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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84화 (84/541)

도산서원(1)

리안의 말대로, 내전은 끝나도 제국의 새 체제가 완전히 자리 잡은 건 아니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태사 미승휴의 강력한 의지로 국정이 좌우되는 체제였다. 그 허동주도 미승휴 밑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절이다.

국민이 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들이 의사를 모아 국정에 영향을 끼치는 체제가 확립된 지는 석 달을 겨우 넘겼을 뿐이다.

옛 체제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아직 많을 것이다. 따라서 언제든, 누구라도 이 체제를 뒤엎을 수 있다.

황제의 존재는 그런 상황을 억누르고, 정국을 안정시킨다.

근대 입헌군주제의 장점이다.

국민 모두를 신하로 삼는 권위가 있지만, 실제로 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황제는 ‘제안’이나 ‘권고’를 할 수 있을 뿐이라고, 그 권한이 명확히 제한된다. 태사부와 제국최고회의의 견제를 받는 것이다.

실질적 권력이 약하기에, 근대 입헌군주제에서는 군주의 자리를 노린 역모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위험을 감수할 만큼 이득이 크지 않다.

따라서 군주의 자리는 굳건해지고, 권력의 중심부에서 거리가 있으니 신비화된다.

그리고 신비화된 만큼 ‘권위’는 강력해진다.

그러니까, 실제 권력은 태사와 제국최고회의 의장을 겸한 리안이 훨씬 강력하지만, 그녀 역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루우의 ‘권위’에 따르는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군주’의 ‘신하’로서.

따라서 리안이 안동으로 휴가 겸 조사를 떠난 사이, 혹시라도 동명특별시에서 정변이 일어나도, 루우가 있는 한 리안이 몰락할 가능성은 없다.

정변을 일으킨 야심가도 어쨌든 황제 앞에선 신하를 자처해야 한다. 그런데 루우는 그자에게 황궁의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게 끝난다.

정변이 일어나더라도 며칠 이내에 그 야심가가 비참하게 죽으리라는 예측이 가능하기에, 리안은 이번 휴가를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약속을 잊지는 않았겠지, 타이시.”

“‘도산서원에서 얻는 모든 자료를 제공한다’, 잘 기억하고 있어.”

“자료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도 안동에 내려가서 직접 보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리안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됐다.

정말로 생각에 잠긴 건지, 아니면 황제와의 협상에서 호흡을 조절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으니 황제가 동명을 비우게 할 수는 없어. 게다가 이번 산동 친정(親征) 때문에 황궁을 너무 오래 비웠다고.

황제가 최전선에 서는 모습을 멋있다고 생각하는 국민도 있지만, 반대로 나라의 중심에서 무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도 적지 않아.”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약속을 파기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파기는 하지 않아. 타협안을 찾는 거지.”

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입수한 「쿠빌라이 문서」를 전부 넘길게. 일단 그걸로 참아줄 수 있겠어?”

루우는 찌푸린 눈썹을 풀었다. 괜찮은 제안이었다.

“잘 다녀와.”

***

“계집아이들이 황제니 태사니 하는 소꿉놀이라니, 나라 꼴이 참 잘 돌아가는구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안세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려국민당의 집행위원회가 모인 방. 이들은 내전의 종결을 축하하는 한편, 앞으로의 노선을 의논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공동의 적인 군국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제국입헌당과 그 정권에 협력해왔습니다만, 민주주의 원칙이 확립된 이상 우리는 야당으로서 기능해야 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발언했다. 안세규는 침묵을 지켰다.

“행정부의 수반인 태사가 입법부의 의장을 겸하고 있는 건 분명 기형적인 구조입니다. 아니 애초에, 제국최고회의가 과연 입법부인지, 아니면 과두정의 합의 기구인지 그 성격도 불분명합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를 내세웠지만, 여전히 개혁의 길은 멉니다.”

“2대 째부터는 의장과 태사를 겸직할 수 없게 해야겠죠.”

“경험이 부족한 어린 계집, 단지 백부를 잘 둔 덕분에 태사의 자리에 오른 그 계집의 통치를 내버려 두는 건 국민 전체를 우롱하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황제가 최전선에서 날뛰는 모습을 선전이랍시고 극장마다 상영하다니, 지금이 중세입니까?”

“황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철없이 돌아다닌다면, 과연 자격이 있다 하겠습니까?”

“애초에 열여섯, 아니 이제 생일이 지났으니 열일곱이겠군요. 어쨌든 그런 계집아이 하나를 데려다 황제로 만들고 국민들이 ‘오오 황제 폐하이시어, 돌아오셨나이까’하고 감동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희극입니다!”

“그 희극, 아까 어떤 분은 소꿉놀이라고 하시던데, 그런 우스꽝스러운 일에 어울려준다는 것 자체가 고려민국 임시정부를 만드신 선배들에 대한 배신이지요. 외무성 장관 나으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안세규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시계를 확인했다.

“뭐라도 말씀 좀 해보세요!”

누군가 책상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시간이 됐다.

군인들이 문을 발로 차며 들어왔다. 군홧발 소리가 방안에 시끄럽게 울렸다.

“당신들 뭐야!”

