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식(1)
어떤 사선(死線)을 헤치고 온 걸까.
눈앞의 소년, 한재연의 옷은 땀에 절어 있다. 그 땀 냄새는 불쾌하기 이전에 연민이 들었다.
천손민족협회 잔당을 추적하는 손길을 피해 어디서 뭘 했는지 모르지만,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할 만큼 숨 가쁘게 살아온 것은 분명했다.
시를 좋아하는 여린 미소년이, 지금은 그 부드러운 볼이 다 튼 거친 얼굴로 견하 앞에 앉아 있다.
그러나 눈 만큼은 좌절도, 고통도 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빛이 여전하다.
만약 그 빛이 없었다면 견하는 한재연을 ‘처리’하고 깔끔하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가슴이야 아팠겠지만, 이 몇 달 사이 견하는 그렇게 변했다.
주견하는, 딱 한재연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깔끔하게 다린 교복, 자신의 집무실 안에 있기에 보일 수 있는 여유.
두 소년 사이에 놓인 탁자에는 아무것도 없다. 차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렇게 온 건, 처형당하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뭔가를 들고 왔다는 뜻인가? 아니면 죽더라도 전할 말이 있다는 뜻이거나.”
재연은 말없이 견하의 눈을 들여다봤다.
견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재연의 눈 속에서 의도를 읽어내려 했다.
재연은 견하의 눈 속에서 무엇을 읽어냈는지, 고개를 흔들곤 입을 열었다.
“소식 하나를 들고 왔어. 그게 너한테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견하가 묻기 전에 재연은 덧붙였다.
“내 목숨은 너에겐 별 가치가 없을까?”
“…….”
견하는 말을 골랐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두 사람의 처지와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네 목숨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내가 아니라 내 입장이 결정하는 거야.”
답을 하면서도, 어쩐지 이 대답은 비겁하게 여겨졌다.
재연도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용건을 말했다.
“항복할게.”
“뭐……?”
견하의 눈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재연은 신념을 뒤집는 사람이 아니다. 아직도 재연의 눈에는 그 신념이 그대로 비치고 있지 않은가.
“견하 너는, 다른 천손민족협회 출신들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내 사상에 대해서도 묻지 않겠지. 나를 소년감찰국에서 써줘.”
재연의 말 속에는 소년감찰국 내부 사정이 들어 있었다.
견하는 수영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수영의 몸이 살짝 굳었지만, 견하는 추궁하려고 그녀를 바라본 것이 아니다. 그저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했다는 몸짓이었을 뿐이다.
생각대로 소년감찰국 출신 요원 중에는 옛 동지들과 연락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에 수영이 재연을 이쪽으로 끌어들였듯이, 더 많은 잔당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견하는 재연 쪽으로 생각을 집중했다.
재연은 왜 갑자기 견하 앞에 나타나 항복 의사를 밝혔을까? 견하는 재연에게 묻지 않았다. 바보 같은 질문이니까. 당연히 이유가 있으니까 이런 행동을 한다.
그러니 ‘왜?’라고 이유의 존재를 묻는 게 아니라, ‘이유의 구체적 내용’을 물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제야 재연은 시선을 거뒀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긴 한숨을 뱉었다.
“일종의 노선 차이야.”
한숨 끝에 재연은 그렇게 덧붙였다.
“문하시중 각하의 서거 전까지는, 모두가 ‘고려 민족 중심의 국가를 바로 세우자’는 이상 아래 뭉쳤었어.”
하지만 허동주의 죽음 이후, 그 추종자들은 비로소 서로의 민낯을 봤다. 다들 허동주만 바라보느라 몰랐던 서로의 차이를 느끼게 된 것이다.
‘고려 민족 중심의 국가’라는 구호 아래에는,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한 각기 다른 방법들이 있었다.
“크게 두 가지 파벌로 나뉘었어. 하나는 상대적으로 온건파라고 할 수 있겠고, 다른 하나는 강경파라고 할 수 있겠지. 나는 온건파에 속하고.”
한재연이 온건파……?
견하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의문에 눈을 굴렸다. 그의 기억에는,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한족들을 처형하던, 재연의 모습이 아직 선명하다.
그런 그가 온건파라면, 강경파라는 자들은 대체 어떤 자들인가?
“견하 네가 보기엔 정도의 차이일 뿐 똑같은 놈들일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 쪽에선 이 ‘정도의 차이’가 중요해.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온건파는 분명히 죄를 지은 자들만을 선별해서 제거해. 그리고 나머지 다른 민족들은 교육을 통해 고려 민족에 철저히 동화시키자고 주장하지.”
“하지만 강경파는 그와는 다른 주장을 한다는 거야?”
“……그들의 주장은 복잡할 게 없어. 전부 죽이자는 거야.”
한족의 언어, 생활습관을 지닌 모든 이를 말살한다. 처음부터 지상에 없었던 것처럼.
이것은 단순히 광기와 증오의 표출이지, 정책도 뭣도 아니다. 목적이 있는 살인도 아니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죽이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재연은 그렇게 말했다.
견하도 요 몇 달간의 공부를 통해 그런 차이는 안다.
살인이란, 어쨌든 최종적인 수단이다.
따라서 그 외의 방법이 없고, 그 방법으로 거둘 이익이 살인으로 발생할 부담보다 압도적으로 높을 때 골라야 한다.
