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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62화 (62/541)

제국최고회의(8)

“나더러 공산국가라도 만들라는 거야?”

조금 전에 나갔다가 다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기에 살짝 두근거렸는데, 견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리어, 리안의 표정을 딱딱하게 굳힐 정도로 심각한 이야기였다.

“나도 물론 제국입헌당이 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여당으로서 오래도록 집권하게 할 생각이야. 하지만 그건 일당독재와는 전혀 달라.”

리안은 귀족의 품위라는 덕목을 교육받고 자랐다.

귀족은 권위와 서열을 중시하고 그 질서에 복종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립하는 귀족을 처음부터 완전히 제거하는 건 아니다. 숨만 붙여놓았다 해도 어쨌든 개성 있는 얼굴들이 귀족 사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리안의 정치도 마찬가지였다. 허동주처럼 리안과 양립할 수 없는 경우, 혹은 불가피하게 흘려야 하는 피는 어쩔 수 없지만, 살릴 수 있다면 살려서 닭장 안에서라도 살아가게 해야 한다.

물론 리안은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머리만 숙여 온다면 살려서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게 리안이 생각하는 ‘품위’이자, 내전 이후 고려 제3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그렇기에 리안은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의 체제를 싫어했다.

원천봉쇄. 오직 하나의 이상, 하나의 의견만이 절대적으로 신봉되고, 반대 의견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짓밟아 없애는 것.

일단 밟아놓고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말하는 것과 밟아서 터트려 죽이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그건 고려 제3제국이 나아갈 길이 아니다.

리안이 허동주의 이상을 혐오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고려 제3제국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강국이 되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을 압도해야 한다.

하지만 나라 전체를 전쟁 말고 다른 것을 생각도 할 수 없는 괴물로 만드는 건, 그냥 미친 짓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연인이 되고자 하는 소년이, 그녀도 그렇게 되라고 말하고 있다.

“제국입헌당 내에 ‘동형기구’라니. 무슨 소리인지는 알고 하는 이야기겠지, 주견하 군?”

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은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고 임시 제국최고회의에 나갈 준비를 했다.

당내 동형기구. 그러니까, 제국입헌당 내에 정부 기관과 동일한 역할을 하는 기구들을 설치하자는 이야기다.

그렇게 해서 당 전체가 언제든지 모든 정부 기관에 투입될 준비를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당이 정부 기관의 윗선처럼 간섭한다.

더 나아가 아예 당과 정부 기관을 일치시켜 일당독재체제를 만들게…… 하자는 것이다.

“허동주나 바라트에서 할 법한 생각이야. 허동주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나더러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달라는 거지?”

“루우는 각하를 황제로 추대하려던 계획의 존재를 알아요.”

“그래. 루우도 알지. 혹시라도 루우가 그걸 빌미로 나를 밀어낼까 걱정한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견하 군. 이건 아니야. 내가 특별히 민주나 공화 같은 걸 꿈꾸는 건 아니지만, 고려는 이제 입헌군주정 아래 합리적으로 돌아가야 해.”

“그럼 루우가 권력을 놓으라고 한다면 순순히 놓겠다는 말이에요?”

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루우가 그렇게 나왔을 때 대처할 방안은 딱히 없었다.

“네 계획대로라면 확실히 내 권력은 안전해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내전에서 우리가 내건 이상을 배신해선 안 돼.”

“권력에서 물러나면 이상도 없는 거예요.”

맞는 말이다. 실질적 권력이 없는 이상은 공허한 메아리다.

“지금 누나를 망설이게 하는 건, 이 내전에 흘린 피가 너무 많아서 더 앞으로 나아가기 싫다는 누나의 기분이지, 이상은 핑계일 뿐이잖아요.”

계속해서 맞는 말만 해댄다. 리안은 처음으로 견하의 뺨을 때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눈을 감고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넘겼다.

연인끼리 첫 다툼이 이런 식이라니.

“일단 나가봐. 지금 당장 결정하긴 힘들어. 회의에도 나가봐야 하고.”

견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견하가 자신을 생각해서 그러는 건 리안도 안다. 가슴이 아렸다. 하지만 선을 넘게 할 수는 없다.

그녀가 차지한 태사 자리는 국가기구의 수장이지 폭력배의 우두머리가 아니다.

“……알겠어요. 하지만 깊이 검토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소년은 나갔다.

리안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효윤을 바라봤다. 효윤은 조금 안절부절못한 모양새로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견하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물론 각하께서 바라는 대로 하셔야겠지만…… 바라는 대로만 가긴 어렵지 않을까요.”

“그러네.”

광신도들과의 내전이라는 극단의 시대. 그런 시대를 헤쳐나가다 보니 싫어도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몇 번이고.

나, 미리안은 위기에 몰려 있는가? 여기서 욕심을 내려놓으면 안 되는가? 내려놓으면……

죽는가?

정치적으로 안정된 정상국가. 쉽게 만들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벽에 부딪힐 줄은 몰랐다.

결국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모든 안전조치를 다 취한 다음에 서서히 권력을 분배해야 하나?

아니, 그럼 그 과정에서 더욱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고 정상국가화하기 어려워지는 건 아닐까?

모든 비상조치, 모든 특수한 결정은 결국 언제든 빚쟁이처럼 찾아오기 마련이다.

효윤은 손등으로 눈을 가린 리안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걸 보았다. 진심으로 웃는 걸까, 아니면 힘내자고 억지로 짓는 미소일까.