“‘계집아이’입니다만?”

군인들 사이로 한 소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지금까지 본 적은 없지만, 제복으로 추정되는 하얀 옷을 입고, 뒷짐을 지고.

유지나, 라고 했던가. 안세규는 생각했다. 지난번에 주견하 군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봤었는데, 단순한 비서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저 하얗고, 붉은색 선이 조금 들어간 제복은 ‘소년감찰국’의 새 제복인 모양이다.

“‘계집아이’라고 부르면서 조롱할 수 있는 건 저 정도가 한계일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보복을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당황하는 얼굴들이, 지나의 얼굴을 봤다가, 세규의 얼굴을 본다.

안세규는 계속 침묵을 지킨다.

“안 장관! 이건 대체……”

“당신 설마…… 동지들을 팔았나?”

안세규는 계속 침묵을 지킨다.

야 이 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등 분노에 찬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군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개머리판으로 조용하게 만들었다.

이후 축 늘어진 그들을 ‘절차대로’ 체포해서 방에서 나간다.

“고려국민당 내 반역자들에 관한 문제는, 이후 태사께서 엄하게 추궁하실 겁니다. 안세규 외무성 장관.”

그렇게 말하고 지나는 서류 몇 장을 세규에게 넘긴 뒤 방을 나갔다.

방에는 안세규와, 안세규가 ‘지목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남았다.

안세규는 서류를 살폈다. 안세규가 태사에게 보낸 ‘제안서’와, 태사의 ‘승인서’가 있었다.

유지나의 말은 어디까지나 형식으로, 태사가 안세규를 문책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변명의 여지 없는 추악한 유착이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현실 감각은 전혀 없이, 그저 공화정이라는 먼 목표만 바라고 언제라도 황제를 폐위할 수 있을 것처럼 날뛰는 무리. 그들은 고려국민당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다른 당에 공격할 빌미나 주고, 고려국민당의 인기를 떨어뜨리기나 할 뿐이다.

이상만 내세운 멍청이들, 발목이나 잡을 뿐인 무리는 필요 없다.

‘국가’는 민주주의 원칙을 내세워야 할지 몰라도, ‘당’은 민주주의 원칙을 향해 움직이는 군대다.

앞으로 제국입헌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등과 긴 투쟁을 이어가야 할 고려국민당에, 시대에 뒤떨어진 멍청이는 필요 없다.

리안은 안세규의 당 장악력이 강해지리라는 위험성은 인식하고 있겠지만, 태사와 황제의 통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게 우선이라 보고 이 계획을 승인했다.

서로 내줄 만한 것과 이득이 될 것을 계산하며 성사시킨 ‘거래’.

“주견하 국장에겐 한 번 인사하러 가야겠군.”

물론 주견하는 성의를 요구할 것이다.

안세규는 눈을 들어 방에 남은 사람들을 둘러본다. 이미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고, 두려워 떠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안세규가 남겨둘 만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이었다.

“자, 여러분, 당이 취할 앞으로의 노선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볼까요. 당의 미래를 위해.”

***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으로, 리안은 서류에 서명했다.

서명을 받으러 온 군인에게 서류를 넘겨준 뒤, 계곡물 앞에서 손짓하는 견하와 효윤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저 서명이 끼칠 영향을 되새김질한다.

큰 사건이 될 수 있다. 즉위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황제를 폐위하려는 음모……. 루우와 리안의 체제 안정을 위해, 그렇게 체제 자체를 부정하려는 세력은 일찌감치 짓밟아 놓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정도를 조절해야 한다. 이것은 고려국민당 집행부에서도 몇몇 인사들이 벌인 ‘개인적 일탈’이지, 고려국민당 자체의 의향은 아니라는 선으로.

여기서 안세규의 위치를 최대한 애매하게 조절할 필요가 있다.

안세규가 그들을 고발한 건 아니지만, 안세규에게 책임이 있는 건 아니며, 안세규도 역적들을 잡는 데 협조했다.

머리가 좀 굴러가는 인간들이라면, 이것이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함을 알아챌 것이다.

그래도 ‘균형’은 중요하다. 야당인 고려국민당의 존재를 ‘정권을 탈취할지도 모르는 경쟁자’로만 봐서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이들은 현 체제를 구성하는 소중한 부품이자, 국민이 품을지도 모를 불만과 현 정권 사이를 중재하는 ‘완충재’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고려국민당이 ‘현 체제를 인정할 때’에 한정된 이야기다. 만약 고려국민당이 지금의 체제를 부정한다면, 그때는 남김없이 쓸어버려야 한다.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혜롭게 대처하고 있다. 이들은 군주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일단 덮어두고, 노동자 권익 문제에만 집중하는 방법을 취했다.

때문에 리안도 노동자 문제에 대해서는 가능한 관용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번 내전에서 그들의 협력이 큰 역할을 했기도 하고.

계곡 근처에 오자 견하가 손을 내민다.

“발 디딜 때 조심해요.”

이럴 땐 조금은 공주님 기분을 내도 괜찮을까. 손을 견하의 손바닥 위에 살며시 얹었다.

차가운 계곡물이 샌들 안으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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