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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63화 (63/541)

제국최고회의(9)

학습한다.

이는 적뿐만 아니라 아군에게도 통하는 말이다.

조유관이 이끄는 부대들은 서부군의 방식을 학습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부군의 용성 공략 방식을 학습했다.

기계적으로 정확한 포격이 쉴 새 없이 쏟아져 용성의 반란군 방어시설을 무력화했다.

조유관은 그 틈을 타 용성에 돌입하기보다는, 반란군에게 방어선을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 데 집중했다.

방어선을 무력화했다고 섣불리 돌진하면, 그때는 용성 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여야 한다. 출혈도 크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는다.

그보다는 대릉하의 다른 도하지점을 찾았다. 여길 돌파하자 용성의 반란군이 바빠졌다.

-용성에서 태사군의 발을 더 잡아 둘 것인가?

-아니면 포위되기 전에 남쪽으로 빠져나가야 하는가?

서부군의 판단은 빨랐다. 그들은 남쪽의 항구를 향해 퇴각을 결정했다.

정예병들은 잘 싸우는 만큼 그 목숨도 훨씬 귀중하다. 애석하게도 전쟁터는 목숨에 경중이 있는 곳이다. 잘 싸울수록 목숨의 무게는 무거워진다.

“목숨이 평등하다 말하는 지휘관은 좋게 말해봐야 지휘능력에 자부심을 가진 자고, 실상은 오만한 자다.”

조유관은 적의 신속한 결정에 경의를 표하며, 그런 말을 남겼다.

“포위당하면 항복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지. 그러면 우리 태사께 정예 병력을 고스란히 넘기게 된다.”

반란군의 입장에선 그럴 수는 없다. 끝까지 저항하려면 서부군의 정예 병력은 반드시 보존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참 손발이 척척 맞는군.”

그렇게 평가를 끝내고, 조유관은 반란군이 도시를 비우자마자 용성에 입성했다.

용성 탈환 소식을 동명에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명의 반응은 환호에 가까웠다. 아마 지금 포위 중인 평양의 반란군을 항복시키는데 잘 써먹겠지.

조유관은 곧바로 다음 단계에 착수했다. 서부 국경지대의 기지들을 장악하는 한편, 남쪽으로 전선을 조여간다.

쓸 수 있는 공군을 모조리 동원해서 산동으로 퇴각하는 적에게 타격을 주자.

적의 저항이 격렬할 테니, 육군을 밀어 넣어서 적을 섬멸한다는 방법은 최후까지 남겨두자. 어쨌든 극북방위군은 그의 안전, 그리고 옛 동지들과 후배들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무력이다.

***

그런 조유관의 속내를 못 읽을 리안은 아니었다.

전황이 그려진 지도를 보면 조유관이 이끄는 부대가 반란군을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은 듯 보인다.

하지만 보고를 종합해보면 양측 모두 피해는 경미. 반란군은 전력을 보존하며 퇴각 중이고, 조유관 역시 전력을 보존하며 반란군의 뒤를 따라 이동 중이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속내가 따로 있는 건 마찬가지…….”

효윤은 혁명군사령부에서 발언권이 있다고 보긴 애매하고, 견하는 데리고 나올 수도 없다.

견하를 여기 데리고 나와서 자신의 생각과 말에 힘을 좀 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아쉬운 한숨을 삼킨다.

“적을 신속히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그러나 조유관은 현장 지휘관의 판단으로 그 명령을 어길 수밖에 없음을 호소할 것이다. 혁명군 사령부의 장성들도 그런 조유관의 입장을 옹호해주겠지.

적의 저항이 격렬할 것으로 예상하는 곳에 무작정 병사들을 투입할 수는 없다. 적이 알아서 퇴각 중이라면 더더욱.

무엇보다도 리안 역시 그런 식의 소모가 득보다는 실이 크다는 걸 잘 안다. 충성심이 의심스럽긴 해도 어쨌든 지금은 리안이 보유한 소중한 전력이다.

