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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71화 (71/541)

즉위식(7)

차를 타고 황궁으로 가는 동안, 부녀는 한참 말이 없었다.

리안이나 견하는 다른 차를 타고 오기 때문에, 이 안에서는 몽골어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눠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루우는 어쩐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레문 카간이 먼저 입을 뗐다.

“황제가 돼 보니 어떠니.”

“어떻다…… 할 것도 없어요. 며칠 되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정치적으로 뭔가 개입한 일도 아직 없다. 야심과 지식은 있지만, 루우에겐 아직 리안 만큼의 경험도 없었다. 올 한해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냥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무겁지 않니.”

“…….”

루우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시레문은 딸의 침묵이 긍정임을 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신분’은 사실상 사라지고 모든 인민이 법적으로는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왔지. 하지만 ‘군주’는 그런 세상 속에 남은, 몇 안 되는 ‘고귀한 신분’이야.”

하지만 ‘고귀하다’는 것은 말뿐이다. 모두가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평등한 세상에서 홀로 다른 신분으로 남았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육체는 분명 사람인데, 인민들은 신과 같은 기품을, 도덕을, 책임감을 요구한다.

바라서 군주의 자리를 얻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그 외의 선택지가 없었던 사람’은 어떨까.

그런 사람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길 바란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의 진정한 꿈일까? 아니면 주입된 꿈일까.

고대나 중세의 절대군주들은, 가뭄을 비롯한 천재지변도 ‘군주가 부덕한 탓’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아하게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국 그 말은 군주더러 ‘재수 없는 새끼’라고 말하는 것이다.

입헌군주제가 자리 잡은 근대에 이르러 그런 미신은 상당히 타파됐지만, 여전히 군주의 책임감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는 남아 있다.

그게 말뿐이라 할지라도.

말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실제로 그렇든, 그렇지 않든 사람의 정신에 작용하는 것만으로도 무게를 갖고 짓누른다.

군주는 인민을 통합하며, 국가가 꿈꾸는 고귀한 이상을 사람 모양으로 빚은 상징물이라고 규정한 헌법의 문구 하나. 그것은 무색무취의 독처럼 군주라는 인간의 정신을 좀먹고, 삶을 기형적으로 뒤틀어 버린다.

시레문은 딸에게 묻는다.

“앞으로 평생 그런 삶을 견디면서 살 수 있겠니.”

소녀의 몸으로 황제가 된 딸은 되물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건가요?”

“네가 원하지 않는 무게를 지고 사는 걸 바라지 않는단다.”

루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 세계를 무자비하게 휩쓴 칭기스 카간도 자식의 아픔에 눈물지었다 들었다. 지금 이건 부성애, 같은 걸까?

“저더러 카간위 계승권을 포기하라고 하셨던 건, 절 생각해서 그런 거다,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신 거예요? 지금 와서 그런 말씀을 왜 하시는 거죠?”

“네가 솔롱고스(高麗)의 황제가 되었으니까. 이제 그 자리의 허상뿐인 영광과 무한한 의무를 알았을 테니까.”

루우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미소를 띄웠다. 그 미소가 비웃음이라는 걸 안 시레문의 눈동자가 안타까움으로 흔들렸다.

“지금 하시는 말씀이 타국의 국가원수를 상대하는 말로는 굉장히 무례했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군요. 여기서 분명하게 이야기해 둘게요. 저는 계승권을 숙부님들한테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아버지는 저에 대한 사랑을 보이시기 전에 자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좀 기르셔야겠어요. 저는 제 계승을 가로막으면 그게 뭐든 주저 없이 피를 쏟게 할 겁니다.”

***

루우와 시레문 모두, 차에서 내릴 때는 감정과 관계없이 화사한 얼굴로 내릴 수 있도록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양국의 우호를 나타내는 몸짓을 하며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시작된 식사도 그럭저럭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끝났다.

잠시 휴식을 가진 뒤, 황궁 내 마련된 귀빈실에서 몽골과 고려의 국가원수 간 정상회담이 시작됐다.

일단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혁명군을 돕기 위해 들어왔지만, 여전히 서북부에 죽치고 앉은 몽골군 문제였다.

“제가 고려의 황위에 올라, 옛날처럼 두 나라의 황실이 한 가문이 되었습니다. 역적들을 제압하고 나라의 근본을 다시 세울 수 있게 해준 몽골의 우호에 감사드립니다.

아직 산동 일대에 반란군이 남아 있지만, 그 외 지역에는 평화가 돌아왔으니 이제 비상조치들을 해제하고, 양국이 화합의 미래를 열어갈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리안이나 안세규와 미리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루우는 매끄럽게 말을 꺼냈다.

‘비상조치의 해제’는 몽골군을 국경 너머로 물려달라는 요구를 돌려 말한 것이다.

‘양국의 화합된 미래’는 이제는 국경 문제로 걸고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부드러운 압박이었다.

