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식(8)
7월 31일, 키타이의 울제이 칸, 낭키아스의 게레센제 칸이 동명에 도착했다.
이들 형제는 키타이의 수도인 개봉에서 먼저 회담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인지, 키타이와 낭키아스군이 고려령 산동 접경 지역으로 전진 배치를 시작했어.”
리안과 루우, 그리고 효윤과 견하. 이렇게 네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리안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예전처럼 리안도 반말을 쓰기로 한 모양이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합의를 본 루우의 숙부들은 칸발리크에 도착, 그곳에서 몽골의 여러 정치가와 이야기를 나눈 뒤 동명으로 향했다.
“키타이와 낭키아스가 허동주를 지원했던 정황은 확실하지만…… 이 문제를 덮을까, 아니면 약점으로 활용할까.”
“일단 대관식까지는 외교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 아닐까요. 저 사람들이 개봉이나 칸발리크에서 어떤 말을 나눴는지,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재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효윤이 가장 신중한 의견을 내놓았다.
루우는 시레문과의 회담 이후 다소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았다.
“저쪽에서 뭔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우리 쪽에서 먼저 치고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루우, 네 숙부들은 너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지?”
견하의 물음에 루우는 잠깐 생각한 후 대답했다.
“거의 아는 게 없을 거야. 난 숙부들이 키타이와 낭키아스를 분봉 받은 후에 태어났으니까.
숙부들은 봉토에서 통치에 전념하느라 칸발리크에는 거의 찾아오지 않았고. 몇 번 만났을 때도 예의상 이야기 몇 마디를 나눈 게 전부야.”
하지만 아주 노련한 정치가라면…… 말 몇 마디로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울제이와 게레센제, 두 사람이 ‘노련하다면’ 말이지만.
어떤 사람들인지 이쪽에서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뭘 얼마나 파악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저도 효윤이 의견에 찬성이에요. 일단은 신중하게 칸들의 의향을 파악하는 게 좋겠어요.”
리안은 견하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고 루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루우는 한숨을 내쉬곤 손을 살짝 내저으며 “알겠어”라고 짧게 대답했다.
***
항상 모든 일에 침착하게 거리를 두던 루우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흥미롭기도 했지만, 루우에 대해 탐구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보다는 당장 닥친 울제이 칸과 게레센제 칸의 문제를 다뤄야 했다.
리안은 총대주교에게서 관을 받아 드는 루우의 모습을 보면서도, 슬쩍 그녀의 숙부들을 살폈다.
대관식 자체는 그림으로 그린 듯이 진행됐다.
신성 제국의 나폴레옹 1세가 그러했듯,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는 카라코룸 총대주교 레오 6세로부터 관을 받아 스스로 머리에 썼다.
시레문 카간의 의복처럼, 이 관도 옛 유목민의 양식과 유럽의 왕관이 융합된 형태였다. 황금 연꽃이 활짝 피어난 것 같은 하단부 위에, 덮개와 네스토리우스 십자가가 얹혀 있다.
루우가 옥좌 앞에 서자, 그녀의 아버지와 숙부들은 대등한 국가원수의 입장에서 손을 가슴에 대고 예를 표했다. 루우 역시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관식이 끝났다. 루우는 그녀가 전하고 싶었던 그녀의 ‘의향’을 친척들에게 전했을까?
대관식 후 이어진 연회에서, 루우는 숙부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잡았다.
“축하한다, 조카. 아, 이제는 황제 폐하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계속 애 취급을 할 수는 없으니.”
삼형제 중에선 막내였지만, 덩치도 인상도 괄괄한 사내, 울제이 칸이 그렇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우리 가문 사람끼리만 모인 자리에서는 귀여운 조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여긴 고려의 황궁이니 격식을 갖춰야겠지. 그게 훨씬 후대의 황실 간 교류에도 도움이 될 거고.”
