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식(3)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대사들이 나가고 나서 얼마 후.
주견하가 접견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사들이 나가면 들어오라 지시해뒀었다.
견하의 의견을 들어보고 다른 장관들과 의논할 생각이다.
그의 표정도 어둡긴 마찬가지였다.
“신수덕이 그렇게 극단적인 움직임을 보일 줄은…….”
풀죽은 얼굴이었다.
솟아올랐던 짜증과 소년에 대한 안쓰러움이 겹쳐,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견하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견하의 얼굴을 잡고, 발돋움한 다음, 입술을 겹쳤다.
당황한 나머지 굳은 입술에 억지로 입술을 붙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부드럽게 풀린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살며시 밀어 넣는다.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골치 아픈 일들도, 중압감도 멀리멀리 사라지는 것 같다.
문득 정신 차려야겠다, 고 생각했을 때는 견하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듯 안겨 있었다.
“……견하 군 잘못은 아니지. 누구도 신수덕이 저런 난리를 치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각하 잘못도 아니에요.”
“하지만 곧 내 잘못이 될 거야.”
견하의 손을 잡아끌며 리안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견하는 그 앞에 서서 상기된 얼굴로 리안을 내려다봤다.
“원래는 너와 루우가 산동에 잠입해 한족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한다는 계획이었지.”
“이제는 그 방법을 쓰기 힘들어요. 그 지역 한족 중에 우리와 협상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일이 뜻대로만 풀리진 않겠지. 이렇게 의표를 찔릴 때도 있는 법이야. 이번엔 신수덕이 우리를 앞지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우리도 그자를 앞지를 방법을 생각해보자.”
한족 독립운동가 중 온건파와 협상해, 그들과 함께 신수덕을 물리치는 계획.
그대로 풀렸다면 꽤 괜찮았을 것이다. 산동의 한족 자치권은 대폭 확대되고, 한족은 식민지 주민이 아니라 고려의 정식 국민으로 참정권까지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족 청소가 시작되고, 민족 사이의 골이 깊어지면, 한족은 그런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피지배 민족은 언제든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게, 신수덕을 통해 입증됐으니까.
고려 제3제국 정부가 신수덕과 대립한다고 해도, 한족들에겐 똑같은 ‘고려놈’들일 뿐이다.
리안이 약속을 뒤엎고 한족을 노예화하겠다고 선언하면, 한족 독립운동가들은 그냥 지배자들을 위한 좋은 일을 한 꼴이 된다. 똑같은 학살이 언제든 반복될 여지를 남긴 채.
“어떻게든 고려의 힘으로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해. 가능한 한 빠르게.”
“그래도 다소간…… 키타이와 낭키아스에 영토를 넘겨줘야 할지도 몰라요.”
신수덕의 반란군을 진압하기는 쉬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신수덕이 이렇게 휘저어 놓은 산동을 고려가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까?
한족들의 반고려 감정은 최악일 테고, 그걸 억누르려면 얼마만큼의 군사력을 투입해야 할지 모른다. 인원과 물자를 더 투입하는 선에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겠지.
쉼 없이 이어지는 무장투쟁과 진압 작전에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산동반도야 유지하겠지만, 서쪽이나 남쪽 일부는 키타이, 낭키아스에 양보하는 게 낫겠네. 영토를 할양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한족 통치의 부담을 덜 수는 있겠지.”
영토 할양이라…… 그러고 보니 아직 서북부 지역을 몽골군이 무단 점령하고 있는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식민지인 산동과 달리, 본토인 이쪽은 절대 할양할 수 없다.
몽골…… 몽골이라?
“누나, 분명 우리 군이 육로로 산동에 들어가려면…… 몽골 영토를 지나야 하죠?”
“……? 그렇지. 몽골의 수도 칸발리크와 그 주변 지역이 가로막고 있으니까.”
“산동의 서쪽과 남쪽을 키타이, 낭키아스에 양보한다면, 북쪽 일부도 몽골에 할양할 수 있겠네요.”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리안의 눈도 커졌다.
“그런 조건으로 우리 군의 통과를 요구하면, 좀 더 빠르게 신수덕을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쪽 공군기지를 빌리면 제공권 장악도 가능할 거고요.”
