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려파(6)
지나는 지도를 돌아보며, 발해도가 그려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여러분이 거부할 경우를 대비해 고려 제국 정부에서는 여러 대안을 준비했답니다. 발해도를 몽골 군정에 넘기는 것도 한 방법이죠.
몽골은 여러분의 저항이 거셀 경우 전부 죽인 다음, 그냥 신수덕의 범죄로 덮어씌울 속셈이고요.”
지나는 다시 독립운동가들 쪽으로 돌아서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그 외에도, 일단 여러분이 거부하든, 하지 않든 정부에서는 큼지막한 관직을 내려서 여러분을 귀국시킨다는 계획도 세웠답니다. 여러분이 가서 독립 여론을 모으고 테러단체를 지원하건 말건, 그건 여러분 자유에요.
하지만 우리는 여러분의 취임식을 화려하게 거행하고, 그걸 신문과 영상으로 담아 발해도 전역에 뿌릴 텐데, 잘 될진 모르겠네요. 아, 신문에는 여러분의 절절한 충성 맹세가 실릴 거에요. 여러분이 ‘실제로 그런 말을 했든 안 했든’.”
소녀는 그런 말을 하면서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발해도에 계신 한족들이 여러분을 민족반역자로 간주해서 암살하면, 우리는 새로운 누군가를 뽑아다 그 자리에 앉히면 그뿐이에요. 아니면 여러분의 암살을 구실로 더 악랄한 ‘진압 작전’을 시작해도 되겠고요.”
한족 독립운동가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지나는 웃었다. 겉으로도, 속으로도.
견하가 가끔 보여주는 섬뜩한 면모를 배워두길 정말 잘했다. 효과가 있다.
“그냥 제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조용히 부임지로 가.”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쳐다보거나, 망연자실하게 바닥만 내려다봤다.
저 유지나라는 소녀가 그들보다 특별히 뛰어나서 이렇게 된 건 아니었다. 제국의 힘이, 한 소녀가 민족의 지도자들을 농락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탓이다.
제국도 이판사판이다. 약한 자의 처절함도 무서운데, 강한 자의 처절함은 얼마나 무서운가.
한족 독립운동가들은 식은땀을 흘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효윤은 침대 안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까진 아니다, 그냥 호기심, 관심에 불과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가슴 한구석의 아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리안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서, 그냥 기분 탓인 거라고 여기며 효윤은 눈을 감았다.
‘설령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했어도.’
리안이 견하를 포기한다고 해서 견하가 저절로 효윤 쪽으로 넘어오는 건 아니다. 견하는 리안과 효윤이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하지만 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견하와 사귀는 모습을 보면서 네가 아픈 건 싫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효윤은 돌아누웠다.
나 때문에 리안이 견하를 포기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상상만으로도 아프다.
차라리 견하와 리안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지금 잠깐은 쓰릴지 몰라도 앞으로는 효윤도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다.
그래, 견하에 대한 건, 그냥 변덕이다. 잠깐 드는 기분. 견하 전에도 멋있다고 생각한 남자는 있었고, 견하도 마찬가지다.
그냥 간지러운 느낌이 들다가 곧 무감각해지고, 잊어버리겠지. 그리고 그냥 동료로 남는 거다.
효윤은 똑바로 누웠다. 눈을 뜬다. 태사부의 방 중 하나. 화려한 천장. 옆 방에선 리안이 잠들어 있겠지.
분명한 태도를 취하자.
오늘 리안을 향해 단언했듯이. 견하에 대한 마음은 그냥 호기심이라고.
***
같은 시각, 리안도 눈두덩 위에 손을 올린 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손등의 느낌에만 집중하며, 잡생각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쓴다.
효윤에 대해 생각한다. 그때 그 전용 열차 테러 이후, 혼자가 되었을 때부터, 그녀는 리안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믿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리안은 형제가 있다는 기분이 뭔지 잘 모른다. 그래서 효윤에게서 느끼는 막연한 유대감이, 형제애 비슷한 게 아닌가 짐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니 애착이 생겼다.
