, 왼손바닥을 재연 쪽으로 내밀었다.
“고려계 혈통이 많이 섞이긴 했어도 어쨌든 짐은 몽골인이지. 어떤가, 고려민족 제일주의자께서 보시는, 몽골인 황제는?”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대답을 명한다, 신참.”
물론 루우의 명령에 법적인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예법의 문제다.
“참람됨을 허락하신다면, 고하겠습니다.”
“허한다.”
“……제가 신봉하던 이론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재연은 땀이 볼을 넘어, 턱 끝에 맺히는 걸 느꼈다. 이 자리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가도, 언제 처형될지 알 수 없겠군.
“고려민족의 황제는, 고려인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속했던 ‘천손민족협회’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황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민족의 영도자’를 세워야 한다고.”
루우의 표정에 흥미롭다는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론은 폐기되거나 변하기 마련이지. ‘민족을 초월한 제국’, 제국 내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군림하는 황제에 대해, ‘새로운 이론’을 짜 봐라, 이론가.”
“저는…….”
“‘천명’으로는 안 된다. 그건 낡은 이론이지. 그렇게 애매한 ‘천명’은 누구나 대체하겠다고 나설 수 있다. 나도 공식적으로는 크리스트교도지만 ‘왕권신수설’ 같은 건 믿지 않아. 그러니 좀 더 현대적인 이론을 마련해봐.”
“예…….”
재연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 했다. 재연의 정수리를 유심히 지켜본 루우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아직 미련이 남았나? 그럼 그 미련을 끊기 위해 하나 좋은 걸 들려주지.
네 옛 사상적 버팀목, 허동주를 주살한 자는 다름 아닌 지금 너의 상관이다. 네 세계를 무너뜨린 자 앞에 잘도 나타났더구나.
그럼…… 옛 사상은 끊어내고 새 사상을 지어낼 각오도 되었겠지?”
재연의 회상은 거기서 끝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로 다 젖어버릴 때까지 울었던 모양이다.
양수영이었다.
소녀는 동경하던 소년의 머리칼을 쓸어주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재연은, 꼭 그녀에게 향하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물었다.
“우리는 왜……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런 건 생각하지 마. 목숨은 건졌잖아.”
“우리가 믿던 이상은 부서졌나?”
“…….”
아무 말 없이, 수영은 다시 재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마 견하의 유능한 부하인 유지나는 지금 그녀가 재연과 이러고 있는 걸, 파악하고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황제를 보고 왔어.”
“무슨 일로……?”
“나더러, 새로운 이론을, 사상을 만들래.”
이론과 사상. 그 정신적 가치를 믿었다. 물론 지금도 소중하다. 하지만 ‘권력’ 앞에, 그것은 편의상 붙였다 떼어내는 손쉬운 도구였다.
황제의 눈에 재연은,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이 아니라, 좋은 머리로 편리한 도구를 뚝딱 만들어내는 하인에 불과했다.
고통스러웠다.
가장 친했던 친구, 그가 멋있다고 생각했던 친구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사람을 죽였다.
고통스러웠다.
그 친구는 자신을 보며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고통스러웠다.
죽은 문하시중, 허동주에게도, 이론은 그저 도구에 불과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역시 고통스러울 뿐이다.
“……왜 황제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
힘없는 중얼거림에, 소녀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살아야 하니까.”
재연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소녀, 수영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방울이, 재연의 얼굴에 떨어졌다.
“살아남았고, 살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써야 해. 만들어야 해. 버팀목이 부서졌다면, 우리가 버팀목에 기대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라면, 버팀목을 새로 만들어야 해.”
소년은 일어섰다. 소녀, 사상적 동지, 그리고 지금은…….
그녀의 말대로였다.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그 무언가가 없어졌다고 해도, 그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버팀목이 되자.
수영은 벽으로 슬금슬금 밀려나며 소년의 아름다운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건 소년의 단순한 충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수영은 거기에 만족했다.
이것으로 슬픔을, 잠깐이나마 못 느끼게 되기를. 소년도, 그녀도.
수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곧 감미로움이 입술 위로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