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려파(2)
도주에 성공한 적은 없다.
견하는 화물칸 문을 열라고 명령하고 재연을 불렀다.
본국의 소년감찰국은 유지나와 양수영에게 맡겨뒀다.
수영을 감시하는 것 정도는 지나에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재연은 아니었다. 이렇게 산동까지 데려와서 계속 감시해야 했다. 따로 떨어져야 할 때는 다른 군인들 사이에 두었다.
배신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견하와, 황제인 루우에게 신뢰를 얻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걸까.
“소년감찰국 국장 각하께서 보시기에, 내 사격 솜씨가 어떠한지?”
재연은 그렇게 농담을 던지며 얌전한 미소를 던졌다. 견하도 마주 미소지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족 구출에 몸을 던지게 될 줄은 몰랐지?”
“이런 무분별한 학살은 내가 바라던 게 아니야. 이건 불필요한 낭비지.”
“네 사상 자체는 변한 게 아니다?”
“아무리 옛 적에게 투항한 몸이라 해도, 양보할 수 없는 건 있어, 견하야. 고려에서 고려민족이 제일이어야 한다는 내 생각은 지금도 똑같아.”
“……만약 내가 사상을 버리라고 강요하면 어떻게 할래?”
재연은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그때는 죽는 수밖에 없지’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견하는 재연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어깨를 두드려줬다.
“뭐, 지금은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자.”
벌거벗은 채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던 한족들을 열차에서 내리게 했다. 한낮이었지만, 지쳐버린 사람들의 몸은 차디찼다.
군인들은 가져온 모포를 꺼내 아이들, 노인들, 여자들부터 덮어줬다.
“일단 살았다는 안도감은 있지만…….”
루우가 옆으로 다가와 그렇게 중얼거렸다. 견하도 같은 생각을 했다.
고려어를 듣는 그들의 눈에는 깊은 적대감이 남아 있었다. 희망 속에 감춰지긴 했지만.
“고려인에 의한 통치는 어렵겠지.”
몽골에 산동 반도를 넘기고, 몇몇 군항이나 공군기지를 유지하는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그 기관사는 ‘한족’이더군.”
루우의 말에 재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기 동포들을 죽을 자리로 끌고 가는데 협력했다는 말입니까, 폐하?”
“신입, 앞으로 그런 멍청한 질문은 삼가라. 누구나 이름도 모를 동포보다는 살 맞댄 가족이 더 소중한 법이야. 그게 인간적인 감정이라는 거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보편적인 ‘도덕’이 가르치는 것과 달리, 개개인에게는 ‘목숨의 경중’이 있다.
처음 보는 남보다 내 자식이 백배 천배 소중한 법이다. 이걸 무시하는 자는 성자이거나, 성자 흉내를 내는 사기꾼이겠지.
그나저나 루우의 말이 날카로운 걸 보면, 재연이 루우의 인정을 받기까지 험난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일단은 철수하자. 생존자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먼저야.”
열차는 내버려 뒀다.
열차나 철로를 폭파하면 반란군은 한족들을 ‘수용소’로 끌고 가는 게 막혔으니 ‘현장에서 즉결 처형’을 택할 것이다.
그러면 살릴 목숨도 못 살리게 된다.
가져온 트럭을 비롯한 각종 차량에 주민들을 싣고 나서, 대대는 몽골군 기지로 출발했다.
***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지 않았다.
일단 국경 지역에 ‘전선’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었다. 이건 몽골군 부대가 진격하는 데 방해 요소가 없다는 점에서 좋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수덕의 속내를 너무 잘 보여주기 때문에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신수덕은 산동의 수비에는 관심이 없다, 는 뜻이다.
그는 오직 산동의 파괴, 특히 이 땅에 들어올 정부의 통치 기반을 파괴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전쟁이라는 것도, 어쨌든 승패가 정해지면 패배한 쪽의 통치기구를 인계해서 평화 시의 통치체제로 서서히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신수덕은 그런 최소한의 ‘룰’ 자체를 파괴하고 있었다.
오직 죽음과 파괴뿐.
“설마 ‘친려파(親麗派)’ 인사들부터 숙청해버릴 줄이야…….”
아무리 주민들을 학살한다 해도 그들은 남겨둘 줄 알았다.
신수덕은 내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산동에서 오래 버틸 생각이 없다고 봐야 한다.
친려파.
고려에 친한 무리, 라는 뜻이다.
한족들의 처지에서 보면 매국노, 민족 반역자가 따로 없다.
하지만 식민지배를 하는 제국, 고려로서는 소중한 인재들이다.
일단 식민지를 만들고 통치를 시작하면, 제국은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가장 먼저 ‘언어’의 문제.
수탈하려 해도 말이 통하지 않으면 ‘수탈 작업’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고려인에게 식민지를 수탈하라고 파견하려면 일단 식민지의 ‘언어’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욕을 하든 윽박지르든 할 것 아닌가.
때문에 고려 제3제국은 심혈을 기울여 ‘친려파’를 양성했다.
한어를 알고, 현지의 문화를 알고, 더 많은 ‘친려파’를 늘릴 수 있고, 식민지 통치의 윤활유가 될 사람들을.
이들을 양성하고 유지하는 작업은 신중해야 한다.
아무런 이득 없이 동포를 배반할 인간은 없다. 배반자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보다 이득이 더 커야 비로소 친려파가 된다.
명예직으로는 어림도 없고, 경제적인 이득을 잔뜩 안겨줘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성장해버린 친려파가 지역 유지가 될 경우다. 그때는 ‘본국’에서 파견된 관료와 맞먹으려 들 수도 있고, 그러면 아주 골치 아프다.
