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식(6)
“정치경찰실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실장 아래에 여러 국장을 둘 생각이라면서?”
“물론 형식적인 거고, 내가 ‘수석’ 국장이 되겠지만.”
“당장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어.”
견하가 얼굴에 의문을 띄우자, 재연은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누구든, 형식적으로라도 너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되면, 그다음은 너보다 위에 서고 싶어 할 거야.”
아까 말한 대학교 내 조직의 장을 고를 때와 같은 이치야, 라고 재연은 덧붙였다.
“실질적인 역할을 맡길 것도 아닌데 조직의 규모만 불려봤자, 네가 관리하기 힘들어.”
솔직히 학업을 병행하면서 리안이나 루우 쪽 일, 그리고 소년감찰국 일을 함께 처리하는 건 무척 힘들었다.
“일반 국민의 감시, 언론의 검열은 각각 일반 경찰이나 군, 그리고 태사부나 내각의 다른 조직에서 맡고 있지.
그들과 중첩되는 역할을 맡아봤자, 실제로 일은 못 하고 그들과 갈등만 빚다가 날 샐 거야.”
옳은 말이었다. 정부 내에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게다가 나제홍 실장에게 옛 부하들을 데려와도 좋다고 했다면서? 나제홍이 무해한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무해한 인간도 세력을 얻으면 엉뚱한 마음이 올라오게 돼 있어.”
“으음…….”
견하는 자신의 실수를 반성했다.
“나제홍은 너와 태사 사이의 허수아비지. 허수아비는 적당한 때마다 새 걸로 갈아줘야 해. 나제홍이 자기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기 전에,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은퇴하게 해주고 새로운 인물을 앉혀야겠지.”
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학습이 빠른 학생이었다.
재연이 말해 준 모든 것은, 언제든 재연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걸 재연은 알고 있을까?
알 것이다. 그렇다면 재연은 견하가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것보다 옛 추억에 더 무게를 두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겠지.
견하의 마음이 다시 움직일지 아닐지는, 견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재연에게는 충분한 감시를 붙여뒀지만, 그래도 불안하긴 했다. 양수영을 비롯한 옛 천손민족협회 출신들과 무슨 모의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재연 자신도 말했던 것처럼, 견하는 재연이 ‘내부의 적’이 될 경우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만들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안전장치까지 만들어 둔다고 해서, 리안이나 루우가 재연을 용납할지도 알 수 없었다.
파벌이고 어쩌고 간에 천손민족협회는 반역자를 지지한 사람들.
물론 그중에는 충성심이 강한 자도 있고, 그냥 호기심에, 친구를 따라 가담한 자도 있다. 그 정도로 천손민족협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의 범주는 넓다.
그런데 재연은 허동주의 사상에 깊이 관련되어 있고, 글도 많이 발표했다. 루우는 몰라도 리안이 용서해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내전으로 피까지 봤다. 리안도 루우도, 피 값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긴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재연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다. 아무리 남자친구의 옛 친구라고 해도 리안은 목을 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리안을 설득할 수 있을까.
견하도 재연과 옛날 같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은 품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은 살려두고 싶다.
“……안세규 쪽에서는 철저하게 배척하겠지.”
그렇다면, 거기에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리안에게 안세규의 청년, 소년 조직과 맞설 우리만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걸 잘 이야기한다면, 그리고 그런 조직을 만드는데 재연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설득할 수 있다면.
“목숨 정도는 붙여놓을 수 있을까…….”
리안과 루우는 며칠 안에 이 사실을 알게 되거나, 이미 알지도 모른다. 가능한 한 빨리 생각을 정리해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한다.
***
그래도 재연이 와 준 덕분에 일 처리의 효율이 늘었다. 그렇게 견하의 시간에 조금 여유가 생겨, 당장 닥친 또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시레문 카간이 곧 동명에 온다는데, 기본적인 공부는 해둬야겠지.”
기본적인 공부의 첫걸음은, 역시 역사다. 그래야 시레문 카간의 ‘공적’인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시레문 카간의 일생이나 행적을 통해 ‘사적’인 부분을 알아내는 건 그다음이다.
고려 제2제국이 성립한 이후, 몽골은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했다. 물론 주로 고려와 친하게 지내고, 명나라와는 대립했지만.
문제는 이른바 ‘중원’을 상실한 후 부족 간 갈등이 불거졌다는 것이다.
원래 칭기스 카간이 초원을 통일하기 전부터 있던 극심한 부족 간 갈등이, 카간이 중원 대부분을 상실했음에도 계속 칸발리크에 머물자 터져버렸다.
이 때문에 몽골은 내적으로 부족 간 갈등을 무마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남쪽의 명나라는 수도 칸발리크를 위협하고, 때로는 초원의 카라코룸을 노리는 장거리 원정까지 감행했다.
게다가 동쪽에서는 고려가 몽골의 ‘동방 왕가’들을 이용해 때때로 몽골 내 갈등에 간섭하기도 해서, 도저히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몽골 카간들은 부족 간 내전은 어떤 식으로든 피해야 했다.
카간들은 타협을 선택했다. 타협은 카간이 권력을 어느 정도 양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대신 몽골어로 태사를 뜻하는 ‘타이시’나, 전통적 회의기구인 ‘쿠릴타이’의 권력이 강화됐다.
학자들은 이를 ‘몽골식 입헌군주정’의 시작이라 본다. 전에 루우도 한 번 이야기했었지.
“시레문 카간은…… 이런 입헌군주정의 전통을 존중하는 군주인가…….”
딱히 쿠릴타이와 갈등을 빚지도 않고, 정치적으로 전면에 나서거나 하는 일 없이 조용히 ‘군림’만 하는 군주다.