이걸 생각하지 않고 기분대로 죽이는 자는, 필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군주는 나라를 말아먹는다.
강경파와 노선이 다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강경파에는 가망이 없으니 재연은 견하를 찾아온 것이다.
“강경파의 수장은 산동 총독 신수덕이야.”
여기서도 신수덕의 이름이 나오나.
견하도 리안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허동주 사후 그 잔당의 혼란상을 빠르게 수습한 남자. 전선을 유지하는데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니라 산동으로 모든 전력을 집중시키는 결단을 보인 차기 지도자.
“그렇다면 지금 반란군의 주류는 강경파라는 이야기군.”
재연은 견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스럽지만.”
“그리고 너는 내 밑으로 오면, 일단 살아남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 ‘온건파’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고 본 거겠지?”
재연은 피식 웃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렇게 흘러온 상황이 어이가 없는 듯했다.
“맞아. 고려민국 임시정부에서도 택한 방법을, 나도 좀 본받아보려고. 이 정권의 내부에서 성장할 생각이야. 그 전에 네 말대로 일단은 살아남아야겠지만.”
그제야 견하도 웃었다. 그리고 재연의 전향을 계기로 신수덕과 반란군 잔당을 무너뜨릴 안을 떠올려 본다.
“내 밑에서 일하게 된다면, 너같은 ‘온건파’들이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도록 다리가 돼 줬으면 좋겠어.”
“나는 소수파 중에서도 소수파야. 별반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런가. 주류인 강경파에 비해 온건파는 소수파. 그 중에도 재연처럼 항복을 결심하는 이는 더욱 소수파일 것이다.
대부분은 그냥 강경파의 주장에 굴복하는 걸 택하겠지.
“그렇다면 역시 신수덕을 무너뜨리는 게 먼저겠군.”
그래야 나머지 온건파도 비로소 항복할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한재연을 써먹는 건 그때 가서인가…….
생각에 비릿한 잡내가 섞여든다. 한재연도 양수영도, 내가 허동주를 죽였다는 걸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여기에 대해 더 생각해보려 했지만, 재연의 말이 그걸 가로막았다.
“무너뜨릴 수 있다면 되도록 빨리하는 게 좋을 거야. 이미 산동에서 대학살은 시작됐어. 나는 그 피해라도 줄여보려고 여기 온 거니까.”
***
산동 총독 신수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앞, 형무소의 처형장에는 수감 중이던 한족 독립운동가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탄환을 아껴야 하니 모두 이마에 한 발씩, 깔끔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걸로, 이들이 탈옥이라도 해서 미리안 정권과 협상하게 될 위험은 제거했소.”
신수덕의 제안……을 빙자한 명령에 산동의 주요 장성과 관료들은 처형을 지켜봐야 했다.
심지가 약한 이는 떨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눈을 돌리지는 못했다.
“우리 군의 자원이 이들의 생명을 붙여놓는 데 아깝게 소모될 일 역시 없어졌지. 이제 밖에 있는 한족을 정화할 때요.”
산동을 미리안에게 내주더라도 절대로 편한 통치는 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저 한족들은 우리와 미리안을 구별하지 않겠지. 저들에겐 다 같은 학살자 고려인이다. 형무소 안의 독립운동가들도 처형했으니 협상의 여지도…… 많이 줄었을 테고.
“하, 하지만 총독 각하. 다가올 태사와의 전투에 대비하자면, 한족을 정화하는데 들어갈 물자를 비축하고, 한족들을 징집해서 생산인력으로 투입하는 게 낫지 않을지요?”
신수덕의 눈길이 방금 입을 연 장군에게 향했다. 장군은 바짝 얼어붙었다.
“소, 송구합니다! 한족들을 옹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음을 잘 아오, 장군.”
신수덕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 장군이 한 말은 마음에 들었다. 장군의 본심과는 별개로 말이다. 본심이야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족을 철저하게 손익의 관점에서 계산하려고 한 태도는 좋았다.
“하지만 당장 벌어질 전투라는 좁은 부분보다, 긴 맥락인 전략을 두고 생각해봅시다. 돌아가신 문하시중 각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이오.”
고려령 산동의 해안은 길다. 이 긴 해안선 전체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태사파 군대가 상륙을 시도할 경우, 단기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막아낼 수 없다.
해군이 있긴 하지만 태사 쪽에 붙은 해군에 비하면 우세하다고 말하긴 힘들다.
가능성은 낮지만 일본공화국이나 아즈텍 연방이 개입을 결정, 그들의 해군이 가세한다면 모항 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것이다.
“산동은 결국 내줄 수밖에 없소.”
신수덕은 여기 모인 사람들을 죽 훑어본다.
확정된 패배.
그렇다면 여기서 신수덕의 목을 들고 미리안에게 항복하는 게 살아남을 방법 아닐까. 그렇게들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신수덕은 그중 몇몇 인사들을 오늘 밤 은밀하게 ‘처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충분한 경고가 되겠지.
“진짜 문제는 ‘어떤 형태로 산동을 내줄 것인가’요.”
물러난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니다. 키타이는 좀 어렵겠지만 낭키아스로 망명할 수 있고, 낭키아스를 거쳐 마자파히트로, 그리고 아프리카 어딘가로 가는 것도 역시 가능하다.
아직 군사력이 허약한 나라의 군사고문으로 들어가면 먹고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렇게 버티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을 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산동을 민족문제의 지옥으로 넘겨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