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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76화 (76/541)

친려파(4)

지나는 바싹 긴장했다.

황궁을 밖에서 본 적은 있지만, 안에 들어와 본 적은 없다. 이렇게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복도를 걷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 없다.

앞에서 안내하고 있는 배영훈 소령이라는 사람은 익숙한 모양이지만, 지나는 왜 이렇게 복도가 길고 천장이 높은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황궁의 각종 기물과 장식은 단순히 화려한 게 아니라, 방문객이 ‘위엄’을 느끼도록 만들어졌다. 지나에겐 그게 꼭 자신을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배영훈은 태사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고, 지나를 안으로 안내한 다음, 경례하고 나가버렸다.

넓은 집무실 안에는 전에 몇 번 보았던 최효윤과, 제국태사가 있었다.

‘저 사람이…….’

한 학년 위의 황제, 루우는 실제로 본 적이 있지만, 태사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루우보다 더 어려 보이는, 귀여운 얼굴, 긴 머리카락.

하지만 루우와는 다른 무게감이 느껴진다.

루우는 황제라기엔 소탈한 느낌이었다면, 미리안은 말 그대로 지금 제국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의 무서움을 그대로 뿜어냈다.

실질적 통치자.

미리안이 슬쩍 눈을 들어 지나를 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집념 같은 것이 그 눈빛 안을 휘돌았다.

“아, 네가 유지나? 서 있지 말고 자리에 편히 앉아.”

생긋 웃는 얼굴이 되면서 그런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연장자의 여유와 태사의 기품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 안녕하세요…… 아, 아니, 고맙습니다.”

인사를 먼저 해야 한다는 생각과, 자리에 앉으라는 말에 예를 표해야 한다는 생각이 엉켜버리면서 말이 헛나왔다.

리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마련된 탁자로 걸어왔다.

리안의 손짓에 지나는 탁자 옆 의자에 앉았고, 리안과 효윤도 뒤이어 다른 의자에 앉았다.

이 세 의자와 탁자는 원래 집무실 기물이 아니라 다른 방에서 가져온 듯했다. 탁자 위에는 과자와 음료가 놓여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과자라도 좀 들어. 까다롭기 짝이 없는 남자랑 일하잖아.”

“아하하…….”

지나는 그렇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리안은 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면서 말을 이었다. 지나도 조심스럽게 하나 들어 입에 넣는다.

“지금은 국장 대리라고 했지.”

“네…….”

“연락은 받았겠지만, 주견하 국장의 요청으로 ‘본국에 수감 중인 한족 독립운동가’들을 유지나 국장 대리 앞으로 보낼 예정이야. 태사부에서도 추가 인력을 파견해 줄 테니까 보안 문제는 염려하지 않아도 돼.

내가 궁금한 건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유지나 국장 대리에게 계획이 있냐는 거야.”

지금까지 소년감찰국에서 담당하는 굵직한 업무들은 견하가 전면에 나서서 해결해왔다. 즉, 견하의 최측근인 유지나가 나서서 이 정도의 일을 처리하는 건 처음이다.

게다가 이 일, 견하도 반신반의하는 일이다. 유지나가 잘 처리할 수 있을까.

“부족하지만, 저도 나름 배운 대로 방법을 생각해봤어요.”

리안은 그런 말을 하는 지나의 눈빛을 감상하듯 바라본다. 지나가 소년감찰국에 들어간 건 그녀의 친인척 중 누군가가 허동주 편에 붙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나는 이 일을 성공시켜서 친인척의 안전을 확보하거나, 배신자라는 굴레를 벗어버릴 각오를 했을지도 모른다.

리안은 약간의 자비심을 발휘해보기로 했다.

“좋아. 일단 생각해둔 방법대로 해봐. 부담은 갖지 말고. 어차피 안 된다고 해도 크게 곤란해질 일은 없어. 나도, 견하 군도 차선책을 생각해 둔 게 있고.”

지나는 태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과 지나, 그리고 효윤은 대화를 좀 더 나눴다. 주로 학교생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리안은 지나가 말하는 견하의 이야기를 흥미 깊게 들었다. 지나도 조금은 긴장을 풀고 리안의 물음에 답했다.

지나가 인사하고 나가자, 리안은 웃으며 효윤을 돌아봤다.

“마음에 드는 애야. 여동생 삼고 싶어.”

효윤도 웃으며 농담조로 답했다.

“저로는 부족한가요.”

“아, 물론 최효윤 양도 귀여운 여동생이죠. 음, 그렇지만 꼭 하나만 가져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어쨌든 내가 ‘믿을 만한’ 사람들끼리 ‘가족’같은 형태로 엮이는 건 나쁜 일은 아니야. 유대감은 조직을 튼튼하게 하니까.”

가족, 이라. 효윤은 리안의 말을 곱씹어본다. 잠깐 다른 생각에 잠긴 게 얼굴에 드러났는지, 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유지나라는 애가 신경 쓰여?”

“예? 아, 아니요. 제가 왜 대체 저 애를……”

“경쟁자잖아? 학교에서 견하랑 붙어 있는 시간도 많고.”

“견하가 누구랑 붙어 있는 건 제가 아니라 각하가……”

“좋아하잖아, 견하를.”

