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려파(5)
고려에 저항하다 보면 고려어를 어느 정도는 알아듣게 된다.
고려어를 모르는 몇몇 독립운동가들 옆에서 다른 동지들이 통역을 해줬다.
“식민지 통치 문제라면, 그것은 완전한 독립을 말하는가?”
“아닙니다.”
“그럼 우리도 더 할 말이 없네.”
지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고, 노인도 그렇게 말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지나는 수영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은 회의실 문을 열고 형무소 직원을 불러, 노인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것으로 노인의 운명은 결정됐다.
“식민지 독립은 우리 고려의 결심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 3국과도 관련된 문제입니다.
만약 우리가 여러분의 독립을 승인한다 해도, 독립을 축하드린 다음 날 그 3국의 군대가 선전포고를 하겠죠.”
남아 있던 사람 중,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그렇다면 국장 대리, 자네의 상관은 자치권 확대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나.”
“그렇다고 보시면 돼요. 옥중에서도 소식 들으셨겠지만, 제국최고회의는 단순히 자치권을 확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산동 주민의 참정권까지 인정하게 될 겁니다.
네, 고려의 중앙정부에 대한 참정권 말입니다.”
“제국최고회의의 의석을 내주겠다는 거요?”
“정확합니다.”
술렁임이 퍼졌다. 몇몇 사람들이 또 일어섰다.
“우리의 충의는 여전히 태평천국의 황제 폐하와 그 적통 후계자를 향하네. 고려의 황제께는, 외국 황제에 대한 예절까지만 바칠 수 있네.”
“이해합니다.”
그들도 밖으로 나갔다. 조금 더 수가 줄어든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질문이 나왔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산동 한족들의 저항을 견디기 어려워졌나?”
지나는 뒤쪽, 벽 앞에 지도를 펼쳤다. 독립운동가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지도의 의미를 해석해내려 애썼다.
고려의 전국토를 그린 지도다. 다만 행정구역 구분이 그들이 아는 것과 달랐다.
“제2제국 시기부터 지금까지 고려의 행정구역은 성(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게 중앙 관청인 중서문하성이나 외무성, 법무성 같은 성(省)과 겹쳐셔 용어상 혼란을 주는 문제도 있었습니다만, 지나치게 커서 지방 행정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왔죠.”
지도의 행정구역은 그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세분돼 있었다. 그들의 고향인 산동 식민지는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 3국이 분할해, 이제 고려의 식민지는 반도 동남쪽 일부만 남았다.
“그래서 우리 고려 제3제국 정부는, 국가가 줄 수 있는 혜택을 더욱 세심하게 제공하고자,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행정구역 단위는 도(道)가 될 것이며, 이에 따라 산동 식민지도 ‘발해도(渤海道)’로 승격됩니다.
주민들이 본토의 국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제1제국과 제2제국 사이, 고려가 아직 몽골-다이온(大元)의 속령이던 시절, 고려는 몽골의 제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행정구역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흔적이 제3제국까지 남아 있는 게 바로 성(省)이었다.
원래 ‘성’은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줄인 ‘행성(行省)’에서 더욱 줄어든 말이다. 여기서 ‘행(行)’이란 어떤 역할을 임시로 대신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행중서성은 ‘중서성의 역할을 대신하는 기관’이라는 뜻이 된다.
다이온의 중앙관청인 중서성은, 고려의 중서문하성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다이온의 카간들은 요나라와 송나라가 멸망한 땅에 중서성의 역할을 대신하는 ‘행중서성’을 세웠다.
줄여서 행성, 혹은 성이라는 광역행정구역의 이름은, 다이온이 남쪽 영토를 상실한 이후에도 계속 쓰였다.
그리하여 명, 순, 주나라뿐만 아니라 태평천국, 고려, 그리고 일본행성이 설치되었던 일본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남겼다.
지나가 말한 대로 행정구역 ‘성’은 중앙정부의 관청인 ‘성’과 용어가 겹쳐서 혼란스럽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신라성, 백제성, 사예성 등의 이름이 중서문하성, 외무성, 법무성 등과 혼동을 빚는다는 것이다.
‘성’ 체제의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 성의 규모가 지나치게 컸다.
당연히 각 성마다 담당하는 인구가 너무 많아 효율이 떨어졌다. 또 각 성마다 중앙 권력이 잘 미치지 못하다 보니, 근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중세의 티를 벗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제국최고회의는 광역행정구역의 이름을 제1제국 시기의 ‘도(道)’로 교체하고, 또 그 규모도 세분하기로 했다.
사예성 중 동명을 중심으로 하여 요하 유역 일대가 사예도로 남았고, 평양 일대는 서경도로 분리됐다.
백제성과 신라성 사이의 지역이 금관도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을 신설하고, 백제성은 백제도, 목지도, 건마도 등으로 나뉘었다. 신라성은 신라도와 기저도 등으로 나뉘었으며, 다른 성들도 이런 식으로 개편되었다.
지방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중앙정부 역시 구조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문하시중 허동주의 반란으로 태사부와 권력을 양분하던 중서문하성은 폐지됐다.
