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려파(11)
재무장관 여준설은 말을 굉장히 아끼는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리안도 그의 말은 무겁게 여겼다. 그녀는 더 이야기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러 가지 지표를 종합해봤을 때, 아즈텍 연방의 경제가 당장 악화하리라 생각하긴 어렵습니다만…… 세계대전을 전후한 급속한 성장세는 상당히 둔화한 상태였습니다. 말하자면, 침체 주기로 접어들었다고 보셔도 될 듯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대비해야겠죠. 하지만 그게 지금 아즈텍 연방의 행동과 무슨 관련이 있죠?”
“경제 분야를 책임지는 장관이 하기에 부적절한 말인 건 압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아즈텍의 경제 상황은 생각보다 나쁘게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에는…… 우리 고려의 내전이 기름을 부었습니다.”
고려 역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 대국이고, 아즈텍 연방의 주요 무역 상대국이기도 하다.
그런 나라가 몇 개월이라고는 해도 정치적으로 무척 불안정했고, 국제 무역에서 이탈하다시피 했으니 아즈텍의 경제에 좋은 영향을 끼쳤을 리가 없다.
“아즈텍의 기습 침공이나 도발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즈텍이 경제 위기를 전쟁으로 돌파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이번 내전에 간섭할 여지를 탐색하는 게 아닌가, 그런 간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게 아닌가, 추정됩니다.”
리안의 눈썹이 뒤틀렸다.
눈썹은 소녀처럼 선이 곱지만, 그 표정만큼은 백부를 빼닮았다, 고 류성일은 생각했다.
“이 내전에 기여한 것도 없는 자들이 어딜 끼어든단 말입니까? 대사를 불러서 강력하게 항의해야겠군요.”
재무장관과 태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전쟁장관 강태훈이, 문득 의견을 내놓았다.
“재무장관께서 말씀하신 경제적 불안이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지금 연방 해군의 훈련, 과연 연방 정부의 통제를 받은 행동이긴 한지 의심스럽습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자세한 사정까지 아는 건 아닙니다만, 경제 문제가 내부 문제와 얽혀 오늘 같은 결과로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군부와 정부 사이의 갈등일 수도 있고, 군부 내부, 그러니까 육군과 해군 사이의 갈등일 수도 있고요.”
외무장관 안세규가 그 말에 끄덕이며 덧붙였다.
“아즈텍은 우리보다 더 심한 민족문제를 안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아즈텍계에, 서부의 일본계, 중부의 알곤킨계, 북부의 이로쿼이계, 동부 이주민 후손인 브리튼계, 프랑스계, 에스파냐계 등…….”
“경제가 악화되고 있다면 민족문제가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요.”
“그리고 그런 다민족으로 구성된 군대 역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겠죠.”
리안은 이마를 쓸었다. 그러고선 끄덕이며 안세규에게 시선을 보낸다.
“아즈텍 대사에겐 항의보다는 일단 사정을 듣도록 합시다. 본국의 치부를 얼마나 보여줄지는 모르겠지만, 단서 정도는 잡아볼 수 있겠죠.”
***
배영훈 소령은 도산서원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안동으로 향했다. 태사 미리안의 특명을 안고서.
“세상에…….”
지면에 드러난 전통 건축물들 아래, 근대적인 연구시설이 있다는 건 놀라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건, 온통 사람의 피로 칠해진 연구시설의 벽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군.”
아직 시설을 정리 중인 군인들 사이로 걸어가며, 배영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군화 아래 피가 찐득하게 묻어난다.
피가 격렬하게 튄 흔적으로 보아, 무척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피는 원래 연구소에 있던 사람들의 것이었을까.
이윽고 배영훈은 그가 목표로 한 곳에, 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섰다.
거기엔, 하얀 괴물의 사체가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총을 갈겨댄 건가 싶을 정도로 상처가 많다. 그리고 그건, 그만큼이나 쏴야 이 괴물을 저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겠지.
배영훈은 괴물의 역겨운 생김새를 자세히 관찰했다.
리안이나 루우, 효윤이나 견하가 있었다면 이 ‘하얀 괴물’이 자신들이 아는 괴물과는 생김새가 아주 다르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을 것이다.
일단, 지느러미와 사람의 팔, 혹은 다리가 뒤섞인 기형적인 사지가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탈……?”