이윽고 리안은 일어났다.

“가자.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을 계속 생각만 하고 있을 수도 없지. 일단은 회의부터 하고 생각하자.”

집무실을 나와 걸어가며, 효윤은 루우와 견하, 두 사람과 다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결심했다.

***

평양의 공략 작전은 먼저 도시 포위로 시작했다.

하천을 자연 해자로 삼고 성장한 도시는, 근대에는 하천을 심혈관으로 삼게 된다.

평양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시대에는 대동강과 보통강을 평양 장안성의 자연 해자로 삼았고, 제2제국 후기엔 성벽의 상당 부분을 허물고 대동강의 동쪽, 남쪽 건너편으로 시가를 확장했다.

“따라서 평양 공략은, 대동강 북쪽의 구 황성(皇城)뿐만 아니라 남쪽의 신시가지까지 아우르는 것이어야 한다.”

남부전선을 책임지는 김천열 중장은 참모들에게 그 점을 상기시켰다.

“어떤 전략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대동강의 상류에서 도하를 시도해서 반란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북쪽, 화령 전선을 돌파하고 내려온 아군이 이 작전을 보조해 줄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상 좋은 의견은 없었기에, 김천열은 끄덕임으로 답했다.

그는 사자 갈기 같다는 구레나룻에 부끄럽지 않은 지휘를 보였다.

평양에 펼쳐진 반란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혁명군은 사자처럼 몰아쳤다. 전선을 과감히 확대, 봉산 일대로 진격해 개경으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는 한편, 평양의 남동부에 포위망을 펼친다.

다만 도시 북쪽에서, 장수왕의 안학궁 북쪽에 있는 대성산을 장악하는 데 상당한 희생을 치렀다.

“그래도 평양 시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이기에, 필요한 희생이었다고 할 수 있지. 여기에 포진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공략을 준비해나간다.”

마지막으로 혁명군은 대동강 하구의 삼화까지 장악한다. 이로써 평양 포위망이 완성됐다.

반란군의 외부 지원과 보급이 완전히 끊겼기 때문에, 평양 탈환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

하지만 미리안을 비롯한 혁명군 사령부는 본격적인 공략을 앞두고 상당히 망설였다.

“만약 이 전쟁이 외국을 상대하는 절멸 전쟁이었다면 도시의 흔적도 남지 않도록 포격을 퍼부었겠지만…….”

리안이 삼킨 말. 이 전쟁은 내전이라는 점.

내전이 끝나면 이 도시와 시민들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 게다가 도시가 입은 피해는 고스란히 고려의 경제적 부담이 된다.

“천년 고도를 무자비하게 포격했다는 악명은 태사 각하를 향한 국민의 지지에도 타격을 주겠죠.”

안세규의 말을 전쟁장관 강태훈이 받았다.

“태사 각하뿐만 아니라 제국최고회의의 통치에도 치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이렇게 노려보고만 있을 수도 없습니다. 배급제는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하긴 하지만 불만은 조금씩 높아져 가고, 노동자들의 체력도 이제 한계입니다.”

재무장관 여준설의 말이었다. 경제지표가 슬슬 빨간불을 띄우고 경고음을 울릴 때가 다가오면서 그의 초조함도 날로 늘어갔다.

법무장관 류성일은 말없이 미리안의 얼굴을 살폈다. 리안은 지도를 노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평양 포위망을 유지한 채 개경과 한양을 먼저 공략할 수 있을까요?”

강태훈이 답변했다.

“어렵습니다. 개경과 한양도 평양보다 작을 뿐이지 상당한 규모의 도시이고, 역시 도시 포위를 통한 공략 작전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남부 전선을 밀어내는 데에도 그만한 전력이 필요한데, 평양을 포위 중인 상황에서 그 정도 전력을 차출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리안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만약 포위망의 전력 중 상당수를 남부 전선을 밀어내는 쪽으로 옮긴다면, 평양에 포위된 반란군이 반격해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높진 않겠지만, 반격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장담하기도 어렵습니다. 태사 각하께서 반격을 통해 동명 포위망을 걷어내셨던 것을, 적이 학습했을 가능성도 있고…….”

사람은 학습하는 동물이다. 전쟁 초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나라가 어느 순간 다른 나라로 재탄생이라도 한 듯 반격하는 건, 당하는 동안 적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리안의 과감한 작전 덕분에 내전 초기에는 확실히 승기를 잡았지만, 그 과감함과, 리안의 의사를 수행하는 혁명군의 역량은 분명 반란군의 머릿속에 학습됐을 것이다.

한 번 부린 수작을 두 번 통하리라 기대해선 안 된다. 그리고 내가 부린 수작은 상대방도 쓸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아직 평양의 반란군이 ‘기갑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는 없지만, 그 역시 경계해야 하고.

“지금은 평양을 포위하고 남부 전선을 밀어낸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일단은 평양의 반란군이 항복하길 기다려보죠.”

“각하, 하지만……!”

여준설의 항변에 리안은 미안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평양을 그냥 짓밟아버리면 내전이야 빨리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한반도의 국민들은 리안과 제국최고회의, 그리고 루우 황제의 통치를 절대 인정하지 않으리라.

“평양에 농성 중인 적의 사기를 하루라도 빨리 꺾을 수 있도록, 서부전선 문제를 해결해야겠어요. 조유관 대장 쪽에서 다른 보고는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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