태사는 제국최고회의가 선출하고, 황제가 임명한다. 태사는 외무성, 법무성, 재무성 등 각 성의 장관들을 임명해 내각을 구성한다.
황제는 태사를 해임할 권한은 없고, 태사의 사임이나 제국최고회의의 탄핵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
대신 황제는 제국최고회의든 내각의 국무회의든 어디든 마음 내키는 대로 참석해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이렇게 겉보기에는 서로서로 권력이 견제되는 구도를 취했다. 하지만 지금은 태사 미리안이 제국최고회의 의장과 여당의 당수를 겸하고 있으니, 그녀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이상 그녀를 견제할 방법은 거의 없다.
그런 미리안이, 이번에 협상에 임하는 지나에게 상당히 막강한 권한을 줬다.
“고려어가 의무 과목, 몽골어가 필수 외국어 과목, 한어가 선택 과목이었던 교육 과정도 변경할 예정입니다. 발해도에 한해서, 고려어와 몽골어는 선택 과목, 한어가 의무 과목이 되겠죠.
역사 관련 교과는 그대로지만, 한족 역대 왕조의 역사를 가르치는 게 제한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교과과정은 발해도지사의 권한 내에서 조정할 수 있을 거고요.”
회의실에 남아 있는 한족 독립운동가들은 미심쩍다는 표정이 되었다. 별다른 조건도 없이 너무 듣기 좋은 이야기만 계속되면 의심스럽기 마련이다.
“교육을 통해 한족의 정신을 말살하고자 했던 정책을 철회하는 건, 우리로서도 반가운 일이오. 그런데 아무런 대가 없이 그런 관용을 베푸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오만.”
“대가야 방금 말씀드린 대로 우리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발해도의 관리로 부임해서 새로운 행정을 시작해주시는 거죠.
물론 고려 본국의 관직에 진출하려면 당연히 고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해요.
고려 본국의 기업이 고려어 구사 능력을 채용 조건으로 거는 건 우리 정부가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요.”
한족 독립운동가들은 생각에 잠겼다.
태사 본인이나, 법무성 장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별반 관련 없어 보이는 ‘소년감찰국’이라는 조직의, 그것도 ‘국장 대리’가 나와서 협상을 한다. 이것은 분명 어떤 의도가 감춰져 있다.
말하자면 지금 유지나라는 소녀의 제안은 ‘아직은’ 공식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한족 독립운동가 측이 이 제안을 거부하면, 제국 정부는 곧바로 협상을 철회하고 예정된 ‘어떤 행동’을 취하리라 예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떤 행동’은 지금 제안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겠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독립의 가능성에 매달릴 것인가? 민족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렇게 ‘자치권’을 얻을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게 옳은 일인가?
민족 반역자로 이름을 남기는 것도 두렵고, 마지막일 지도 모를 민족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도 두렵다.
누군가가 격앙된 어조로 유지나에게 물었다.
“그렇게까지 우리의 자치권을 보장해줄 수 있다면, 아예 우리를 독립시키는 것은 왜 안된단 말인가?
설령 독립된 후 다른 몽골계 국가의 침략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우리가 감당할 일일세.
그렇게까지 땅이 탐이 나는가? 아니면 제국의 위신이 그렇게도 중한가?”
유지나는 답하지 않았다. 지나는 고개를 돌려 수영을 본다. 이제는 그녀가 답할 차례다.
“답은 간단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먼저 시작한 전쟁’에서 졌다.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 있을 뿐이다.”
차갑고 딱딱한 말에 독립운동가들은 잠깐 말을 잃었다. 그러다 겨우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반박했다.
“그것은 태평천국 정부와 황실, 그리고 군에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다. 왜 죄 없는……”
“전쟁을 먼저 시작한 나라에 ‘죄 없는 민간인’은 없다.”
수영은 이번엔 그들이 발언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당신들이 당시 내 또래의 여자애들한테 벌인 짓은 이야기로만 들어도 소름 끼쳐. 사람 같지도 않은 일을 저질러 놓고서는 사람의 대우를 받기를 바라나?
지금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도 과분해. 국제사회의 눈만 없다면 진즉에 당신들을 태아부터 노인네까지 말려 죽이고 그 땅에 고려인의 터전을 세웠을 거야.”
수영의 분노에 찬 말에 독립운동가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 증오는, 독립운동가들이 고려 제3제국을 향해 품은 분노와 무척 닮아 있었으므로.
“다시 말하지만 죄 없는 민간인은 없어. 당신들은 그 역겨운 전쟁범죄자들을 낳고, 기르고, 군인으로 훈련했고, 무기를 주고, 타국을 침략하라 명령했어. 전쟁을 시작하려는 정치가나 황실을 저지하지 않았어.
전쟁 후반기에는 반전 시위를 했었다고? 질 것 같으니까 보복당하는 게 두려워서 시작한 게 무슨 반전 시위야?”
다시 지나가 앞으로 나섰다. 입가에 명백한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뿌린 대로 거둔다. 아니면,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하세요. 아, 언제까지 이렇게 대가를 치러야 하냐고요?
그야, 고려, 몽골, 그 외 당신네 민족한테 피해를 봤던 나라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