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82화 (82/541)

친려파(10)

루우의 뒤에는 한재연만 얌전한 얼굴로 서 있었다.

견하는 지금 ‘발해도’의 새로운 관리들에 대한 문제로 이 자리에 없다.

루우는 손을 까닥여 한재연을 불렀다. 귓속말을 듣기 위해 재연이 허리를 숙인다.

“신수덕은 치밀한 인물인가?”

“저도 말로만 들어서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치밀하기로는 허동주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알겠다고 다시 손짓해 재연을 물린다.

루우는 재연이 ‘허동주’를 부르는 호칭에 쓰게 웃으면서, 동시에 신수덕의 탈출 방법을 생각했다. 지하 갱도의 가능성은 작다. 그렇다면…….

4개국 중 누군가 신수덕과 내통하고, 그를 빼돌렸다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는다. 동맹 사이에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다.

게다가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이다. 확실해지려면…… 본국의 첩보 기관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 권한은 태사 미리안이 쥐고 있다.

황제가 직접 첩보 기관을 쓰려면 어쨌든 본국의 태사에게 동의를 구해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고려군 장성들도 마찬가지다. ‘권고’는 할 수 있지만, 루우에게 직접적인 지휘권은 없다.

황제의 초월성을 생각해 군 계급을 부여하지 않는다니, 재미있는 명분이다.

리안은 아직 자신의 ‘대원수’ 계급을 황제에게 내줄 생각이 없는 듯하다.

어쩌겠는가. 이것이 자신이 황제가 되려면 동의했어야 하는 조건, 신생 입헌군주국 ‘고려 제3제국’의 체제인 것을.

다시 정치다. 장기적인 안목이 요구된다. 미리안과 타협하고 각종 세력과 제휴해야 한다. 견하의 소년감찰국은 아직 미숙하고 약하다.

‘본국에 돌아가면 타이시와 긴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루우는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꼬았다.

***

고려령 산동 총독부 소재지인 치청의 함락.

동명특별시의 태사부와 제국최고회의는 내전이 드디어 끝났다는 기쁨을 만끽할 틈도 없이, 그 뒷수습에 몰두했다.

유지나가 선별하고 미리안이 승인한 발해도의 새 행정 관리들이 산동으로 출발했다. 치청 함락 후 반란군에 가담했던 해군도 항복했고, 삼한반도 남부에서도 항복 소식이 줄줄이 들려온다.

“끝까지 저항하는 적 때문에 산발적인 전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만, 통일된 지휘체계를 갖춘 건 아닙니다. 곧 하나씩 격파될 것으로 보입니다. 공식적으로 내전 종료를 선언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전쟁성 장관 강태훈의 보고에 리안은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일단은 황제 폐하의 귀국을 준비합시다. 황제께서 직접 전선에 나서서 거둔 승리를 선전하고, 귀국이 개선식 같은 느낌을 주도록 환영 행사를 꾸며보는 것도 좋겠죠. 내전 종료는 제가 폐하께 보고하는 방식으로 하고요.”

처리해야 할 문제는 그것 말고도 많았다. 동원령 해제, 징발과 배급제 중지, 새로운 국경, 산동 내 몽골과 고려의 공동통치구역 문제 등등…….

무엇보다도 약속했던 것들을 지켜야 한다. 바로 ‘극북’ 지역 문제였다.

‘극북’에는 세계대전 이후, 주도권 다툼에서 숙청된 고려민국 임시정부 부대나 그 가족이 유배된 곳이다. 그 외에도 정치범들을 가둔 수용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군인들도 거기서 복무하다 자식에게 직업을 물려 줘야 했다.

이젠 그런 억압 정책을 폐지해야 한다. 주민들은 자유롭게 남쪽의 본토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극북방위군도 원하는 자들은 전역이나 근무 지역 변경을 보장해줘야 했다.

물론 주민들도 지난 19년간 쌓아온 삶의 터전이 있으니, 몇몇은 자기 고장에 남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군인들은 대다수가 그 지역을 떠날 것이라 예상된다.

포로로 잡은 반란군 출신들을 극북에 박아버리는 방안도 검토해봤지만, 미래를 위해선 좋지 않다.

결국 그들도 불만이 쌓일 것이고, 누군가, 오늘날 미리안이 그런 것처럼 그들의 불만을 이용하면 내전이 재발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두 배, 혹은 그 이상의 급료를 내세워서 지원자를 모집하는 방향으로 가야겠네요.”

“그것만으로는 쉽게 모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극북 지역, 주둔지 부근 도시들의 기반시설에 대대적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도로, 상업, 교육 등 생활 여건이 개선돼야, 그다음으로 급료를 보고 움직이겠죠.”

전역 희망자들을 위한 지원책도 마련해야 했다. 취업 알선, 연금, 처리해야 할 문제는 생각이 꼬리를 무는 만큼 계속 튀어나왔다.

“그래도 일단 큰일은 끝이군요.”

리안의 말에 류성일이 안도하듯 웃었다.

“잠깐 휴가를 다녀오시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폐하와 주견하 국장이 귀국하면 한 번 나들이 정도는 나가 볼 생각이에요.”

류성일은 미소지으며 끄덕였다.

잠깐이지만 리안은, 만약 견하를 남자친구라고 백부님에게 소개했다면 그분도 저런 표정을 지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

느긋하게 일을 처리하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새로운 사건과 보고가 또다시 쏟아졌다.

“극북 캄차달 연해에서 아즈텍 연방 해군의 훈련? 이건 또 무슨…….”

경우냐고 말하려다, 리안은 말을 삼켰다.

어쨌든 지난 세계대전 이래 우방국이다. 적성국의 도발처럼 반응할 수는 없다.