“친려파 중에는 본국이나 총독부의 고위 관료에게 정기적으로 뇌물을 바치던 자들도 있던 모양이야. 멋모르고 그런 친려파 앞에서 까불던 젊은 순경이 파면당한 사례도 있더라고.”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그런 융합과 적응이 일어나는 법이지.”
서류를 넘기던 견하의 말에 루우가 소감을 덧붙였다. 재연은 말없이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친려파에게는 이권만 주는 게 아니다. ‘안전’도 보장해야 한다.
한족 독립운동 세력의 테러를 막아내지 못하면, ‘지켜주지도 못하는 제국 정부’에 대한 불신은 높아져 간다.
“겉으로는 친려파로 행세하며 총독부에 아첨하면서, 뒤로는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던 놈들도 있었군.”
“아 그거 들어봤어. ‘민족자본’인가 뭔가 그건가?”
여기까지만 해도 골치 아픈데, 더 골치 아픈 유형이 있다. 바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려파로 전향한 인사들이다.
식민지 주민들은 고려의 국민이면서 국민이 아니어야 한다. 즉, 본국과는 차별을 유지해야 한다.
식민지를 만드는 목적은 거기서 값싼 인력과 자원을 끌어내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식민지에는 군정이 실시되고 군인 출신 총독이 파견된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려파로 전향한 인사들은 식민지를 고려의 ‘정식 행정구역’, 즉 성(省)으로 승격시키려 한다. 그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고려인으로 동화될 것을 주장한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산동 식민지를 성으로 승격시키고 고려인으로 동화시키면, 수탈은 거기서 멈춘다.
국가는 식민지 주민들을 정말로 ‘국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국가의 봉사’를 제공해야 한다. 제국최고회의가 생긴 지금은 산동 출신 의원들의 의석도 마련해야 한다.
한족 독립운동 세력이 이런 자들을 배신자라며 미워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한족들 사이에서 ‘주류’가 되면, 제국의 입장에서는 아주 골치 아프다.
그래도 이런 자들이라도 남아 있다면, 견하는 그들과 타협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면 산동을 성으로 승격하고 제국최고회의 의석을 늘리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기야 하겠지만, 산동을 고려의 영토로 유지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수덕은 이들까지 쓸어버렸다.
사망, 실종…… 설령 살아있더라도 유의미한 세력이 되긴 어렵다.
어느 정도 세력이라는 게 있어야 안정적인 통치를 맡길 수 있는데.
인정해야 한다. 고려의 산동 통치는 끝났다. ‘지켜주지도 못하는 고려 제3제국 정부’를 신뢰하고 친려파가 되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수덕의 의도는 분명했다.
미리안, 엿이나 먹어라.
견하는 얼굴을 쓸었다.
“신수덕은 이제 산동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고 봐야겠지.”
소파에 누워 허공에 다리를 뻗던 루우가 몸을 일으켰다.
“허동주처럼 빠져나갈 생각일까?”
“그렇겠지.”
“그럼…… 빠져나가기 전에 잡아야겠네.”
견하는 끄덕이고 재연을 바라봤다. 재연은 견하의 명령을 기다렸다.
“몽골군 사령부에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연락 좀 넣어줘.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 모두, 육해공군 전부를 동원해서 산동을 봉쇄해야 해. 신수덕의 망명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완전한 패배도 막을 수 있을 거야.”
***
루우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견하를 곁눈질했다.
서류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고심에 잠긴 소년의 옆얼굴. 날렵하다.
그러나 얼굴에 대한 감상과는 별개로 루우는 견하에 관한 몇 가지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단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견하는 떠올리기 쉬운 무기가 아니라 ‘하얀 괴물’의 축소판들을 소환해냈다.
그게 견하의 고유한 무기인가, 아니면 루우를 비롯한 이단들이 소환하는 무기의 ‘원초적’ 모습인가, 그걸 오늘 확인할 수 있었다.
하얀 촉수들을 별다른 무리 없이, 몇 마디 조언해주는 것만으로도 쉽게 무기의 형태로 변환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하얀 촉수…… 혹은 괴물들은 주견하가 오늘 만들어낸 검의 ‘원초적’ 형태라는 뜻이다. 마치 루우의 ‘용’처럼.
정확히 말하자면 루우의 ‘용’도 고려 태조 왕건의 혈통에서 내려온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다. 보르지긴 가문에 내려오는 ‘늑대’와 ‘사슴’의 혈통에, 고려 정복 후 ‘용’ 혈통을 섞은 것이다.
늑대니 사슴이니 용이니 하는 것도, 인간의 기준에서 자기들이 보기에 유사한 동물의 이름을 붙인 것이지, 본질은 특이한 능력과 형태를 지닌 ‘하얀 괴물’이다.
그런데 왜, 인위적으로 양성된 ‘이단’들의 몸에서 그런 괴물이 튀어나오는지, 견하의 초기 능력은 그런 괴물을 축소한 형태를 띠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물론 몽골에서도 몇 가지 실험을 통해 견하와 유사한 이단들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명확히 규명해내진 못했다. 견하처럼 촉수를 무기화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다만 그 후에…… 점차 인격이 마모된 끝에 미쳐 날뛰기 시작했기에 처분.
거기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제각각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떨지도 않았지.’
침착하고 효율적으로 무기를 활용했다. 그게 견하가 전투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처분된 이단들이 밟는 수순을 따라가고 있을 뿐일까.
가능한 한 오래, 죽지 않고 살아서 루우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어주길 바란다.
견하가 뿜어내는 ‘하얀 괴물’들의 정체를 알아내면, 루우의 그 ‘용과 늑대와 사슴’을 교배한 괴물의 정체에도 접근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소년인 것도 있지만.
소파에서 완전히 일어난다. 견하를 등지고 서성이며 생각에 잠긴다.
견하의 무기 형태, 독특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