3년, 아닌가 4년 정도 전일까. 효윤이 처음 리안의 경호 겸 보좌로 소개됐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백부가 쓰러지고 나서는 허동주의 끄나풀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하지만 지금의 유대감으로 다시 생각해보니, 옛날 효윤이 했던 행동 하나하나가 애틋하게 느껴졌다.
“나는 연애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야.”
연애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이 아프건 말건 연인만 보고 헤죽거리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아니다.
연인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머리 아픈 일은 모른다고, 순진한 얼굴로 울먹이는 머저리도 아니다.
“지금 견하와 헤어진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눈물이 나온다.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다. 첫 연애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상상도 했다. 행복한 미래가 끝없이 펼쳐지리라는 환상에 잠긴 적도 있다.
환도시에서의 전투에서 견하가 실종되었을 때 그가 전사했다면, 그녀도 자결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 좋아한다. 이 감정이 사랑이라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감당해야 하는 인간이다. 감당할 수 있는가 아닌가 묻는 게 아니라,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자라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손짓, 눈짓, 말 한 번에 수많은 사람이 사지가 찢기는 고통을 당하고, 유족의 삶이 파괴되는 걸 알면서도 명령을 내리는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순 없다.
미리안은 태사다. 일국의 재상이며, 국민이 선출한 제국최고회의의 의장이다. 강대한 권력을 원한다면 그 권력이 주는 고통도 감내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주견하의 연인 미리안이기 전에,”
태사 미리안으로서의 의무를 먼저 받아들여야 해.
백부의 수기를 떠올린다.
발견하지 못했다면 좋았을걸. 발견했더라도, 그냥 잊어버리고 류성일을 불러 옛날 일을 묻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어쩌면, 효윤의 마음이 저절로 식기를 기다리며 모른 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발견한 ‘진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양심의 가책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안이 알아낸 ‘최효윤의 삶’은, 미승휴의 조카이자, 제국의 태사가 책임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른 누가 아니라고 해도, 리안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다.
***
리안은 효윤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백부가 ‘오늘부터 네 시중을 들 아이다’라며 데려왔을 때, 그저 받아들였다. 누구인지, 무엇을 하던 아이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3년. 자그마치 3년이다. 그 시간 동안 리안은 효윤을 병풍처럼 대했다.
그 3년을 병풍처럼 견뎌 온 효윤의 인내심도 참 대단하다.
리안이 효윤의 개인사에 관심을 두게 된 건, 내전이 일어난 이후였다. 그때도, 지금까지도, 리안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효윤과 견하 뿐이니까.
그래서 기록을 뒤졌다. 다행히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 몇 가지 기록과, 백부의 수기를 찾을 수 있었다.
옛 태사부 건물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었겠지만, 남은 자료들만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대체 이 아이는…….”
남은 기록을 종합했을 때 나온 결론을, 처음엔 받아들이지 못했다. 리안은 당시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을 남자, 류성일을 불렀다.
“알고 있는 것, 전부 말씀해주세요.”
류성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기억을 너무 많이 짊어진, 노인의 숙명을 한탄하는 듯했다.
감춰뒀던 과거가 눈앞에 나타나, 진실을 토해내라 한다.
이십여 년을 멀리 돌아왔지만 끝내 피할 수 없었다.
“태평천국이 고려와 우호적이었던 시절도 있지요.”
리안은 재촉하지 않았다. 과거를 훑는 류성일의 눈길이 리안의 어깨 언저리를 맴돌았다.
“장교들…… 좀 더 고풍스러운 말로 ‘무관’이라 불리는 이들은 타국에 유학을 떠나기도 합니다. 유학을 통해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기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타국의 장교들과 교류하며 우정과 인맥을 쌓고, 더 나아가 양국의 우호 증진에 기여하기도 합니다.”