삼형제 중 둘째, 키는 울제이 칸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보다 학자풍 인상의 게레센제 칸이 그렇게 말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무례한 언동은 없었다. 두 남자는 진심으로 조카의 즉위를 축하하는 듯했다. 친밀감을 표현하면서도 기품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가문, 보르지긴의 우아함인가.
“두 분 숙부님, 이렇게 조카의 고집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불편하진 않으셨는지……?”
“불편할 게 있나? 고려의 황제께선 숙부의 조카 사랑을 너무 작게 보셨던 듯하오. 기억할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언제나 형님의 혈육, 작고 사랑스러운 조카요.”
그렇게 말하고 울제이는 껄껄 웃었다. 게레센제도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다.
“혹시라도 폐하께서 즉위하신 게 숙부들에겐 도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했다면, 그 생각은 접어두길 바랍니다.
우리 형제는 각기 맡은 공적인 이해관계가, 가족들 사이의 일까지 끼어드는 걸 바라지 않으니까요.”
루우는 게레센제의 그 말을 듣고 살짝 놀랐다. 게레센제의 표정에도, 어조에도, 악의는 없었다. 게레센제는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하지만……!”
게레센제도, 울제이도 고개를 저었다.
“루우 테무르, 형님께서 우리에게 드넓은 영토를 봉토로 주신 건, 야심만만한 동생들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야.”
“그건 무거운 결정이었지. 승전국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한 패전국 주민들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릴 때 형님의 얼굴을, 나는 잊지 못한다.”
루우는 머리가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아버지도, 숙부들도.
“카간 자리에 대한 야심이 없는 건 아니시잖아요.”
“그건 맞아. 우리 둘 다 카간이 되고 싶지.”
솔직하게 인정하는 울제이의 말에 루우는 말을 잊었다. 그 사이 게레센제가 말을 잇는다.
“우리 생각은 이래. 적어도 형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한 집안사람들끼리 싸우고 싶지 않다. 형님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
“루우 테무르, 네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라 잘 모를 수는 있겠지만, 격동의 세월을 거친 우리 형제 사이엔 ‘우애’라는 게 있단다.”
“그리고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도 사실이지.”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과, 조카와 황위를 두고 경쟁할 수도 있다는 사실 사이에 그 어떤 모순도 없나요?”
게레센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음울해 보이면서도 온화한 그 미소를, 루우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황금 가문’ 사람들, 그리고 우리 같은 고귀한 사람들은 ‘의무’를 타고난다. ‘국가’나…… 어떤 집단을 이끌어야 할 의무지. 황위의 계승 같은 문제는 바로 그 ‘의무’에 속하는 일이고, 또한 의무는 공적인 일이란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은 ‘사적’인 일이지.”
“우리 같은 고귀한 사람들은 사적으로는 마음이 아플지라도, 공적으로 그게 자신이 이끄는 집단에 도움이 된다면 실행해야 해. 반대로 공적인 일로 집단 사이에 다툼이 있더라도, 그게 사적인 감정싸움으로 번지면 안 돼. 그래야 우리 고귀한 사람들의 ‘품격’이 지켜지는 거야.”
“이를테면…… 기업의 승계를 놓고 다투는 부르주아 집안의 자식들이야말로 품격이 없는 자들이지.”
“돈만 많이 벌었다뿐이지, 머리에 든 생각은 여전히 천민과 다를 바 없어. 비아냥거리고 모욕하고, 그걸 귀족처럼 우아하게 싸운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런 모욕을 주고받으며 우아하게 와인을 기울이는 짓이야말로 천하기 짝이 없지. 진정 고귀한 사람이라면 그런 모욕을 줄 때 목이 잘릴 각오를 해야 하고, 또 모욕을 받으면 칼을 꺼내든 활로 쏘든 해야 하는 거야.
아, 요즘에는 총으로 하는 결투도 포함되던가? 어쨌든 그러기 싫다면 진심으로 화목하게 지내야지.”
“그게 고귀함이라고, 숙부들은 생각한다.”
