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려파(8)
병사들 눈에는 지옥까지 찾아온 천사처럼 보일까.
소녀가 총을 든 적들을 언월도로 베어내고, ‘누구지?’라는 물음에 ‘황제다’라고 대답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함에 넋을 잃는 병사도 있고,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는 병사도 있다.
“전쟁은 상상했던 것처럼 끔찍하면서도,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네.”
견하 옆으로 걸어온 루우는 그렇게 감상을 말했다.
“안전한 곳도 있는데, 꼭 최전선까지 나가야 했습니까.”
이단이 아니어서인지, 유난히 흙투성이가 된 재연이 그렇게 불평했다.
“신문이 아니라 눈으로 직접 보여줘야 효과가 크지.”
그리고 황제의 활약상을 직접 목격한 병사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고, 그 소문이 점차 커져, 마침내 전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전선이라는 게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체험해본 건 큰 공부가 됐어.”
앞으로 군사 관련 논의에 참여할 때, 현실성 없는 전략이나, 병사들의 목숨 따윈 나 몰라라 하는 전략을 내놓는 짓은 하지 않겠지. 루우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렇게 따지면, 견하도 배운 바가 많다. 물론 중앙에서 전체 전선을 조망하는 안목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직접 전장의 피비린내를 아는 것도 필요하다.
어느 것이든 적절한 균형이 좋은 것이다.
“그래도 여러 사람한테 폐를 끼쳤어.”
이단이니까 따로 경호할 장교는 필요 없다, 이미 대령 계급을 달고 있는 다른 이단이 경호를 맡고 있다, 그런 논리로 극북방위군의 조유관 대장은 사령부에 박아놓았다.
조유관이야 루우를 사령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도 따라나서겠다고 억지를 쓴 것이지만, 어쨌든, 루우를 말리는 데는 실패했다.
몽골군은 루우가 최전선에 나섰다는 소식에 다소 무리하게 군을 전진시켰다. 덕분에 전선이 두텁게 보강되긴 했지만, 고려군 사령부와 살짝 혼선을 빚었다는 게 문제다.
“알아. 더 머물렀다간, 여기 사람들 ‘황제 폐하를 보호’ 한답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자기 일도 못 하게 된다는 거. 살펴볼 건 대충 다 살펴봤고, 적의 공세도 막았으니 돌아가 볼까.”
루우는 그렇게 말하며 후방으로 연결된 참호 쪽으로 걸어간다. 견하는 재연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재연은 지친 기색을 숨기진 못했지만, 어쨌든 웃었다.
같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 잠깐 떠올랐지만, 미처 안타까움도 주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견하는 하늘을 봤다.
항공우세를 점한 건 불행 중 다행일까.
안 그래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곳인데, 머리 위에서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놓거나 불태우는 기계들이 돌아다니면 전선은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정 반대 처지인 적은 무너진다.
서부군은 반란군 중 가장 정예답게 최후의 발악으로 방금 공세를 시도했지만, 어쨌든 연합군은 공세를 막아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적은 소모되고 있다.
견하는 그다음 절차를 준비해야 했다.
***
수용소에 갇혀 있던 한족들을 구출해내긴 했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질병, 영양실조, 각종 정신질환, 부상 등등.
상당수가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수감 당시의 명부와 생존자의 숫자가 크게 차이 나는 곳도 있었다.
심지어 연합군이 진격해오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한족을 죽이려고 급하게 총을 갈겨댄 곳도 있었다. 이런 악질들은 그 자리에서 사살해야 했다.
수용소가 해방된 뒤, 구출된 사람들을 급하게 야전병원으로 옮겼다. 굶주리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소화하기 어려운 음식을 주면 탈이 날 수 있다는 군의관의 의견에 따라, 물과 죽 위주의 음식이 제공됐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자, 수용소를 관리하다 항복한 병력의 처우 문제가 4개국 연합군 사령부의 안건으로 떠올랐다.
“차라리 제대로 한족의 수를 줄이기라도 했다면 깔끔했으련만…….”
누군가가 그렇게 푸념한다. 반윤리적인 발언이었지만, 사령부 내의 공기가 험악해질 것을 염려해 아무도 저지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심 그 말에 동의하는 자도 있다.
악(惡) 그 자체, 라고 단언할 수 있지만, 당장 통치를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선악은 현실과 동떨어진 문제다. 물론 많은 경우, 윤리적인 편이 통치상 이익도 크다.
그러나 통치에 방해가 된다면 윤리는 가차 없이 버려야 할, 악덕이 된다.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한 한족 주민의 수는 절대 적지 않았지만, 독립의 열망을 좌절시킬 만큼 엄청난 숫자도 아니었다. 반란군은 그냥 벌집만 들쑤셔놓았을 뿐이다.
지금 당장은 공포에 떨며, 살아남은 것에 안도하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란군의 학살을 두고두고 되씹을 것이다. 이 증오가 사라지는 데 얼마나 걸릴까?
수십 년은 현실성 없는 전망이다. 백 년 단위로 생각해야 한다.
신수덕과 그의 반란군은 시간도 능력도 물론 부족했지만, 한족을 절멸할 생각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고려와 주변국을 곤란하게 만들 속셈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승리 자체는 확실하다. 하지만 서부군의 반격이 만만치 않아, 4개국 연합군도 출혈이 꽤 있었다.
그렇다면 새로 얻을 영토는 이 출혈을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어야 하는데, 통치자들에게 극도로 반감만 품은 땅이라면,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견하는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냉혹하다, 인간미가 없다, 비도덕적이다, 그런 생각은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책은 적다. 모르는 게 아닌데, 감각이 무디다.
