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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60화 (60/541)

제국최고회의(6)

세규는 눈앞의 소년을 똑바로 눈에 담으려 애썼다.

이런 유형의 인간이 종종 있다.

이미 소년 시절에 재능이 꽃피기 시작한 사람. 그리고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다가 재능을 발견하는 사람.

주견하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물론 아직은 미숙하다. 그의 지식과 경험은 고등학교 2학년에 이르기까지 읽은 교과서와 그 밖의 책들, 그리고 최근 내전에 휘말리면서 얻은 게 전부다.

그러나 그가 사태를 읽고 일을 처리하는 감각, 그리고 학습의 빠르기와 의욕은 무시할 수 없다.

그건 나이를 초월한 것이다. 주견하는 애초에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두면 무시무시하게 성장하겠지.

그러니 오늘은 가능성을 하나 남겨두어야 한다.

“부탁할 일은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황제가 될 왕서라 공에 대한 걸세.”

“루우에게 관련된 일이라고요?”

‘루우’라고 따로 존칭을 붙이지 않고 친근하게 이름을 부른다.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거다.

자신이 황제가 될 사람과 꽤 가까운 사이라는 걸 과시하는 척, 세규가 지금 루우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떠볼 생각이다.

“그렇게 부르는 게 편하다면 나도 그렇게 말하도록 하지. 루우는 이제, 단순히 몽골 카간의 외동딸도 아니고, 평범한 여고생도 아닐세. 황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지.

말하자면, 그 자체로 살아있는 제도, 행정기구, 그리고 고려가 나아가야 할 청사진이란 말일세.”

주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진 알아듣겠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이 되기를 바랐네. 역대 고려민국 임시정부 주석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견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일 뿐, 잠자코 듣기만 한다.

“하지만 현실은…… 주 국장 자네도 알다시피 바란다고 해서 모든 게 이루어지진 않지. 먼 미래에 자연스레 공화국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민주’라는 원칙을 고려에 도입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네.

그래서 태사와의 협상에 나섰고, 그 결과 우리는 ‘입헌군주제’라는 결실을 얻었지.”

세규는 ‘우리’라는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굳이 정의하지 않았다.

‘우리’가 세규와 고려민국 임시정부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견하와 미리안까지 포함하는 것인지. 어느 쪽으로 해석되든 상관없었다.

“헌법 아래의 군주,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군주, 그러니까 말하자면 ‘국민의 황제’겠지. 이건 우리에겐 큰 진전일세. 뭐, 좀 강경한 공화주의자들은 내가 노선을 변경했다며 비판하지만…….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이지. 그러나,”

세규의 어조가 달라지자 주견하도 살짝 긴장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처음 시작하는 걸세. 그걸 잊어서는 안 되지. 고려는 천 년이 넘도록 전제군주와 귀족의 나라였네. 유럽에서야 국민의 군주라는 게 생소한 개념이 아니겠지만, 고려에는 생소한 개념일세. 공화정이나 민주주의가 그러하듯이 말이야.

때문에…… 우리의 입헌 황제는 언제든지 전제군주가 되는, 그런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네.”

주견하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잘못된 길’인가요? 전제군주정은?”

“분명히 말할 수 있네. 잘못된 길이네. 물론 지금 루우가 꽤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네.

하지만 언젠가 루우의 자녀가 루우의 뒤를 잇겠지. 그런데 그 아이가 루우만큼 좋은 사람이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나? 만약 루우의 아이가 인격파탄자라면? 그런 아이가 무제한의 권력을 쥔다면? 그 아이가 내릴 치명적인 결정을 견제할 장치는 어디에 있지?”

“없죠.”

주견하도 이해했다. 입헌군주는 그 권력이 제한될 필요가 있다. 권력 자체는 약할지 몰라도, ‘권위’는 전제군주와 다를 바 없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루우가 황제가 돼도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법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무게감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적절한 제동 장치는 필요하다.

