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려파(3)
루우가 주목한 건 그 칼의 가운데 축을 이루는, 기계 형태의 무언가다.
딱히 뭐라 묘사할 길 없는, 기계적 질감과 외관의 무언가.
그리고 그 검으로 베어낸 적은 칼이 아니라 기계에 갈린 듯한 단면을 보여줬다.
뭐지 대체.
기계…… 그러고 보니 견하는 분명 환도시에서 허동주를 죽이기 전에 ‘기갑사’ 한 기를 탈취했었다. 하지만 견하를 찾아냈을 때 그 ‘기갑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지.
어디로 갔지?
견하가 여는 작은 ‘공간의 틈’, 그 사이로 튀어나오는 촉수 같은 괴물들, 그리고…… 사라진 ‘기갑사’와 ‘기계적 질감의 검’.
……모르겠다. 연결될 듯 말 듯 하지만, 결정적인 판단 근거들이 아직 부족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재연이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의심을 담은 시선이 교차했다. 루우가 한재연을 믿지 못하는 만큼, 한재연도 루우의 진의를 의심하는 듯하다.
아주 잠깐이었던데다 루우는 다른 생각이 더 급했기에, 말은 오가지 않았다.
한재연은 시선을 떼고 견하에게 걸어가 보고를 한다. 루우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쿠빌라이 문서, 모으는 것도 문제지만…… 마르코 폴로가 어디까지 알아낸 건지도 문제야. 마르코 폴로는 과연 진실에 얼마나 근접했을까?’
삼한반도 쪽 전선이 진전을 보인다고 하니, 곧 ‘도산서원’이 있는 안동도 곧 확보할 수 있겠지.
초조감이 어깨를 움츠리게 한다. 타이시(太師) 미리안에게서 도산서원의 정보를 얼마나 캐낼 수 있을까. 아니, 그녀를 통하는 게 아니라 직접 봐야겠다.
이번 일을 마치고 동명에 돌아가면 바로 그렇게 요구해야겠다고 결심하며, 루우는 견하 쪽으로 돌아섰다.
***
효윤은 리안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리안의 경호원이고, 리안이 지난 며칠간 얼마나 바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잠깐 갖는 휴식은 이해해주자, 그렇게 생각했다.
서북부 문제는 군주들 사이의 합의가 잘 이루어졌다고 해도,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해결’은 그 밑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의 땀과 눈물로 이루어진다. 주민들의 이주 문제에 대한 계획을 잡으면서 동시에 리안은 산동으로 몸소 나간 루우의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전선에서 장교로서의 경험을 쌓으러 간 것이라 국민들에게 선전하는 한편으로,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를 압박해 군사행동에 나서게 했다.
그렇게 바쁜 날이 지나고 휴식 시간이 찾아왔는데, 리안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사놓고도 써먹질 못하네.”
거울 앞에 선 리안은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불만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여름, 휴가의 계절이다. 하지만 리안은 휴가를 떠날 수가 없다. 적어도 올해는.
누구나 연인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리안은 하늘거리는 원피스 형태의 수영복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얀 어깨나 살짝살짝 드러나는 허벅지 선으로 평소에는 보여주기 힘들었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연인답게, 말이지.
“아쉽지만 내년을 기약하죠, 각하.”
“그래야겠지…… 그런데 견하 군은 산동에서 황제랑 바다나 계곡으로 놀러 가진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전선인걸요.”
“아직 고려군이 본격적으로 투입되지 않은 전장이지. 고려 황제와 소년감찰국 국장이 할 일이 많을까?”
“주견하의 됨됨이를 보면 자기가 할 일을 만들어내서라도 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괜한 트집이지.”
효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리안이 견하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건 안다. 하다못해 학교를 같이 다닐 수도 없으니까.
“내가 어쩌다 연하를…… 아니, 됐다.”
효윤은 이번 일이 끝나면 어떻게든 소풍이라도 한번 가보자고 생각했다. 혹은 야영이라도 하루 지내고 오면 재미있는 추억이 될 것이다. 리안의 스트레스도 많이 풀릴 거고.
전화가 울렸다.
효윤은 전화를 받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수영복 차림의 태사가 집무실에 나타나서 하얀 속살을 뽐내며 보고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잠시 뒤 효윤은 서신 한 통을 들고 왔다. 리안이 거울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주견하한테 온 보고에요.”
리안이 살짝 긴장한다. 효윤은 보고를 읽었다.
“‘산동의 통치는 도저히 유지할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고 하네요.”
“예상대로인가……. 몽골 측에 상당한 부담을 져 달라고 애걸복걸하면서도, 국민들에게 산동이 도저히 이득이 없는 땅임을 이해시켜야 하는데…… 쉬운 게 하나도 없네.”
효윤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떠오른다. 리안은 그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견하의 보고가 더 있음을 직감한다.
“‘단, 아주 일부라도 산동 통치를 회복할 방안 연구를 위해, 소년감찰국 국장 대리 유지나 앞으로 본국에 수감 된 한족 독립운동가를 모아달라’는 요청이 붙어 있어요.”
리안도 씩 웃는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녀의 소년은.
