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66화 (66/541)

즉위식(2)

신수덕이 만든 민족 갈등의 지옥. 이 지옥은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한족 독립운동가들은 무력투쟁 수단에 의존하게 될 테고. 테러, 요인 암살,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끝없이.

그러면 지금은 허동주의 이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세계대전의 교훈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허동주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아, 그가 옳았구나, 하고.

“그러면 우리는 동명의 정치 핵심부에 다시 복귀할 수 있소. 지금 미리안에게 숙이고 들어가 봤자 군에서 잠깐 찬밥으로 머물다가, 예편되겠지. 그다음엔 부담 없이 우리를 숙청할 테고.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는 방법을 택할 수는 없소. 문하시중 각하의 이상도 서서히 죽어갈 테니까.”

민족 간 갈등이 증폭될수록, 허동주의 이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처음엔 국민 사이에, 그다음엔 제국최고회의인지 뭔지 하는 곳의 정치인들 사이에.

허동주의 사상이 공감을 얻으면, 사람들은 떠올리리라.

쫓겨난 사람들, 선각자들. 공감은 동정이 되고 동정은 우호가 되고, 우호는 연대의식이 된다.

이때 누군가가 국민 대통합 같은 구호라도 외치면서 사면 여론을 만들면 국내로 복귀. 아마 사면을 주도한 정당이 제국최고회의에 내세울 얼굴들로 그들을 기용하겠지.

우리는 ‘사상이 달랐을 뿐, 나라를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라는 표찰을 달고 당당하게 제국의 중심부로 나서면 된다.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단축하려면, 여기 산동에서 더 많은 한족의 피가 흘러야 하지 않겠소?”

장군과 관료들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

고기 굽는 냄새가 나면 침이 고이는 건 개와 인간이 모두 같다. 양심들은 있을 것이다. 마음은 아프겠지. 죄책감도 느끼고.

하지만 자기들의 이득 앞에, 그런 양심은 어딘가 고이 모셔둘 뿐이다.

“절차를 밟으시오. 일단 강제 수용부터.”

***

총독부가 있는 치청 근처의 소도시부터 ‘청소’ 작업은 시작됐다.

지난 19년간 고려령 산동 총독부에서는 식민지 거주민들을 철저히 파악해두고 있었다.

어디 출신인지, 무엇을 하는지, 태평천국의 전쟁 범죄와 고려의 식민 지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의 사상까지도.

군인들이 도시에 들이닥쳐 사람들을 끌어내 학교 운동장마다 줄을 세웠다. 일하고 있건 집에서 쉬고 있건 수업 중이었건 모두 강제로 끌려 나왔다.

총독부에서 나온 관리들은 명단을 넘기며 주민들의 신상을 확인했다. 민족과 출신이 한족으로 분류된 주민들은 곧바로 트럭으로 옮겨졌다.

키타이, 낭키아스 출신인 한족은 지금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추방 통보를 받았으며, 몽골인, 티베트인 등은 자유롭게 마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덜컹대는 트럭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서로 말을 붙여보려다 감시하는 군인들의 눈길에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불안한 얼굴로 한참을 실려 가 도착한 곳은 기차역이었다.

기차역 앞에서, 입고 있는 옷을 모조리 벗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머뭇거렸다. 위협적인 총성이 허공에 몇 번 울리자, 그제야 허겁지겁 옷을 벗기 시작했다.

수치심에 몸을 꼬며 은밀한 부위들을 가렸지만, 군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절차를 진행했다.

사람들은 이제 화물칸에 차례로 올랐다. 앉을 자리에 대한 배려 같은 건 없이, 빽빽이 꽂힌 국수 다발처럼 그렇게 욱여넣어 졌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기 포대기만……! 아직 돌도 안 지났어요. 봐주시면 안 될까요?”

아기 엄마가 간청했지만, 군인은 그마저도 무표정한 얼굴로 빼앗아갔다.

앉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선 채로 그들은 기차에 실려 어디론가 실려 갔다.

다음날, 도착지의 군인들이 화물칸을 열었을 때, 그들은 악취에 코부터 싸쥘 수밖에 없었다.

선 채로 배설을 해결한 사람들은 수치심에 흘릴 눈물마저도 말라버렸다.

몸이 굳어 떨리는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간신히 열차 옆에 세워놓았다.

그러고 나서 군인들은, 화물칸 안을 검사했다.

기력이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린 노인의 시체를 끌어냈다.

죽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인을 끌어냈다.

어른들 틈에서 압사한 아이의 시체를 끌어냈다.

몇몇 군인들이 남아 있는 인간성을 발휘해, 근처 풀밭에 구토했다.

명령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심적 행동이었다.

군인들은 시체들을 따로 치웠다. 차마 아기의 시체를 엄마에게서 빼앗지 못한 군인들은 그녀도 그냥 다른 사람들 속에 세웠다.

간밤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곳은 임시로 만들어진 수용소였다.

이곳에 어떤 가혹한 운명이 더 기다리고 있을지는, 벌거벗은 사람들도, 총을 든 사람들도 아직 알지 못했다.

***

여기까지가 그나마 ‘점잖은’ 대우를 받은 사례였다.

다른 마을에서는 민족 분류만 완료되면, 곧바로 이들을 근처 야산이나 공터로 끌고 갔다.

