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최고회의(10)
동주의 집무실이었던 방.
견하와 효윤이 먼저 와 있었다.
“폭탄이라도 설치해두지 않을까 했는데, 그러지는 않았더라고요.”
리안은 효윤의 말에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남겨둔 문서도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엔 견하가 말을 받았다.
“네. 정말 깨끗하게…… 전부 치웠어요. 남김없이.”
“허동주도 그렇고 그쪽 인간들은 정말 깔끔한 성격들이야. 우리도 그 철두철미함은 본받아야겠어.”
전투화를 벗어 피곤한 발을 달랬다.
견하 앞에서 발 냄새를 풍기고 싶진 않았기에 발을 탁자 위로 올리진 않았다.
“쓸만한 인재는 찾았어?”
견하는 대학생들 사이에 조직을 확장할만한 사람을 찾는 중이다. 병사 중에 있지 않을까 싶어 이번 평양 위문도 따라왔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쪽 부대의 협조를 얻어서 대략적인 정보를 파악하긴 했지만, 딱 마음에 드는 인재는 없네요.”
“하긴 찾는다고 적당한 인재가 늘 나온다면, 우리가 겪을 고생의 절반은 없어졌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리안은 견하의 얼굴을 살폈다.
열일곱.
그가 아무리 똑똑하고 천재적인 자질이 있어도, 열일곱은 열일곱이다. 스무 살을 넘긴 사람들을 가늠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람을 보는 안목은 완벽할 수 없다, 이걸 전제로 잘 검토해봐.”
연인이기 이전에, 선배 정치가로서 조언한다. 견하는 끄덕였다.
“네. 놓쳤을 가능성도 있고, 제 기준이 너무 높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기준 자체의 수정은, 지금까지 뽑아놓은 사람들과의 협력을 생각하면 신중하게 하는 게 좋아.”
“네.”
리안은 효윤에게 고개를 돌렸다. 효윤도 할 말이 있는지, 리안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눈치다.
“……?”
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효윤이 입을 열었다.
“이쪽은 배영훈 소령한테서 비밀리에 들어온 보고인데요.”
견하야 국내 정치문제를 담당하고 있으니 배영훈과 계통상 이야기를 나눌 일은 거의 없다. 배영훈의 일은 군과 관련된 것이고, 그렇다면 김천열이나 강태훈을 통해서 이야기가 들어와야 한다.
하지만 효윤을 통해 보고가 올라왔다는 이야기는, 태사부만 아는 일로 하고 싶다는 것.
“그렇게 비밀을 지켜야 할 일이 뭐기에…….”
“남부전선에서의 이상 상황이라고 해요.”
“이상 상황?”
상상력을 발휘해도 퍼득 떠오르는 게 없다. 이 와중에 기갑사를 뛰어넘는 신병기를 반란군이 꺼낼 일도 없을 테고.
완전 진압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 전황 자체는 혁명군에 유리하다. 그리고 남부 전선은 북부나 서부 전선과 달리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나라도 없다.
이제 와서 일본공화국이나 아즈텍 연방이 반란군을 지원하진 않을 테니까.
“그게…… 그냥 전선에서 적군이 증발한 것처럼 사라지고 있다고 해요.”
“증발? 퇴각이 아니라?”
이미 혁명군은 경주를 통한 퇴각작전을 해 본 적이 있고, 서부의 적들도 발해만을 통해 산동으로 철수 중이다.
남부, 삼한반도의 적들 역시 황해를 통해 산동으로 퇴각할 수 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는 모양입니다.”
“이상한 점?”
“군복을 대량으로 태운 흔적이 있다는 보고에요.”
“군복을 태워……? 벌거숭이 상태로 뭘 한다는 거지?”
“전선 붕괴를 위장한 유인책일 가능성도 있어서 깊게 추격하지는 못한다고 해요. 하지만 확실히 일반적인 퇴각이나, 병사들의 집단 탈영과는 다르다고…….”
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낀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태훈이나 김천열한테는 듣지 못한 보고인데.”
“배영훈 소령의 말로는…… 진격하는 곳마다 반란군의 민간인 학살 흔적을 발견했는데, 이런 문제들까지 보고하기를 꺼리는 게 아닐까 싶다고.”