총에 맞아 약간 부서지긴 했지만, 탈처럼 보이는 기관이 달려 있었다.
마치, 하회탈처럼 웃는 모양이다.
“정말 기괴하군…….”
고개를 들어 각종 유리와 관이 빼곡히 들어찬 시설 내부를 바라본다. 공포, 역겨움, 아니, 그 전에 넋이 나갈 듯한 광경에 헛웃음이 나온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이단’ 관련 연구를 하고 있었던 건가.”
***
또, 붉은 꿈을 꿨다.
얼핏 보기엔 견하가 기억하는, 일반적인 도시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높고 낮은 건물이 있고, 큰길과 골목도 있다.
하지만 눈앞의 세상은 붉다. 의식을 집중하자 건물과 도로의 표면이 들여다보인다.
살점, 내장, 혹은 점막이라 할만한 무언가로 뒤덮였다. 또 어떻게 보면 붉은 곰팡이나, 말라버린 붉은 나무줄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견하는 이 광경이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 잠에서 깰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이대로 의식을 꿈에 맡기기로 한다.
물의 부력에 몸을 맡기듯.
그러고 보니 이 꿈 안에서는 자신의 실체가 불확실하다.
어디에 있는지, 걷는지 나는지…… 시야는 생각하는 대로 이동하거나, 그의 생각과 다르게 일방적으로 제시된다.
그런 식으로, 갑자기 주변의 상황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눈이 머리통 사방에 달린 생물이라도 된 듯, 앞뒤 좌우 가릴 것 없이 한꺼번에 ‘시각 정보’가 입력된다.
‘하얀 괴물’이 일어서서 그의 주변을 기어 다닌다. 딱히 견하를 향해 고개를 돌리거나, 공격해오려고 하는 것 같진 않다.
보통의 하얀 괴물들 틈새로, ‘작은’ 하얀 괴물들이 좀 더 빠른 속도로 돌아다닌다.
이렇게 보면 붉은 세계의 주민들 같다.
그런데…… ‘고개’?
‘하얀 괴물’들에게 ‘얼굴’이 있었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했을 때,
꿈이 끝났다. 끊어진다는 느낌도 없는 자연스러운 중단.
대신 향기가, 의식 한편에서 하얀 공간을 만들며 비집고 들어온다.
***
소녀가 품에 얼굴을 묻고 콧소리를 내며, 코와 볼을 비빈다.
화들짝 놀랐지만, 그 놀람이 소녀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억누른다. 그리고 침착하게 장소에 대한 정보를 떠올린다.
소년감찰국 국장의 집무실 근처에 마련된, 국장 개인을 위한 작은 생활공간.
견하는 잠긴 목소리로 불렀다.
“언제 들어왔어요?”
“20분 됐을까.”
그렇게 말하곤 얼굴을 들어 소년을 바라보곤, 배시시 웃었다. 견하도 마주 웃는다.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어요. 오늘 제가 태사부로 보고하러 갈 생각이었는데.”
“귀국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선 참기 힘들었거든.”
피곤해도 샤워를 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땀에 전 몰골 그대로 누워버렸다면, 아마 리안은 이렇게 웃기보다는 코를 싸쥐었겠지.
“지금 나는 향기도 좋지만, 나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내 남자의 냄새도 맡고 싶었는걸. 아쉽게 됐네.”
“고약했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생사를 넘나들고, 많은 경험을 쌓고 돌아온 연인의 냄새는 감싸줄 수 있어.”
모성 본능 같은 걸까? 하면서 리안은 몸을 일으켰다.
편한 티셔츠 차림이다. 그녀와 견하 사이에 생긴 공간에, 체온을 담은 따스한 공기가 맴돈다.
“하의는 안 입었어.”
티셔츠 아래 다리, 그 안쪽을 상상하는 소년의 얼굴이 빨개진다. 리안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검지로 소년의 코를 살짝 눌렀다.
“위기 상황이지 않니?”
“너무 오래 계시면 사람들이 수군댈 거에요.”
“수군대라지. 어차피 그럴 일 없어도 수군댈 사람들은 수군댈 거야.”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리안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견하는 안도와 동시에, 살짝 아쉬움을 느꼈다.