루우는 말없이 듣고만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 훨씬 상쾌한 미소가 소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두 분 숙부님의 가르침, 감사합니다. 이 조카, 숙부님들을 존경하지만, 절대로 예케 몽골의 카간위 계승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울제이는 씩 웃었고, 게레센제는 미소를 술잔으로 감췄다.
“그래야 황금 가문의 딸 답지. 고려의 황제께서도 어엿한 ‘보르지긴’이시군. 열심히 덕을 쌓아, 그 자리에 어울리는 군주가 되시게.”
“혹시 모르지. 우리 귀여운 조카가 우리보다 훨씬 카간에 적합한 군주로 성장하면, 늙은 숙부들은 ‘황실의 큰 어른’으로 만족할지.”
루우도, 게레센제도, 울제이도 웃었다. 루우는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않았지만, 가슴 한구석에 차오르는 충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이런 식으로 평화의 시대가 열릴 수 있을까.
***
대관식 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덕분인지,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키타이와 낭키아스, 몽골은 고려가 제안한 산동 분할안에 별다른 반대 없이 응했다.
“어쨌든 4개국은 세계대전에서 태평천국을 물리친 동맹이니까요. 패전국의 점령지 재분할 문제에는 성실하게 대응해야죠.”
게레센제 칸의 말이었다. 신수덕의 학살극은 승전국에 대한 한족들의 반발심을 극도로 끌어올렸을 게 뻔했다. 이 반발심을 조금이라도 무마하려면 연합군의 손으로 신수덕을 끝장내고, 산동을 다시 통제 아래 둬야 한다.
“그리고 미쳐 날뛸 한족들로 가득 찬 산동을, 고려 혼자 부담하게 내버려 둘 수도 없죠.”
울제이 칸의 말이었다. 게레센제와 울제이는 이미 개봉에서 고려의 제안에 협력하기로 이야기를 마친 모양이었다.
내전 초에는 고려의 국력에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 생각으로 허동주를 지원했지만, 루우를 옹립한 고려의 중앙정부가 생각보다 빠르게 반란군을 제압했다.
때문에 이들은 루우나 리안이 허동주 지원 문제를 꺼내기 전에, 산동의 부담을 나눠 갖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더해, 울제이 칸으로서는 고려를 도움으로써 한 가지 이득을 노려볼 수 있었다.
새로운 산동 분할안에 따르면 낭키아스가 고려령 산동의 남부를 갖고, 키타이가 서부 및 낭키아스 점령지보다 북쪽의 땅을 갖게 된다.
즉, 키타이는 이번 분할을 통해 내륙국 신세에서 벗어나 바다를 면한 땅을 보유하게 된다.
울제이 칸의 머릿속에는 비록 고만고만한 어촌밖에 없는 땅일지라도 열심히 항구로 개발해볼 구상안이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몽골은, 전에 고려 황제 폐하와 협의했던 대로, 국경을 확정하는 한편, 고려 내 몽골계 주민들의 이주에 착수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몽골군 역시 산동으로 출병하겠습니다.”
시레문 카간의 말이었다. 몽골은 산동의 북동부 해안을 받고, 반도 끄트머리를 고려와 공동 관리하게 된다.
고려의 서북부에 사는 몽골계 주민도 만만치 않은 숫자인데, 여기에 ‘절대로 복종하지 않을’ 산동의 한족 주민들까지 끌어안는 것이다.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새로운 분할안과 연합작전의 결과, 몽골은 칸발리크에서 발해만을 따라 이어지는 긴 해안선과, 산동반도라는 새로운 해양 진출 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를 얼마나 잘 다뤄서 실보다 득이 크게 할지는, 전적으로 시레문 카간과 몽골 정치인들의 역량에 달렸다.
“고려군은 즉각 산동으로 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동맹국들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고려군은 칸발리크 일대의 통과를 허락받았다. 몽골이 새로 얻을 영토를 따라 전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