조유관을 비롯해 안세규 쪽을 지지할 가능성이 큰 자들이라 해도, 그렇게 악의가 뻔히 보이는 술수를 부릴 순 없다.

“일단은, 평양의 항복을 받아낸 걸 기뻐해도 좋겠죠.”

조유관의 예상대로 용성 탈환과 서부 국경지대의 회복 소식은 평양에 농성한 반란군의 사기를 꺾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소식을 알리자마자 일선 소규모 부대부터 하나둘 투항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개죽음을 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지휘부도 투항했다.

다른 반란군의 투항도 유도할 수 있도록, 리안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줬다.

평양의 항복으로 얻은 큰 소득은 기갑사를 입수했다는 점이다. 그래 봤자 열 기도 되지 않지만, 허동주가 지녔던 이단 관련 기술의 성과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리안은 이걸 군이 아니라 견하와 루우에게 맡겼다. 루우와의 약속이 그렇기도 했고, 루우에게 맡기는 편이 뭔가를 더 알아내는 데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평양을 점령한 장병들이 남부 전선으로 재배치 되기 전에, 한 번 위문을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리안은 류성일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일선의 장병들에게 태사의 모습을 보이고, 저 역시 전선의 공기를 조금이나마 느껴보는 게 좋겠죠.”

이제 내전의 승패가 완전히 갈렸다는 자신감을 온 나라에 드러낼 기회이기도 하다.

실제 전쟁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전쟁의 분위기를 국민이 어떻게 느끼느냐도 무척 중요하다.

패망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는 느낌 속에서 싸우는 것과 승리가 머지않았다는 느낌 사이에서 싸우는 것은, 같은 물질적 조건에서도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내기도 한다.

우리 측 점령지역의 국민은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할 테고, 반란군 점령지역의 국민은 한계를 느끼겠지. 어서 혁명군이 와줬으면 하고 바란다면 더욱 좋다.

몇 달 전보다 훨씬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리안은 몽골군이 점령한 서북부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

선거 결과가 나왔다.

제국입헌당 49.4 퍼센트, 고려국민당 28.1 퍼센트, 사회민주당 12.3 퍼센트, 공산당 10.2 퍼센트.

과반에는 못 미치지만, 예상했던 대로 제국입헌당의 승리였다.

구 중서문하성 건물에서 치러진 취임식과 선서는 조촐하게 끝났다. 장엄한 취임식은 앞으로 국가원수가 될 황제의 것이어야 하니까.

제국최고회의 의원들을 위한 회의장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그래서 취임식이 치러진 방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사람이 리안 한 명을 바라보며 의장 겸 태사를 지명하는 광경은, 나름 웅장했다.

견하는 의원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리안의 뒤쪽 구석에서 다른 소년감찰국 요원들과 함께 대기했다. 리안의 안전 문제도 있지만, 견하 자신도 의원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수가 늦는 자, 호응이 부자연스러운 자, 아무리 미묘한 행동이라도 놓치지 말고 살펴봐.”

“선배, 항상 억지스러운 명령을 삼가지 않는 사람인 줄은 알지만…… 그건 그냥 트집 잡기가 아닐까요?”

“네 말대로 트집 잡기에 불과해. 어떤 의원의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는, 건강이 좋지 않거나, 복잡한 가정사 때문일지도 몰라. 하지만 아홉 명의 무고한 자와 한 명의 역적이 섞여 있다면, 열 명 모두를 제거해서 안전을 확보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선배의 지론과는 모순이지 않나요. 지금 소년감찰국에도 얼마든지 충성심이 염려되는 애들이 섞여 있잖아요.”

“그 애들은 내 편으로 포섭할 가능성이라도 있지. 하지만 의원들은 아니야. 태사 각하쯤 되는 위치라면 내 방식대로 하실지도 모르지만. 지금 내 위치에선 살생부를 적어두는 게 전부지.”