“뭐, 이런 일은 좀 더 나중으로 미루자. 견하 군이 일단 고등학교는 졸업하기도 해야 하고, 나도 마음의 준비며 뭐며 필요하니까.”
몸을 빙글 돌리듯 움직인다. 헐렁한 티셔츠 아래가 살짝 보일 듯도 하다.
긴 머리칼이 커튼처럼 너울거린다.
“게다가 오늘은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마침내 휴가를 갈 수 있게 됐단 말이지.”
***
정리된 남부 전선을 순시한다, 는 명목으로, 견하와 리안, 그리고 효윤은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안동.
‘도산서원’이 있는 곳이다.
일단은 휴가이기 때문에 리안도 효윤도 즐거운 얼굴로, 이따금 콧노래까지 부르며 짐을 챙겼다. 근처 경치 좋은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석쇠에 고기를 구워 먹을 계획도 짰다.
어마어마한 업무에서 잠시 눈을 돌리고 정신에 청량감을 불어넣는 것도,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 필요하긴 하다. 거의 의무나 다름없다.
몇 년이 걸렸을지 모를 그 내전을 수개월 만에 끝냈다. 그런 최고권력자가 이 정도 소박한 여유를 부린다 해도 탓할 수는 없겠지.
물론 아무리 놀러 가는 것이라 해도, ‘일’ 그 자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이번 휴가지가 ‘안동’으로 결정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배영훈 소령이 보내온 보고가 심상치 않았다.
“이거…… 아무리 봐도 그때 ‘그거’지?”
“네. 그렇네요. ‘하얀 괴물’. 주견하 네 의견은 어때?”
“나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봐도 그걸로 밖에는 안 보여.”
보고서에 첨부된 흑백사진을 돌려보면서 소년과 소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마지막으로 사진을 본 한 명의 소녀는 추가의견을 덧붙였다.
“완전히 같은 거라고 하긴 어렵겠어. 봐. 사지가 있잖아.”
황제의 의견에 나머지 세 사람은 다시 사진을 돌려보고, 각자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됐다.
“뒤틀리긴 했지만 ‘사지’라 불릴 만한 기관이긴 하네.”
“견하가 소환하는 ‘촉수’ 같은 건 아닐까요? 견하를 공격했던 것도 그런 촉수였잖아요.”
“보고서에 따르면 손가락이나 발가락 같은 형태도 보인다고 하니까 조금 다르지 않을까. 같은 거라고 해도…… 지금까지 ‘하얀 괴물’의 목격 사례에서 이런 건 없었지?”
리안이 루우에게 물었고, 루우는 긍정했다.
“그냥 커다랗고 매끈한 구조였지, 이렇게 관절과 근육 비슷한 뭔가를 갖춘 건 아니었어. 게다가……”
황제는 보고서를 몇 장 넘겨보면서, 사진과 대조했다.
“결정적으로 큰 차이가 두 가지 있어. 하나는 사라지지 않고 사체가 남아있다는 거야. 견하를 공격했고, 내가 베어냈던 놈은 곧바로 증발하듯 사라졌지. 둘째는, 바로 ‘얼굴’ 같은 기관이 있다는 건데…….”
루우는 사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배영훈이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덧붙인 것처럼, 부서진 ‘하회탈’과 흡사한 형태였다. 정말 이 괴물의 얼굴일까, 아니면 우연히 그런 형태를 한 기관이 달린 것일까.
네 사람이 한참 머리를 맞대며 고민하다가, 태사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직접 가서 보기 전에는 결론을 못 내리겠네.”
이에 따라 네 사람 중 세 사람이 안동으로 휴가를 겸해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어째서 짐은 황성에 남아야 하지.”
루우는 불만에 찬 얼굴로, 굳이 1인칭을 ‘짐’으로 쓰면서, 그렇게 말했다.
“태사만 수영복을 준비한 건 아니야. 나도 굉장히 귀여운 수영복을 준비했다고.”
리안은 이 말에 직접 대응하지 않고 헛기침만 했다.
살짝 빨개진 얼굴을 진정시킨 후, 리안은 합리적인 이유를 내밀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내전이 끝났다 해도 정국이 안정된 건 아니니까, 황제가 수도에 남아서 균형을 잡아 줘야지.”
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