최효윤 중장의 아버지는 태평천국의 장교였습니다, 라고 류성일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성실하고, 반듯한 사람이라고 했다. 대쪽같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곧았는지, 고려 측 장교들은 ‘본토 유가 사상을 그대로 체현한 남자’라 불렀다.
“그 남자와 가장 가깝게 교류했던 장교가, 바로 태사 각하의 아버님이십니다.”
“아버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사진은 본 적 있지만.
젊은 장교. 군복을 입고, 반듯한 자세로 백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그리움, 이라 말하기엔 너무 얕고, 아쉬움이라 말하기엔 따끔거리는 감정이 리안의 가슴 속을 돌았다.
“시대가 평온했다면, 두 장교의 우정은 아름답게 남을 수 있었겠죠. 두 사람은, 나중에 장성이 되면 태평천국과 고려 양국의 합동훈련 같은 것으로 기량을 겨뤄보자며, 농담을 나누곤 했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평온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한족 중심주의. 주변국에 흩어진 한족 거주 지역은 모두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이념. 몽골의 통치와 함께 잃어버린 당, 송나라의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구호.
태평천국 정부는 그런 열망에 등을 떠밀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열망을 이용하기도 했다.
황실과 관리들의 부패, 그리고 태평천국이 건국될 때 내세웠던 이상이 좌절되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졌기 때문이다. 전쟁, 민족, 애국은 그런 불만을 돌리기에 알맞은 화제였다.
그래서 세계대전이 본격화되기 전에도 태평천국은 주변국에 대한 산발적 침공을 일삼았다.
태평천국이 남쪽 바다로 나갈 길을 연다면서 대예와 보우슈엥을 침공하자, 고려, 몽골 등 주변국들은 이를 강하게 규탄했다. 하지만 태평천국은 멈추지 않았다.
태평천국이 고대 왕조들의 수도인 ‘장안’을 되찾겠다며 탕구트를 침공했을 때, 고려와 몽골은 반 태평천국 동맹을 주도했다. 알티샤흐르, 티베트, 다리다, 류큐 등이 여기에 참여했다.
반 태평천국 동맹은 육로를 끊어버렸고, 해상봉쇄까지 하며 태평천국이 침략한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에 대한 태평천국의 대답은, 전쟁이었다.
“최효윤 양의 아버지는, 조국의 침략 행위에 가슴 아파하던 양심적 군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침략을 즐기는 조국과 양심적 군인이 만나면 그 결말은 비극으로 끝난다.
리안은 왠지 더 듣지 않아도 결말을 알 것 같았다.
“태평천국군의 평양 기습 폭격 계획. 그 비인도적 작전에 대해 알게 됐을 때, 그 남자는 무척 고민했었죠.”
고민 끝에, 그는 조국을 배신하기로 했다.
아니, 오히려 그 배신이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 믿었다. 진정으로.
평양 폭격 계획을 세상에 알리기만 하면, 몽골이나 고려 두 강국이 태평천국에 강력하게 항의할 테고, 태평천국의 확장도 거기서 저지되리라.
사이는 나빠지겠지만, 강국들 사이의 전면 전쟁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탈영’이라는 오명까지 감수하며, 효윤의 아버지는 조국을 떠났다.
“……하지만, 너무 늦었나 보군요.”
류성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효윤 양의 아버지는 육로를 통해 고려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태평천국은…… 술수를 썼죠. ‘사병을 살해한 장교가 탈영해 당신네 나라에 입국했다.’ 그런 내용으로 몽골군에 체포를 요구했습니다.”
물론 몽골군도 그런 수작을 순순히 믿은 건 아니다. 하지만 가상적국의 장교라면 분명 중요한 정보가 있을 터.
최효윤의 아버지는 칸발리크에서 체포됐다. 물론 그가 가져온 정보는 고려의 안보뿐만 아니라 몽골의 안보에도 중대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몽골군은 금방 그를 석방하고 망명을 받아들였지만…….
그 잠깐이, 모든 이의 운명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