물론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적절하게 견제되지 않는 권력은, 권력자에게도 좋지 않다. 긴장감이 없기에 자신의 권력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파악하는 감각을, 무뎌지게 한다.

“그렇다면, 친구인 제가, 루우가 입헌군주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잘 살펴달라는…… 그런 부탁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세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부탁하고, 들어주는 것으로 아주 미약한, 유대감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어떤 연결이 생긴 것 정도로.

주견하는 태사 미리안의 사람이고, 단숨에 이쪽으로 넘어오는 꿈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 정치가의 지나친 걱정이라고 생각해 두게나.”

“장관님의 우국충정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다만……”

이번에는 세규가 살짝 긴장했다. 이 소년은 무슨 계산을 하고 어떤 말을 뱉을까. 오늘 이 자리에서 한 번 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만?”

“아시다시피 저는 태사부에 소속된 사람입니다. 외무성 장관께서 하신 부탁은 저 개인이 선의로 들어드릴 수 있지만, 아무래도 모양이 좋지 못합니다.”

외무성 장관이 직급만 믿고 태사부의 일에 간섭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럴싸했다.

세규는 미소지었다. 총명한 소년은 학자를 즐겁게 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서로의 업무에 협력을 요청하고 들어주는 형식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장관님의 부탁을 들어드리는 대신, 장관님께서도 제 부탁 하나를 들어드리는 거죠.”

“이거야 원. 고민 하나 덜어내러 왔다가 더 붙이고 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탁을 드리는 것이긴 해도, 그 안에는 장관님께 드릴 유용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래, 뭔가?”

주견하는 잠깐 뜸을 들인다. 계산된 시간 끌기인지, 아니면 말하기를 망설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최근에 태사께서 저에게 명령 하나를 내리셨습니다.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전쟁범죄를 저지른 군인들을 조사하라고요.

물론 내전이 끝난 후 민심 수습을 위해 도저히 덮을 수 없는 범죄자들을 색출해내서 적절한 처벌을 내려야겠습니다만…… 자칫 이게, 태사 각하를 위해 충성한 군인들을, 샤냥 끝난 뒤의 사냥개처럼 삶아 먹으려는 것으로 비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세규는 담담히 듣는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주견하의 말에는 꽤 흥미로운 정보가 포함돼 있었다. 물론 정말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군인들을 처벌하는 것이겠지만, 여기에는 사병만 포함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휘관들도 통제의 책임을 진다. 따라서 이들도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아니, 태사는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하는 게 적절하겠지.

그러니까…… 숙군(肅軍). 내전이 끝나면 군에 대한 숙청이 기다린다는 말이다.

유용한 정보긴 하다. 예를 들어, 구 민국 정부 계열 군인인 조유관 대장이 이 숙청에서 벗어날 수 있게 미리 손을 써 둘 수 있으니까.

주견하는 이 정보를 내주고, 무엇을 취할 속셈인가.

“일단 조사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바로 처벌을 하진 않을 겁니다. 군사재판도 쉽게 진행되는 일이 아니고, 또 그 전에 반란군 장교들의 처벌이 끝나야 시작할 수 있겠죠.

그동안 선거 결과도 나오고 제국최고회의도 구성될 겁니다. 그럼, 그때는 ‘고려국민당’의 당수로서 이 문제를 제기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세규는 소리 내 웃었다.

“말하자면, 자네가 지금 하려는 일이 태사부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야당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형태를 취하고 싶다, 그런 건가?”

주견하는 의뭉스럽게 말을 돌린다.

“야당인지 아닌지는 선거 결과가 나와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이 얼마나 유쾌할 정도로 신중하고, 똑똑한 소년인가.

“하지만 말일세, 그 경우 자네나 태사부가 짊어져야 할 부담을 우리 고려국민당이 지게 되네. 고려국민당은 적어도 군인들에겐 크게 인기를 잃을 걸세.”