“하긴 그랬으니 네 쪽으로 보고를 올렸겠지. 하지만 우리가 저지른 학살도 아니고, 반란군의 학살을 보고하지 않겠다니 무슨 생각인지…….”
잠자코 있던 견하가 리안의 생각을 거들었다.
“내전이 끝나면 다시 같은 군에 소속될 테니, 최대한 감싸주려는 게 아닐까 싶군요.”
“제정신들이 아니군. 그래서, 우리까지 민간인 학살범들을 받아들인 범죄 정권이 되자? 견하 군, 우리 측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지?”
“감추려고들 드니 당장 누가 뭘 저질렀다, 구체적인 것까지 파악하긴 어려워요. 죄를 저지르고 전사해버린 인간들도 있고. 하지만 피해자 증언이나 목격 사례는 법무성과 나제홍 실장을 통해 쌓고 있어요.”
“전에도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군은 구태의연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태사인 나에게도 감추면 그만이지, 하면서 보고도 제대로 안 올리는 작자들이 있지. 견하 군, 숙군(肅軍)을 염두에 두고 작업에 임해줬으면 해.”
견하도 생각해 둔 게 있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효윤은 그보다도, 하면서 말을 이었다.
“남부전선 반란군의 이상행동은…… 어디까지나 배영훈 소령의 추측이지만, 유격대가 되려는 게 아닌가 하고.”
“유격대…… 라.”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네요.”
“별로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나쁘지.”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숨어들 생각인가. 이러면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꼴이다.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은, 무기를 꺼내기 전까지 대응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모든 민간인을 적으로 보면, 그건 그것대로 군정이나 식민지배를 펼치는 꼴이다.
내전이 끝나고 전국을 정상화한다는 리안의 목표와는 어긋난 정책이다.
“그런 정책을 유도하는 건가.”
어쩌면 삼한반도를 매일같이 테러가 일어나는 혼란과 폭력의 땅으로 만들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리안의 정권은 거기에 맞서 강압적인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한 제국입헌당의 지지율 하락, 정권 내부의 혼란이 뒤따를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나쁜 거야 말할 필요도 없고.
더 우려되는 건, 테러에 맞서다 보면 혁명군 장병들 역시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리안 정권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리안이 그런 장병들을 처벌하면 혁명군의 전력과 사기 역시 줄어든다.
“그냥 죽을 수는 없으니 다 같이 죽자는 건가.”
대응할 방법을 떠올리자.
어쨌든 사람이 하는 일이니 방법이 있을 것이다.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숨어든 적들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건 어렵겠죠.”
“좋은 방법이 없을까?”
“허동주에게 끝까지 충성하는 인간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이도 저도 아닌 인간들은 그냥 그대로 민간인으로 눌러 앉혀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의 분할점령에 반대하며 한족 독립운동가들이 들고일어났다. 물론 들고일어날 당시에는 청장년들이지만, 19년이나 시간이 지났다.
청년은 장년이 되고, 장년은 노인이 된다. 그리고 태평천국 부활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열정은 식는다.
상당수의 한족 독립운동가들이 그대로 그냥 생활인이 되었다. 굳이 붙잡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 사람은 현실에 순응한다.
“좌절감을 주는 거죠. 자기들이 하는 일에 미래는 없다는. 아무리 테러를 저지르고 난리를 쳐도 변하지 않는다는.”
효윤도 견하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눈에 힘이 들어갔다.
“산동…… 적의 머리를 날려야겠군.”
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을 한 번 짜볼게요. 산동을 무너뜨리는 군사 작전을 짤 수는 없겠지만, 내부로 들어가서 무너뜨리는 안은 생각해 볼 수 있겠죠.”
“또 무리한 일을 시키는 것 같네.”
“일이니까요.”
리안은 그 말에 배시시 웃었다.
***
“그래서, 즉위식 준비로 바쁜 황제 폐하더러 몸소 와달라고 한 이유가 자기 일을 도와달라는 거야?”
“아직 내 몽골어 실력은 미숙한 데다, 한어(漢語)는 한마디도 할 줄 몰라. 그래도 너는 할 줄 알 것 같아서.”
루우는 큰 눈을 슬쩍 찡그리고는 답했다.