지나는 한숨을 내쉬곤 취임 선서를 하는 리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많이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니까, 기억 속에 잘 넣어두자.

리안은 의원들의 지명에 감사를 표하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형식적인 선서를 마쳤다.

“……나라가 위기에 처한 지금, 우리의 책임은 막중합니다. 우리 제국최고회의는 내전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책임과, 하루 빨리 우리의 황제 폐하를 옹립할 책임이 있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저 미리안은, 제국최고회의의 초대 의장으로서 의원 여러분께, 왕서라 공을 황제 폐하로 옹립하고, 즉위식을 치를 수 있도록 결의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리안의 말이 갑자기 멈췄다.

긴장 속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 리안은 그들 모두를 죽 훑어보고는 씩 웃었다.

“그다음으로는 제국최고회의의 의사당 건물을 올리는 문제를 결의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너무 좁지 않나요? 다리도 아프고.”

의원들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한 출발이었다.

“제국 만세.”

리안의 조용한 덧붙임에 모두 얼떨떨하게 서 있다,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까. 또래 남자애처럼 보이는 병사를 앞에 두고 리안은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은 운 좋게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생활과 학업에 불편이 없었고, 지금은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됐다.

반면 눈앞의 병사는,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업도 생활도 중단하고 징집돼 여기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그 차이만으로, 내가 이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해도 되는 걸까.

지금 이 자리에 서지 못하고 죽은, 이 남자애 같은 병사가 얼마나 될까.

하지만 병사는 어쨌든 살아남았고,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가까이 다가와 훈장을 달아준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 같았다.

훈장을 달아주는 리안이 올려다보자 얼굴이 빨개진다.

“고생이 많았다. 병장.”

“감사합니다!”

훈장을 손수 달아주는 것, 그리고 말 한마디 건네며 미소를 지어주는 것, 그것 말고 리안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 병사는 며칠 더 쉬었다가 부대를 따라 다시 남쪽 전선으로 가야 한다.

다른 병사들에게도 훈장을 수여하는 일이 마무리되자, 리안은 연단에 서서 장병들을 내려다봤다. 연설이 예정돼 있었다. 형식적인 일이었지만, 형식적으로 들리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제군은, 단순히 하나의 도시를 탈환한 것이 아니다.”

표정이 없었다. 진지하게 듣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빨리 이 지겨운 행사가 끝나고 막사로 들어가 쉬고 싶다는 뜻일까.

어느 쪽이든 리안은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또 죽으러 가라고 명령해서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것도.

“제군은 황제 폐하를 구했다. 제군은 황제 폐하의 나라에서 황제 폐하의 군대로 재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에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탓하지는 않겠다. 제군의 삶과 새로운 황제 폐하의 즉위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리안은 숨을 들이켰다.

“제군의 삶이 극적으로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나라는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기에도 바빠 제군의 삶을 돌봐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단언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나라가 구원받은 것은, 제군 덕분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제군에게 연설할 수 있는 것도, 제군 덕분이다. 열여섯 소녀가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황제 폐하가 될 수 있는 것도, 제군 덕분이다. 후방에 있을 가난한 누군가의 삶이 나아진 것도, 제군 덕분이다. 나는, 이 자리를 빌려 제군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저들의 마음에 위로가 되기를.

“그러나 나는 또 이 나라를, 황제 폐하를, 국민의 삶을 위해 제군더러 사지로 가라 명령해야만 한다. 나를 어처구니없는 명령만 내리는 계집애라 욕해도 좋다.

대신 싸움터에서는, 제군이 황제 폐하와, 수많은 국민의 삶을 구했다는 그 단순한 진실을 반드시 생각해주기 바란다. 이상.”

형식적인 절차로 경례가 오갔다. 소리는 우렁찼다. 당연하다. 태사를 맞이하기 위해 선별된 인원일 테니까.

이 사람들 마음에 담긴 생각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선별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도 알 수 없다.

리안은 연단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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