“그리고 우리에겐…….”
몽골 카간의 딸, 루우가 있다.
“안세규 장관과 이야기를 나눠보시는 게 좋겠어요. 즉위식이나 루우가 요청한 대관식에 관해서 카간이 만족할 만한 걸 던져주면, 괜찮은 협상이 가능할지도 몰라요.”
“알았어.”
리안은 씩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접견실을 나가려 했다.
그러다 문득, 견하에게 등을 보인 채 멈춰 섰다. 귀가 빨개졌다. 그녀의 손은 아직 견하의 손가락 끝을 잡은 채였다.
“오늘…… 같이 있지 않을래?”
견하는 천천히 돌아서, 리안의 볼에 입을 맞췄다. 조금만 힘을 주면 찢어질 듯 얇고, 부드러운 종이 위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리안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이다, 견하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제가 산동에서 할 일들을 검토해보려고 해요.”
리안은 작은 한숨을 내쉬곤, 아쉽다는 듯 미소지었다.
“어쩔 수 없지 뭐.”
***
환구단에서 황제가 자신의 즉위를 하늘에 고하는 제사.
견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 의식을 치르는 루우의 모습을 관찰했다.
견하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청초해서.
소녀의 옆얼굴과 목덜미가 유독 하얗게 빛났다.
무심코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보고픈 그 투명한 피부를 보고 있자니, 새삼 그녀가 리안 못지않은 미인임을 느끼게 된다.
카메라가 그녀의 사진과 영상을 담는다. 사진은 신문에 실릴 테고, 극장에서는 영화 상영 전에 이 영상을 먼저 보여주겠지.
하지만 싸구려 종이에 잉크로 펴 바른 사진이 루우의 이 모습을 전할 수 있을까? 소리도 나오지 않는 흑백 영상이 루우의 온기를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걸 본 사람들은 분명 우리 황제 폐하가 아름답다고 말할 것이다.
이성으로 느끼기 이전에, 순수하게, 루우는 아름다웠다.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환구단 안에 울려 퍼진다.
즉위를 하늘에 고하는 루우의 목소리였다.
정확한 발음으로, 많이 연습해서 이젠 익숙하다는 듯, 정해진 문구를 읊어나간다.
고어(古語)가 많이 섞여서 견하는 그 내용까지 파악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루우가 잘하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외면보다 내면이 중요하다는 말은, 반드시 옳다고만 할 수는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수려한 모습과 귀에 바로 들리는 목소리는, 추한 외모나 끽끽 대는 목소리보다 훨씬 강한 힘이 있다.
아름다운 외면은 큰 자산이다.
만약 루우의 외양이 추했다면, 이렇게 황제가 되는 건 불가능했거나…… 그녀의 지지자들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생을 했겠지.
불공평하고 가혹하지만, 분명 이것은 세상의 진실한 측면이다.
진실을 외면하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자들에게 권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하긴 생각해보면…… 루우가 추한 외모로 태어날 확률은 거의 없었겠지.
먼 중세에 카간과 황제들은 거리낌 없이 미인을 취하고 그녀들에게서 자손을 봤을 것이다. 귀족들도 마찬가지로 미인을 처첩으로 들이고, 그렇게 고귀한 혈통들은 고귀한 만큼 아름다워졌을 테지.
미인들도 일찍부터 외모에 어울리는 신분을 찾아 위로, 위로 향했을 것이다.
근세에 이르러 나라의 기틀이 잡히면, 그런 아름다운 이들끼리 결혼을 거듭하고……
그러니까 루우는, 고귀한 신분들이 아름다운 외모만을 취했던 결과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잡생각이 길었던 걸까. 의식이 마무리됐는지 루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천천히 물러나, 몸을 돌려, 환구단 아래에 선 그녀의 신하들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미리 마련된 황금 의자에 앉았다.
견하는 더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몸을 옮겼다. 옮긴 자리에서는 황제인 루우 뿐만 아니라, 예복을 차려입은 리안도 보인다.