‘다만…… 미리안도 안세규도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서북부로 들어온 몽골군은 단순히 루우를 황위에 올리라는 압박은 아니라는 점이다. 루우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게 아버지, 시레문 카간의 본심일까? 그냥 루우의 마음을 흔들기 위한 거짓일까? 거짓이라면 목적은 뭐지?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루우에게 자녀는 없다. 그렇다면 루우의 사망 시 가장 고려의 계승권에 가까이 있는 건 시레문 카간…… 아니, 지나친 생각이다.

시레문이 루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해묵은 국경 문제입니다만, 서로 적대하지 않을 거라면 그 문제를 오래 남겨두는 것도 좋진 않겠지요.

같은 몽골인 동포들이 사는 땅은 모두 몽골의 영토라고 하는 주장에는 분명 무리한 부분이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이 항상 일치를 이루는 건 아니니까요. 고려에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 아니고요.”

영토는 그 영토 위에 사는 인민의 수 때문에 가치가 있기도 하지만, 그 외의 가치들도 있다. 군사적 가치가 있고, 지하자원의 가치가 있다. 지표면의 숲도 훌륭한 자원이다.

앞으로 그 지역을 어떻게 개발할지에 따라 가치가 치솟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기존 국경을 영구히 확정하기로 합의한다고 해서, 미래의 재앙까지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습니다.

후세의 누군가가 우리의 합의를 무효다, 라고 억지를 부리며 사람들을 선동하면 그게 다시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습니다. 갈등의 불씨는 그 근본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시레문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귀빈실 안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그들에게도 들으라는 듯 말했다.

“두 친구가 사이좋게 지내려면, 함께 만나서 어울려야겠죠. 하지만 어울려 놀고 나서도 같은 집에서 계속 먹고 잔다면 분명 갈등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케 몽골 울루스’는, 고려 제국에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고려의 서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몽골계 주민들을 몽골 영토 내로 전부 집단 이주시킬 계획입니다. 몽골군은 주민들을 호송하는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할 것입니다.

고려 측에는 주민의 이주와 정착에 드는 비용 일부를 지원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통역의 말을 듣고 있던 리안과 견하의 눈이 커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몽골 측에서 갖은 핑계를 대면서, 철군의 대가를 요구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이쪽에선 산동의 영토를 내놓아서 거래에 응할 셈이었는데…… 그쪽 협상은 또 따로 방법을 궁리해야 할까?

어쨌든 시레문의 제안은 고려에는 반가운 이야기였다. 그의 말대로, 장래에 있을지도 모를 불화의 가능성은 주민 이주를 통해 상당 부분 없어질 것이다.

국경을 확정하고 몽골과의 긴장 상태를 끝낸다면 고려의 남는 여력을 다른 곳에 쏟을 수 있다.

루우는 ‘우호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시레문의 말을 받았다.

“내각과 협의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다만 주민 이주 문제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또 고려 내부의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고려는 우호의 증표로 몽골이 이 문제에도 협력해 주길 부탁드립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다만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도착할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칸들도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봅니다.

산동 지역의 문제는 태평천국의 영토를 분할한 주변국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시레문은 산동 이야기가 나오리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다른 모두는 시레문이 노리는 바를 예상하지 못했다.

***

주민의 이주는 몽골에도, 특히 시레문이 마음을 쓰고 있는 정책에도 도움이 된다.

고려의 내전과 함께 몽골 내 반황파(反皇派) 집단인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활동도 한층 격렬해졌는데, 몽골계 주민들을 몽골 영토 내로 이주시키면 그들의 활동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을 듯했다.

몽골의 의회, ‘쿠릴타이’의 의원 중에는 이 ‘범 알타이 인민동맹’과 연계된 이들이 있다. 이들은 고려의 내전에 개입한 김에 고려의 서북부, 몽골 기준으로는 동방을 합병하자고 주장한다.

이들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몽골이 광기의 시대로 빠져든다. 아예 타국을 침범할 구실 자체를 없애버리는 게 좋다.

이주한 주민들은 카라코룸을 비롯한 내륙 지역에 분산 배치할 계획이다. 언젠가는 칸발리크가 아니라 카라코룸을 새로운 몽골의 수도로 삼고, 고려에 버금가는 산업국가로 키울 것이다.

카라코룸은 유럽에서 고려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철도무역의 중심도시가 되리라.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외교, 정치, 국익 같은 문제로만 움직인 것은 아니다. 여기엔 시레문 개인의, 사적인 감정도 들어 있다.

가능하다면 말리고 싶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자리에 딸을 밀어 넣을 정신 나간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딸은 ‘이단’으로서의 능력을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비인간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불태웠다.

“말릴 수 없다면, 응원해줘야겠지…….”

딸이 황제라는 꿈을 꾼다면, 아버지는 그 꿈을 지켜주자.

이 사사로운 생각이 부디, 더 큰 피를 불러오는 일이 없기를.

동아시아 각국에 평화와 안정이 자리한다면, 딸은 마음껏 황제의 꿈을 펼칠 수 있겠지.

그 아이가 황제 자리에서 짊어져야 할 책임과 압박을 모두 덜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남은 생애, 아버지가 최선을 다해 평화의 시대를 열어, 무난한 치세를 보낼 수 있도록 해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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