“안세규 장관이나 강태훈 장관은 아즈텍 측으로부터 뭔가 통보받은 건 없습니까?”

안세규는 고개를 저었고, 강태훈만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훈련 시작 직전에 통보를 받긴 했습니다만, 이런 경우는 이례적이라…….”

강태훈의 말을 들으며 리안은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쏘아본다. 고려령 극북, 캄차달 반도의 동쪽으로 섬들이 이어지고, 그 끝에 아즈텍령 알래스카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광대한 알래스카는 그 서쪽, 고려령 추크치와 다시 한번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

고려 제3제국이 아무리 재정적으로 부담을 지더라도, 극북 방위군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협만 건너면, 바로 세계 제1위의 초강대국, 아즈텍 연방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방이라 해도 기본적인 경계는 할 수밖에.

이는 고려가 극북 영토를 개척한 이래, 아즈텍 연방의 국력이 성장하면서 꽤 오랫동안 중요한 안보 문제였다.

원래 고려나 몽골의 주된 관심사는 각각 자기네 ‘본토’였지, 북방의 얼어붙은 땅은 아니었다. 물론 이 지역에 사는 부족들과 조공 형태로 무역을 하기도 했지만, 큰 규모도 아니었고, 그저 북쪽 변방의 안정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랬던 상황이, 루스인 탐험가들의 등장과 함께 바뀌었다.

콘스탄티누폴리의 로마 제국은, 투르크인들로부터 아나톨리아를 탈환해, 위기의 시대를 벗어났다. 티무르가 오스만 왕조를 몰살한 뒤 투르크인들이 와해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로마 제국의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이후 뛰어난 군주들을 연이어 배출, 불가리아, 세르비아, 알바니아를 재정복하며 동방 정교회권 수장의 위치를 다시 세웠다.

그런 로마인들이 주목한 것은 같은 정교회권인 동유럽, 그중에서도 루스계 공국들이었다.

로마인들은 신장한 국력을 바탕으로 루스인들이 주치 울루스로부터 독립하도록 도왔다. 루스계 공국들이 몽골인들을 몰아내자, 이번에는 루스인들의 통일을 방해하며 각 공국을 로마 제국에 경제적, 정치적 속국으로 만들어나갔다.

루스인들은 예속을 벗어나기 위해 동방 탐험을 시작했다.

그들은 비록 춥긴 해도, 동방의 광활한 대지에서 얻을 수 있는 각종 광물, 모피, 그리고 농사지을 땅에 대한 욕망으로 계속 나아갔다.

어떤 이들은 가족까지 데리고 가서 마을을 세웠으며, 그 마을들은 원주민들과 제휴하여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본국까지 이어지는 무역로를 개척했다.

로마 제국의 압력을 받은 각 공국 정부가 이런 이주를 금지하긴 했지만, 탐험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극북 지역의 이런 상황에 대해 남쪽 몽골계 국가들은 위기감을 품었다. 그때는 이미 루스인 탐험가들이 고려의 영토 북쪽까지 이른 뒤였다.

북방에 거대한 루스인의 왕국이 건설되면 몽골계 국가들은 남북으로 국경 방어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카간 울루스, 즉 몽골은 카자흐 및 카잔과 연계해 루스인의 동방 진출을 막아서는 한편, 극북 지역의 영토화를 서둘렀다.

이에 따라 극북의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있던 원주민 부족들, 루스인 마을들에 남쪽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이들은 원주민들에게 지금까지 해왔던 형식적 조공이 아니라, 자기네 나라의 정식 국민이 되라고 요구했다. 원주민들은 큰 저항 없이 이를 받아들였으나, 루스인들은 심하게 저항했다.

루스계 공국들은 자국민의 정착촌이 공격받자 강하게 반발하며 적극적인 동방 영토 확장 정책을 펴려 했다. 그러나 그 정책은, 속국인 루스계 공국들의 독립을 원치 않던 로마 제국의 방해로 무산됐다.

로마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누폴리를 중심으로, 지중해와 흑해 무역을 장악하고, 돈 강과 볼가 강 유역의 상업까지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루스인들이 로마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무역로를 찾는 것은, 로마인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본의 아니게 몽골계 국가들의 북방 진출도 돕게 된다.

로마의 압력으로 루스계 공국들이 주춤한 사이, 몽골계 울루스들은 극북 지역을 장악했다.

카잔 칸국은 북쪽과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 우랄산맥을 중심으로 루스인들의 일차적인 장벽이 됐다.

카자흐 칸국은 그 동쪽, 자기네 본토에서 똑바로 북쪽으로 이어진 지역을 정복했다. 몽골도 마찬가지로 북방 지역을 정식으로 영토화했다.

고려도 이 대열에 동참했는데, 몽골이 고려의 북쪽으로 국경을 확장하고 태평양에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고려가 극북 지역에 에벤크, 캄차달, 추크치라는 특수 행정구역 설치를 완료할 무렵, 아즈텍의 탐사선이 처음으로 고려의 연안 지역에서 목격됐다.

아즈텍 연방 역시 대륙 서쪽 해안 탐사와 알래스카의 영토화 작업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초강대국과 국경을 마주한다는 불안 때문에, 그리고 극북의 척박한 환경과 낮은 인구로 인해, 고려는 극북 지역을 본토처럼 성(省)으로 편성하지 않고 특수 행정구역으로 뒀다.

“이번에 도(道) 행정구역 개편을 진행하더라도 극북 지역은 그대로 두는 게 좋겠군요. 극북방위군 문제와는 별개로 말이에요.”

류성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별로 의견을 내는 일이 없던 재무장관 여준설이, 지도에서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억측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번 아즈텍의 돌발행동이 그들의 경제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