그리고 총성과…… 비명, 통곡.

통곡은 다양한 이유로 나왔다.

신체적 고통에서 나오기도 했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서 나오기도 했으며,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 혹은 거스를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나오기도 했다.

단말마와도 같은 그 소리는, 아직 어린 군인들은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였다.

군인들은 반쯤 착란에 빠져, 그저 그 소리와 눈앞의 처참한 피투성이 광경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열망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날 밤 탈영을 하거나 자살한 군인들은 차라리 인간성을 지킬 수 있던 자들이었다.

남은 자들은 이런 민족 학살 작업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감정이 죽어버렸다.

소나 돼지의 단말마를 들어도 무감각해진 도축업자처럼,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총을 쏴서 쓰러뜨리고, 확인사살을 하고, 총알이 떨어지면 대검을 찔러넣었다.

그들은 신수덕의 공범이 되어갔다. 이런 죄를 계속 쌓으면 파멸이 더욱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리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멈추지 못했다.

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

탈영병, 그리고 수용소를 탈출한 극소수의 사람들, 고향이 있는 키타이나 낭키아스로 추방된 한족들, 그 외 다른 민족들은, 이 참혹한 소식을 빠르게 주변국에 전했다.

가장 강하게 반발한 것은 키타이와 낭키아스였다.

전쟁에서 이긴 후, 몽골 카간의 분봉을 받았을 뿐이지 그냥 절대다수의 한족 인구 위에 한 줌의 몽골인 관료와 군대를 얹어놓았을 뿐인, 식민지나 다름없는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키타이와 낭키아스는 지난 19년간 갖은 유화책을 쓰면서 한족들의 반발심을 억누르려 했다.

몽골어와 몽골문만 할 수 있다면 출신을 따지지 않고 공직에 앉혔고, 한어의 연구와 교육도 용인했다.

물론 몽골인 칸에 대한 절대적 충성 교육은 각급 학교마다 의무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정도면 근대국가의 식민통치치고는 모범적인 편이었다.

그런데 산동에서 그 난리가 터졌다.

“태사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사태는 산동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산동의 동포들이 박해받고 있다는 소식이, 우리 몽골인 정부를 향한 반발로 이어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낭키아스 대사는 그렇게 항의했다.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 너머에는 억누른 격함이 자리했다.

“우리는 단순한 식민 통치자가 아니다, 고려인 총독부와는 다르다는 걸 우리 한족 국민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오래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태사.”

키타이 대사가 기다렸다는 듯 그 말에 자기 말을 덧붙였다.

“고려 정부가 산동의 반란군을 진압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가 직접 개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려 정부가 웬만큼 뻔뻔하지 않은 이상 그걸 국경침범으로 간주하진 않으시겠지요.”

“자국 거주민들을 보호할 수도 없는 땅을 영토라 할 수는 없지요.”

“우리 키타이와 낭키아스 정부는 곧 군을 동원해 학살을 멈추고 주민들을 구출할 계획입니다. 태사께선 빠른 결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리안은 턱을 살짝 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국내 문제에서 권위를 세우는 일이야 익숙했지만, 이런 외교문제는 아직 능숙하지 못했다. 등골을 따라 땀이 흘러내렸다.

“두 나라의 정부에 의도치 않게 손해를 끼쳐 미안합니다. 우리 정부도 최선을 다해 대책을 강구 중이니, 두 분 대사께서는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질 수 있도록 본국을 설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두 대사는 외교적 결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일단 리안에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두 사람이 접견실을 나서자마자 리안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는 중얼거렸다.

“뻔뻔한 새끼들…… 지금까지 뒤에서 몰래 허동주를 지원했던 주제에…….”

리안은 양 손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분노와 짜증이 섞이면 피로가 몇 배는 더 무겁게 느껴진다.

키타이와 낭키아스는 고려의 내전을 틈타 이득을 좀 얻어볼 심산으로 허동주를 지원했다. 지금 신수덕이 산동에서 저렇게 버틸 수 있는 건, 키타이와 낭키아스에서 지원한 물자도 큰 역할을 한다.

신수덕은 그 물자를 충실하게 비축해뒀다가, 지금 한족 주민 학살에 쓰고 있다.

말하자면 이 사태에는, 짧은 안목으로 남의 나라 내전에 개입한 저들도 책임이 있다.

그런데 인제 와서 고려 정부의 탓을 하며, 산동을 날름 갈라 먹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물론 자국 내 한족 문제에 대한 우려는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이 학살로 인해 산동 내 한족독립운동세력의 무장투쟁도 격해질 것이고, 동포들의 소식을 들은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한족들 사이엔 동정 여론이 들끓겠지.

그 한족들이 동포들에게 지원금을 보내거나, 직접 산동으로 가 무장투쟁에 가담한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이런 사태를 한족 전반의 문제로 확대해, 구 태평천국의 영토 전역에서 한족 봉기가 일어난다면, 상황은 악몽처럼 흘러갈 것이다.

그때는 국제여론도 남의 일 취급하지 않을 테고, 최강대국인 아즈텍이나 유럽의 두 강대국인 로마 제국, 신성 제국의 주의까지 끌면 정말 골치 아파진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암담한 상황 전개에 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막아야 한다. 막아야겠지만…… 얼마만큼 막을 수 있고 또 얼마만큼 돌파당할 것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