전에는 아프게, 안타깝게 느꼈던 것 같은데.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자리를 피할 만큼.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있고, 머릿속으로는 더 앞서나간 구상까지 떠올린다.
‘이단’이 된 이후로…… 아니 환도시 전투 이후로 좀 심해지는 것 같다.
지나가 말했던 대로 극심한 전투 후 정신적인 피로가 누적되어서일까.
“반란군 포로, 그중에서도 수용소를 관리하던 포로들은 한족들에게 넘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누군가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게 하면 일단 끓어오른 불만의 분풀이는 될 겁니다. 그들이 포로들의 생살을 씹어먹든, 자기네 재판에 부친 뒤 교수대에 매달든, 그들에게 맡기는 거죠. 한 번 그렇게 광기를 분출하고 나면, 막상 우리들의 통치가 시작될 땐 기세가 꺾여 있을 겁니다.”
견하와 재연은, 루우의 뒤에 시립하고 있다. 견하는 흘끔 재연의 얼굴을 본다.
재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살아남기 위해, 신수덕 측과의 노선 갈등으로 여기에 참가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고려민족 제일주의자다.
그런 그에게, 동포를 한족들 손에 넘긴다는 말이 좋게 들릴 리 없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재연이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는 틀린 편에 섰었고, 지금 느끼는 괴로움은 그 선택의 대가일 뿐이다.
“저도 제 측근 중 민족문제의 전문가가 있어서 의견을 좀 들어봤습니다만,”
루우가 입을 열었다. 고려군 장성들은 황제의 말에 일단 예를 갖췄고, 타국의 장성들도 외국 군주에 대한 경의를 보였다.
“한 번 지배민족을 사냥해볼 수 있게 된 피지배 민족이 앞으로도 계속 복종할지 의문이라더군요.”
견하는 조금 놀랐다. 견하가 모르는 사이에 재연이 부탁을 했거나, 루우가 재연에게 조언을 구했던 걸까?
“괜히 쓸데없는 자신감만 불어넣어 주지 않을까요. ‘우리는 고려인도, 몽골인도 물리칠 수 있다. 우리 힘으로’. 차라리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이 과정과 결과를 저들에게 보여주는 게 나을 겁니다.
우리는 나름 공평한 지배자이며, 우리의 통치 시스템은 건재하다는 걸 알리는 거죠.”
군인들은 별다른 이의 없이 끄덕였다. 그들은 곧바로 다음 논의에 착수했다.
돌파한 구멍을 넓히고, 더 많은 부대를 투입해 적을 포위, 완전히 섬멸하는 정석적인 전술. 그리고 그 와중에 더 늘어날 포로의 수용 방법, 이후 신수덕이 농성할 치청의 공략 방안.
논의가 마무리될 즈음, 루우는 뒤의 두 소년에게 ‘나가자’고 말했다.
황제와 그 경호를 맡은 대령의 방으로 걸어간다.
루우는 재연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툭 말을 던졌다.
“네 기분을 생각해서 꺼낸 이야기는 아니야, 신입.”
재연이 당황해 우물쭈물하는 사이 루우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하지만 덕을 봤으면 감사하게 생각은 해야지.”
“……감사합니다.”
“도저히 덮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녀석들은 죽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내전이 끝나면 내 백성이 될 사람들이니까 살려보려는 거야. 장교든, 병사든, 어쨌든 귀중한 ‘인력’이지.”
그렇게 말하곤 돌아본다.
“가 봐. 견하는 따라오고.”
재연은 인사하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견하는 루우의 방까지 따라갔다.
전장 근처 마을의 큰 저택을 몇 개 징발해 사령부나 고위 장교들의 막사로 쓰고 있는 것이라, 방이 모자랐다.
“견하 네 속셈이 뭔진 모르지만,”
방에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루우는 말했다. 전처럼 견하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기 때문에 견하는 눈을 돌려야 했다.
“철저하게 길들이는 편이 좋을 거야. 필요하면 사상적인 재교육도 해야 하고.”
루우는 재연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신수덕보다 억제되었다 뿐이지 본질은 다르지 않아. 저렇게 여리여리한 미소년이 이 전쟁터 끝까지 따라온다는 건 보통 독한 게 아니야.”
견하는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문제를 좀 생각하고 있긴 했어.”
짧은 반바지와 민소매로 갈아입은 소녀는 자기 침대에 걸터앉았다.
왼쪽 다리를 쭉 뻗어 발가락 끝으로 견하의 얼굴을 가리 킨다. 유혹하는 듯한 몸짓이었지만 눈은 조금도 웃지 않는다.
“생각? 어떤 생각인데? 일단 조직 규모를 불려놓을 때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을 말하는 건가?”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점에서는 미숙했다.
“저 애, 알고 있어?”
“뭘?”
“네가 허동주 죽인 거.”
“……모를 거야.”
“그럼 밝혀. 그래서 네가, 타이시 미리안이, 우리의 체제와 황제가 허동주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위대하다고 생각하면 복종할까?”
루우는 다리를 내렸다.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 모습이 의외로 소녀답고 귀엽다고 느꼈다.
“친구의 정 때문에 약해진 건가?”
아니면, 하고 루우는 일어섰다. 다가온다. 무심코 물러설 뻔 했다.
“본인 입으로 말하긴 싫은 걸까?”
코끝이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서, 속눈썹 너머,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소녀는 말했다.
“복종하지 않으면 죽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