진지하지만 따뜻한 어조다. 미소도 눈빛도 진실된 따스함을 담았다. 그 앞에 효윤은 멈춰버렸다.

“저는…….”

“이상한 일도, 나쁜 일도 아니야. 열일곱 소녀잖아. 견하도 열일곱 소년이고, 잘생겼고, 머리도 좋고, 성격도 자상하지. 소녀가 사랑에 빠진 것뿐인걸.”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음을 들킨 부끄러움일까, 아니면 리안에 대한 죄책감일까.

효윤은 침묵했고, 집무실 안에는 리안의 목소리만 울렸다.

“얼마 전에 몇 가지 기록을 찾아냈어. 왜…… 백부님이 너를 나에게 보내셨는지.”

“…….”

“효윤아.”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리안은 그런 효윤이 안쓰럽다는 듯, 아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네가 더는 나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아.”

“희생이라고 생각한 적은……”

“네가 원한다면 포기할 수 있어.”

처음에는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침묵이 이어지고, 그 끝에 이해가 찾아왔을 때, 효윤의 눈이 커졌다.

“주견하, 포기할 수 있다고.”

***

유지나는 현실적으로 판단했다.

자신의 능력은 견하에게 미치지 못한다. 견하는 소년감찰국을 조직하기 전에도 리안의 어깨너머로 꽤 많은 것을 배웠다. 독서량도, 지식도 견하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누군들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로 일을 맡으랴. 일은 주어졌고, 지나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며, 이 수단과 방법에는 ‘남의 힘’도 포함된다.

‘남의 힘’을 빌리는 것도 능력이다.

남의 힘, 이라고 하니까 견하가 전에 읽어보라고 권했던 역사책의 한 부분이 생각났다.

태평천국이나 신흥 이슬람 제국의 강력한 군사력은 찬미하면서, 연합군의 승리는 비겁한 조리돌림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외교력, 즉 동맹을 만드는 것 또한 국력이라면서.

맞는 이야기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면 유용한 동맹을 만들어 두기라도 해야 한다. 1대 1로 싸우면 지지 않을 것이라느니, 다수가 하나를 공격하는 게 비겁하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패배자의 푸념일 뿐이다.

외교력이라는 국력이 약한 자의 불평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같이 가자고?”

미심쩍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양수영에게, 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런 문제를 함께 처리할 만큼 신용이 있던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선배. 중요한 건 선배가 저보다 ‘민족 문제’의 전문가라는 거죠.”

양수영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지나의 말대로 수영이 지나보다는 민족 문제에 대해 잘 안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천손민족협회 출신으로, ‘고려 민족 중심주의’에 대해 깊이 생각해 온 사람이니까.

자기 민족을 우선시하고 다른 민족을 배척하는 길을 궁리해 온 사람이라면, 반대로 그 배척당한 민족의 심리와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는 그 점을 노렸다.

“네 말대로 내가 그쪽에서는 너보다 낫겠지만…… 네 일에 협조적으로 나온다는 보장은 없잖아.”

“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선배는 일단 소년감찰국 일원으로서 견하 선배의 신임을 얻고, 한재연…… 과 이 조직 내에서 입지를 다진다는 판단을 할 것 같거든요.”

한재연에 대한 적절한 호칭을 생각해내지 못했기에, 지나는 그 이름을 입에 담을 때 말을 조금 흐렸다.

수영은 탓하지 않았다. 대신 피식 웃고는 팔을 쭉 펴며 몸을 풀었다.

“전부터 똑똑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 판단력이라면 같이 일 할만 하겠어. 좋아. 가보자. 그 ‘한족 독립운동가’인지 뭔지, 우리한테 협력하게 만들어보자고.”

***

리안이 예고했던 시각에 구 야별초, 현 정치경찰실 건물 앞으로 호송 차량이 도착했다. 차례차례 내린 수감자들은 회의실로 이동했다.

죄수복을 걸치고 오지 않을까 했는데, 형무소에서는 이번 일 때문에 제대로 씻기고, 먹이고, 입힌 모양이다.

한족 독립운동가들은 갑작스러운 대접에 처형을 각오했던 듯하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동지들까지 한자리에 불러모아 두고, 그대로 다들 나가버리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된다.

자신들을 데려온 형무소 직원들이 나가고 난 끝에 소녀 두 명만 덩그러니 남아 있자 더욱 당혹한 표정을 짓는다.

연령대는 다양하다. 노인부터 젊은이까지. 인계받은 자료에 따르면 나이가 많은 축일수록 태평천국의 구황실 복원 쪽을 지향하고, 어린 축일수록 공화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 외에도 허동주처럼 민족주의 군사정부를 꿈꾸는 이도 있고, 지역별 독립 국가 형성을 목표로 잡는 이도 있는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지나는 앞으로 나섰다.

웬 계집아이인가,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치고 갔을지라도, 독립운동가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살벌한 현장에 있다 보면, 성별이나 연령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마련이다.

그들 눈에는 유지나라는 여고생도 결국 제국의 첨병이다.

“안녕하세요. 소년감찰국 국장 대리 유지나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은 건, 고려 제국의 식민지 통치의 문제에 대해, 한족 측 대표라 할 수 있는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자 함입니다. 서로 유익한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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