그가 고집을 세운 일은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철도망 건설 정도인데, 이거야 세계대전 이후 몽골 국민 다수가 바란 일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그렇게 카라코룸의 개발에 노력을 쏟았음에도, 칸발리크에서 카라코룸으로 천도할 계획은 아직 없는 모양이다.
“신중하면서도 급격한 변화를 싫어하는 성격인가…….”
변화로 거둘 이익보다, 변화로 인한 부작용을 더 염려하는 성품일 수 있다.
세계대전을 통해 고려의 동북부가 대규모 공업지대로 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몽골은 카라코룸 일대의 공업을 발달시켰다.
지도를 놓고 보면 지금 몽골의 수도인 칸발리크는, 카라코룸을 비롯한 다른 지역과 동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수도를 옮기지 않는 건, 칸발리크 일대가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북극해도 바다니 엄밀하게 따지자면 ‘유일’은 아니지만, 북극해는 ‘제대로 쓸 수 있는’ 바다, 즉 ‘부동항이 있는’ 바다가 아니다.
리안이나 견하가 노리는 건 바로 이 부분이다.
칸발리크는 몽골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출구다. 하지만 고려의 요동과 산동은, 몽골이 황해로 나가는 길을 가로막듯 늘어서 있다.
고려의 견제로 인해 지금까지 몽골은 해상무역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기 힘들었고, 해군을 크게 키우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산동반도 일부를 몽골에 넘긴다면? 혹은 공동 통치령으로 한다면?
몽골의 협력을 얻어 산동의 반란군을 진압한다 해도, 신수덕이 벌인 학살극으로 인해 고려가 그 지역을 제대로 통치할 길은 막혔다고 봐야 한다.
차지하고 있어봤자 한족들은 이때까지 없었던 격렬함으로 저항할 테고, 고려는 거기에 끝없는 비용을 지출할 것이다. 피든, 돈이든.
고려는 그런 부담을 질 생각이 없지만, 몽골은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다. 그 부담을 지고서라도, 안정적인 바닷길을 확보할 수 있다면…… 괜찮은 거래가 아닐까.
루우가 시레문 카간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설득하는 게 이번 정상회담의 과제다.
“물론 국민은…… 동명시의 안보에 필요한 산동을 양보했다는 이유로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둔 바가 있다. 리안이나 안세규는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견하는 루우의 ‘동군연합’ 구상이 그리 허황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굳이 몽골과 고려가 완전히 통합될 필요는 없어. 두 나라가 아주 가까운 사이이기만 해도, 경제적으로는 충분한 이득을 거둘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적이 들려왔다.
동명역으로 들어오는 기차. 정식 방문이 아니라 비밀리에 들어오는 것이기에 일반 열차와 별반 다르지 않은 외관이었다.
그래도 저 안에는, 이웃 나라의 황제가 타고 있다.
안 그래도 삼엄했던 경호가 더욱 긴장감을 띠어간다. 견하는 루우와 리안의 뒤에 바짝 다가섰다.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일까. 어떤 목소리로 말할까. 어떻게 생각을 바꿀까.
시레문 카간이 내리기 몇 초 전, 그런 흥미가 견하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
시레문 카간은, 허동주나 안세규, 류성일과는 또 다른 인상의 남자였다.
구레나룻과 이어진 수염이 턱과 입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수북했다. 그런 수염을 기품있게 다듬어 지저분하지 않고 푸근한 느낌을 준다.
콧날도 우뚝해서,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페르시아인이나 투르크인 같은 느낌이 강하다. 견하는 교과서에서 봤던 티무르 왕조의 시조 흉상을 떠올렸다.
‘하긴 보르지긴 가문에는 페르시아인이나 투르크인 혈통도 많이 섞였을 테니까.’
칭기스 카간 이전부터 유목민들 사이의 교류와 통혼의 폭은 넓었으니, 이런 외모가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루우도 약간 서구적인 미인상이던가…….’
시레문 카간이 천천히 다가왔다. 견하는 그의 옷차림 쪽으로 생각을 옮겼다.
지금은 고려도 그렇지만, 몽골의 복식에서는 더욱 유럽풍 느낌이 난다.
전통 복식의 기본 틀이 몸매에 딱 맞게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소매나 옷깃에서 브리튼이나 프랑스식을 차용한 흔적이 보인다.
프랑스가 신성 제국의 중심국가가 되고, 브리튼이 아프리카와 인도양, 태평양 일대에 식민지를 펼치면서, 그들의 의복 양식은 점차 유럽 대륙 전체로, 그리고 식민지가 아닌 나라로도 퍼져나갔다.
태평천국의 전신인 주나라는 에스파냐령 마카오를 통해 영향을 받았다. 마자파히트나 일본공화국도 마찬가지이며, 몽골은 루스계 공국에서 건너온 탐험가들이나 그들의 종주국인 로마 제국의 양식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문화들이 서로 뒤섞여가는 1929년의 세계에서, 그 융합된 문화가 만들어낸 최상급 예복을 걸친 두 사람이 마주 다가가 악수를 나눈다.
사적으로는 부녀관계지만, 지금 여기는 대등한 국가 원수끼리 만나는 자리.
루우는 몽골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통역관에게 눈짓한 후 고려어로 말을 한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려 방문을 환영합니다, 시레문 카간.”
시레문 역시 전혀 어색함 없이 그 말을 받았다. 그의 말은 몽골어였다.
“고려 황제의 따뜻한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루우는 준비된 차량 쪽으로 시레문을 안내했다.
“가시죠. 회담도 회담이지만, 먼저 여독부터 푸실 수 있도록 식사를 준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