“그뿐만이 아니겠지. 강력한 이단도 함께 데려가고 싶다는 거잖아.”
“그런 이유도 있고.”
그 밖의 이유도 있지만, 견하는 아직 말하지 않는다.
루우도 더 추궁하기보다는 견하가 내민 서류를 훑었다.
“산동에 잠입이라. 그리고 거기서 한족 지하 독립운동세력과 접촉한다? 반란군을 뒤흔들기엔 좋은 아군이겠지만, 그다음에는 어쩌려고?”
지금까지 한족 독립운동가들은 고려 제3제국 정부와 적대해 왔다.
하지만 산동은 지금 신수덕의 통치 아래 있다. 제3제국 정부와 노골적으로 적대할 이유가 사라졌고, 오히려 공동의 적을 뒀다고 해도 좋은 상황이다.
“협력을 받았으니, 그만한 대가를 내놓아야겠지.”
동맹은 거래다.
한족 독립운동가들이 바보도 아니고 고려 제3제국 정부를 위해 무료 봉사를 해주진 않는다.
그리고 신수덕과 반란군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 순순히 고려 제3제국의 통치를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다.
“대가도 대가지만, 그걸 결정할 권한이 너한테 있어?”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지. 상황이 결정하는 거야.”
“……얄미운 회피지만 맞는 말이긴 하네.”
누군가 견하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면, 그래도 될 만큼 견하에게 최적의 상황을 제공해야 한다.
제한된 상황 속에서는 제한된 해결책, 이미 정해진 답만 나온다. 그걸 도출해냈다고 해서 견하를 탓할 수는 없다.
“독립국은 안돼.”
“폐하께선 벌써 영토가 떨어져 나갈 걱정을 하시나?”
견하의 농담에 루우는 입꼬리를 쓱 올린다.
“내가 걱정하는 게 아니야. 내 숙부들이 걱정하지.”
“……그것도 얄미운 회피지만, 맞는 말이네.”
고려령 산동은 서쪽으로는 키타이, 남쪽으로는 낭키아스와 국경을 접했다. 각각 루우의 숙부들이 다스린다.
이 나라들은 세계대전의 승리 이후 사실상 몽골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당연히 인구 대다수는 한족.
다이온(大元)의 영광을 되살린 것까진 좋았지만, 또다시 몽골인들은 한족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건데, 산동에서 한족의 독립국가가 건설된다? 그게 어떤 연쇄반응을 일으키겠어?”
낭키아스와 키타이의 한족들은 아주 격렬하게 반응할 것이다.
우리들도 독립하겠다, 산동을 중심으로 단결하자, 난리도 아니겠지.
낭키아스와 키타이의 정세는 불안해지고, 이는 또 다른 혼란으로 이어진다.
만약 독립운동이 성공해서 새로운 한족 국가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 나라는 태평천국처럼 또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어찌어찌 성공적으로 제압한다고 해도, 낭키아스와 키타이에서는 반드시 항의할 거야.”
그렇게 되면 고려의 외교적 입지가 좁아진다.
따라서 한족 독립국가 건설을 대가로 거래하는 안은 기각.
“……기껏해야 자치권 확대, 식민지가 아닌 정식 행정구역으로의 편입, 한족 의원의 제국최고회의 입성 정도를 제시할 수 있겠군.”
견하가 그렇게 정리하자, 루우는 웃으며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타협안을 받아들일까?”
“19년이나 지나서도 남아 있는 끈질긴 독립운동가라면, ‘완전독립’을 목표로 하겠지.”
타협안을 받아들일 온건파는 없을까? 만약 있다 해도, 그들이 한족 독립운동 세력의 ‘주류’라 할 수 있을까? 그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힘은 얼마나 될까?
견하와 루우 모두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그런 무거운 침묵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깼다.
“들어와.”
양수영과 유지나가 함께 들어왔다. 의외의 모습에 견하는 눈썹을 모았다.
“……? 무슨 일이지?”
“저, 그게…….”
지나는 뭐라 말해야 할까 정리되지 않은 건지, 망설이며 수영의 눈치를 살폈다.
수영은 반대로 담담한 얼굴로, 루우와 견하 쪽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한재연이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