백관(百官)의 우두머리로, 가장 앞에 당당하게 선 그녀 역시, 아름다웠다. 왠지 모르게, 견하는 그 모습이 뿌듯했다.
리안과 관료들은 무릎을 꿇고, 면복을 바쳤다.
루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안이 루우 곁으로 올라와 면복을 입혔다.
리안은 다시 내려와, 이번에는 어보(御寶), 즉 황제의 도장을 건네받았다.
“신(臣)들이 삼가 어보를 올립니다.”
루우의 곁에 있던 다른 신하가 옥새를 받아 상자에 넣었다. 리안과 신하들은, 머리를 세 번 바닥에 조아렸다.
그리고 리안은, 작은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한 기백으로,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새된 목소리가 나오리라 예상했던 사람들은 퍼득 놀라 리안의 뒤를 이어 만세를 외쳤다.
울려 퍼지는 만세 아래, 공식적으로 고려 제3제국 새 황제의 치세가 시작됐다.
***
표면적으로는 그랬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먼저 그간 임시로 사용하던 황궁 각 시설 문제. 태사부가 파괴된 리안이나,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지 않던 견하도, 세린전을 나가야 했다.
용이 비늘을 씻는 집,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린전은 황제의 침소로 예정된 곳이었다. 당연히 루우와 내관들만 세린전에서 머물 수 있었다.
내관들이 환관이 아니라 황궁에 고용된 일반 공무원이라는 점은 전근대와 달랐지만.
“예전처럼 자운전 앞에 태사부를 재건할 수도 없고, 세린전에서 잘 수도 없어. 현통전 근처의 빈 건물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아.”
황제의 집무 공간인 현통전 우측, 그러니까 황궁 서쪽에 있는 적당한 규모의 건물이 새로운 태사부가 됐다.
리안은 황궁 중앙을 향한 건물을 집무실로 두고, 그 뒤의 건물을 숙소로 삼았다.
현통전, 혹은 자운전에서, 옥좌에는 루우가, 그 앞의 자리에는 리안이 앉아서 내각회의를 주재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서로 이렇게 분리된 공간이 필요했다.
제국최고회의는 일단 옛 중서문하성 건물을 의사당으로 쓴다. 새로운 제국의사당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그 부지 선정에 시간이 걸렸다.
전 태사 미승휴는 ‘제국최고회의’ 같은 기구를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명시 중심가에는 의사당을 둘 자리가 없었다.
아예 심양시나 오골시에 의사당을 두어, 그들 도시를 키우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태사 미리안과 황제 루우 모두 반대했다.
“태사부와 의사당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안 그래도 바쁜데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없게 돼. 지금보다 더 피곤해질 테고, 그럼 판단력도 흐려지겠지. 매번 그 많은 서류를 싸 들고 다닐 수는 없어. 난 반대야.”
초대 제국최고회의는 태사와 의장을 리안이 겸직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리안은 두 관청 사이 거리가 멀어지는 걸 꺼렸다.
“황제가 제국최고회의에 직접 간섭할 수는 없어. 할 수 있어도 나는 안 할 거야. 하지만 개회사 같은 의례에는 반드시 참석해서 황제의 권위를 세워야지. 방청도 하고. 그러려면 의사당이 수도에서 너무 멀면 안 돼.”
루우도 이런 이유로 반대했다. 따라서 이 안은 기각.
그렇다면 동명특별시 내에 지어야 하는데, 역시 어디에 지을 것인지가 문제였다.
“제국최고회의를 황제가 북면(北面)할 수는 없습니다.”
의원 중 누군가 이렇게 말을 꺼냈고, 모두가 황궁 북쪽은 절대로 안 된다는 점에 동의했다.
이런저런 논의를 거쳐 황궁과 태자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서남쪽, 옛 요동성이 있던 자리 남쪽으로 부지가 정해졌다.
근처 민간 건물을 매입했고, 관공서, 공원 시설 등이 순식간에 철거됐다. 되도록 이른 시일 내에 완공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 비용을 아끼지 않고 추진됐다.
그 밖에도 의사당의 디자인 문제 등으로 한동안 시끄러웠지만, 이는 건축가들에게 일임하는 쪽으로 정해지면서 의사당 문제는 일단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