한족 독립운동가는 산동의 총독부에 대부분 수감 돼 있지만, 동명으로 유학 온 학생 출신, 태사 암살을 시도한 테러리스트, 그 외 거물급 인사 몇몇은 본국에 있다.
물론 신수덕이 죽여버린 독립운동가들에 비하면 한 줌도 안 되지만, 영향력은 뒤지지 않는다.
“친려파 인사들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독립운동가를 채운다…… 라.”
“그들이 우리와 협상하려 할까요? 한족 국가의 완전한 독립만 바라는 자들인데.”
“상당한 수준의 자치, 혹은 대등한 국민의 권리 등을 보장해야겠지. 아니, 그 이상인가. 향후 몇 년간 병역 면제, 같은 것도 내줘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렇게까지…….”
“어쨌든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들이야. 산동 한족들의 민심을 가라앉히는 데는 쓸 수 있어. 그들도 감옥에 오래 있다 보면 독립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테니, ‘자치권 협상’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을 수도 있고.
우리의 제안에 응한 뒤, 다른 강경파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다 해도 손해는 아니야. 한족 스스로 자기네 독립 역량을 깎아 먹는 짓이니까. 뭐, 절대 협상하지 않겠다면 다시 감옥에 넣으면 그만이고.”
그나저나 재미있는 발상이다, 하고 리안은 감탄했다.
독립운동가들을 꺼내서 그들을 식민지 관료로 앉힌다. 아무리 그들이 고려에 반감이 커도 어쨌든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면, ‘친려파’다.
“좋아. 일단은 그…… 유지나라는 애를 좀 만나볼까.”
***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 3국의 군대는 북, 서, 남쪽에서 서서히 움직였다. 며칠 뒤 고려군도 몽골 국경을 통과, 철도를 통해 칸발리크를 거쳐 산동 접경 지역으로 이동했다.
4개국 연합군은 진격 속도나 작전 범위 등을 조율한 후 산동의 반란군과 교전에 들어갔다.
산동의 반란군은 여전히 전선을 만들거나 요새를 구축하지 않고 있었다.
저항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초소나 토치카는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사격을 멈추지 않았고, 항복에도 잘 응하지 않았다.
몇몇 수용소는 연합군이 몰려오기 전에 어떻게든 더 많은 한족을 죽이려고 발악했다.
처음에는 산동 안으로 연합군 부대들을 깊이 끌어들여 각개격파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었다.
때문에 4개국 연합군은 신중하게 진격했는데, 이런 식으로 발악이 계속되니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좀 더 빨리 적을 제압해야 식민지 주민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태평천국의 옛 수도, 응천의 황궁에 정부를 설립한 낭키아스 울루스. 그 칸인 게레센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조카의 대관식 때문에 갔던 동경에서, 그는 분명히 말했다. 가족의 정과 국가의 이익은 별개의 것이라고.
그렇다. 그는 형인 몽골 카간을 사랑한다. 형이 함박웃음 지으며 안고 있던 아기, 조카 루우 테무르도 사랑한다. 그들을 슬프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의 솔직한 감정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애국자였다.
세운 지 19년밖에 되지 않은 나라였지만, 지배층인 몽골인과 피지배층인 한족 간 갈등이 여전히 남아 있는 나라였지만, 그는 자신의 ‘조국’인 낭키아스 울루스 역시 사랑했다.
이 사랑은 가족 간의 사랑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도덕적 책무감에 좀 더 가까웠다.
따라서 게레센제는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낭키아스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길인가. 어떻게 하면 낭키아스 군인들의 희생을 줄이고 그들을 생환시킬 것인가.”
그가 보기에 4개국 연합군 사령부의 방침은 훌륭하다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진격 속도가 빨라진다고 해서 반란군의 학살이 덜 악랄해지진 않을 것 같다.
오히려 흥분한 병사들이 성급한 진격 중에 기습을 당할 가능성만 커진다.
게다가 허동주의 최정예, 서부군은 별다른 타격 없이 무사히 산동으로 철수했다.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연합군이 제대로 연계하지 않고 무작정 쾌속 진격만 고집한다면, 갑자기 튀어나온 서부군에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크다.
적어도 서부군 주력의 배치 상황 정도는 파악한 이후에, 연합군도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초소나 토치카는 순식간에 함락하고 있지만, 항공전 보고는 적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게레센제가 생각해낸 합리적인 방법은 하나였다.
이대로라면 어떤 희생이 나오든 반란군은 진다. 하지만 적의 수장인 신수덕이 죽음까지 바랄까?
바라지 않을 것이다. 바랐다면 벌써 자살했겠지.
학살을 멈추려면, 그러니까 산동 한족을 해방하려면, 한족을 인질로 잡은 인질범과 협상을 해야 한다. 협상을 통해 빠른 항복을 종용하고, 이 난장판을 끝내야 한다.
루우 테무르나 그 태사인 미리안은 말할 것도 없고, 시레문과 울제이도 신수덕의 시체만 바라는 듯하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학자풍의 눈매를 가늘게 하며 게레센제는 비밀리에 명령했다.
“신수덕과 접촉한다. 어떻게 하면 그와 그의 군대를 낭키아스 군에 항복시킬 수 있을지, 여지는 없는지 캐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