“반대로 정의를 실현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와 표를 얻을 수도 있죠.”

“투표함에 아직 들어가지 않은 표를 믿으라는 말인가?”

“그게 확실하지 않아서 그러신다면, 확실한 걸 제가 내어 드려야겠죠. 저와 이런 식의 협력 관계, 계속 이어나간다는 조건은 어떻습니까?”

굉장하군. 주견하는 세규가 왜 여기에 왔는지 파악해냈다. 뿐만 아니라 아주 대담하게 먼저 협력을 제안해온다.

“그 조건이라면 거래에 응하도록 하지.”

세규는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바로 맞잡는다. 묵직한 악수였다.

“오늘은 생각했던 것보다 수확이 많군. 대화도 즐거웠네. 다음에는 좀 더 여유를 두고 오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군.”

***

안세규를 정중하게 보내고 나서, 견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대단한 이상주의자다. 이상주의자가 위대해지려면 현실적인 방안을 쓰는 데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적인 방안이 오히려 이상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균형을 잡아야 한다.

안세규는 그게 가능한 인간이다.

견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거물이다. 온몸의 떨림을 감추는 것만으로도 쓰러질 것 같다. 그 눈빛, 그 기백에 오줌을 지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감탄하는 한편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견하는 즉시 움직여야 했다.

왜냐하면 안세규는 이 내전이 시작되게 한, 4월 1일의 테러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용의자이므로.

저렇게 웃고 갔지만, 또 무슨 일을 꾸밀지 알 수가 없다.

안세규가 뭘 꾸미지 않는다 해도, 견하는 언젠가 리안이 안세규를 반드시 숙청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 대한 대비를 해둬야 한다.

그리고 부모님을 죽인 암살조가 저 사람의 수하라면, 복수의 준비도 해야겠지.

견하는 아직 집무실에 조용히 앉아 있던 수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반장, 반장이 천손민족협회 사람들과 지금도 내통하고 있는지, 그러고 있다면 얼마만큼의 조직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 물어봐도 대답해주진 않겠지.”

“당연한 거 아니니.”

“좋아. 그렇다면 실험을 하나 해볼까 해. 방금 나간 외무장관이자 고려국민당 당수, 안세규. 앞으로도 계속 협력을 요구해 올 거야.

뭘 요구할진 정확히 모르겠어. 그래도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선에서 이야기하자면…….”

소년감찰국 국장에게 부탁할 수 있는 것, 이겠지.

“고려국민당도 청년부 조직, 소년부 조직을 합법화하고 세력을 확장하려 들겠지. 그리고 나한테 그걸 묵인해달라고 요청해올 것 같아. 머지않아 말이야.”

“정말 묵인할 거야?”

“설마. 그런 걸 묵인해주려고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건 아니라서. 하지만 겉으로는 묵인해주는 척이라도 해야 해.”

수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귀찮은 일의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장에게 조금 자유를 줄게. 고려국민당이나 사회민주당, 공산당에서 만들 소년 조직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해봐.

아니, 언제든지 무력으로 습격이 가능할 정도의 준비를 해줬으면 좋겠어. 적절히 컸을 때 짓밟아서 뿌리를 뽑을 수 있도록 말이야.”

수영은 입꼬리를 올린다.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 냉소도 들어 있었다.

“괜찮겠어? 그랬다가 겨우 진압한 천손민족협회가 다시 부활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도발하듯 말했지만, 수영은 견하가 보여주는 의외의 반응에 몸이 굳었다. 살짝, 소름이 돋았다.

견하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부활하는 건 큰 문제는 아니야. ‘내 통제하에서’, ‘합법적이기만 하다면.’”

혼란에 표정이 흔들리는 수영을, 견하는 관찰하듯 살핀다.

“이 기회에 제국입헌당, 태사부, 혹은 내 ‘천손민족협회’가 되는 것도 한 번 고려해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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