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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8화 (58/541)

제국최고회의(4)

나제홍은 왜 자기가 선택됐는지 알 것 같았다.

쓸데없는 건 묻지 않고, 무능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의욕이 넘치지도 않는다.

안전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늙어서 은퇴할 때쯤 적당한 부와 명예를 움켜쥐면 그걸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엉뚱한 생각만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으면 충분히 보장될 것이다.

태사와 주견하 국장은 그냥 정치경찰실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려주는 정도의 인간을 원했고, 나제홍은 거기에 딱 들어맞았다.

주견하는 살짝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보좌관 건은 태사께 꼭 말씀드리죠. 그 정도 편의는 충분히 봐 드릴 수 있습니다.”

견하는 나제홍을 허수아비로만 취급할 생각은 없었다. 적절히 그에게 일감을 던져줘서 잡생각이 들지 못하게 해야 했다.

일단 진행 중인 계획의 일부를 보고서 형식으로 안겨주고, 계속해서 도장을 찍게 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무사안일주의적인 인간이라도 자존감이 없는 건 아니다. 적당한 분량의 일은 적당한 자존감을 유지해주겠지.

예의 바르게 뒷걸음질로 실장의 집무실을 빠져나온 견하는, 복도에서 기다리던 유지나와 함께 걷는다.

“좀 더 강압적으로 하실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강경하게 나가는 건, 그게 꼭 필요할 때, 그게 효과가 좋을 때 해야 하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을 품고 이쪽을 통제해보겠다고 날뛰면 나도 좀 위협적으로 나갔겠지만, 알아서 기겠다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지나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견하 옆을 걷는다.

“그럼 저 실장 자리는 언제 차지하실 생각이세요?”

“항상 생각하는 건데 참 직설적이구나, 후배야.”

“중등과 과장이라면서요?”

“그래. 유 과장. 뭐 고등학교 1학년 다운 발랄함도 좋지만, 조금은 말이야, 공무원다운 품격도 필요하지 않을까?”

“상관의 승진은 부하의 승진과 관련돼 있으니까요.”

견하는 지나를 흘끔 돌아봤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똑똑한 말이긴 한데, 학교 공부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윽, 하고 입을 다문다. 조금 잔소리를 해둘까.

“학교 성적이 반드시 어떤 인간의 영리함을 보장하는 건 아니지. 하지만 보통은 학교 성적이 높은 쪽이 더 영리하고 끈기도 있어. 내가 부하의 능력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네.

그리고 소년감찰국이 감투만 달고 거들먹거리는 양아치 집단이 되는 것도 사절이야. ‘내’ 소년감찰국은 엘리트 집단이 되어야 해. ‘네’ 소년감찰국도 마찬가지고.”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지나는 배시시 웃으며 견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그 동작에 후배다운 귀여움이 있는지라, 견하는 잔소리를 멈추고 듣기 좋은 말을 좀 더 들려줄까 생각했다.

“‘제’ 소년감찰국이요?”

“그래. 내가 정치경찰실 실장이 되면 네가 맡게 될 너의 소년감찰국말이야. 내가 만든 걸 망치면 선배의 위엄이란 걸 보여주지.”

“흐응……. 그래서 언제쯤 그렇게 되실 건데요?”

“뚜렷한 계획은 아직 없어. 고등과도 만들긴 했지만, 아직 과장도 안 정했잖아. 그 외에 다른 국을 설치하면서 옛 야별초의 기능을 부활시키는 문제도 있고…… 새로운 ‘국장’들과 나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지.”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지만, 그건 지나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 리안과 할 이야기지.

“아마…… 내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가 아닐까 싶어. 대학 졸업 후 바로 정치경찰실 실장 자리를 꿰차고 전업 관료가 되는 거지. 학교와 병행하기엔 지금 국장 자리도 벅차.”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많이 피곤하다.

“근데 말이에요, 선배. 이 일…… 태사 각하 명령 때문에 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좋아서 하시는 거예요?”

“……좋아서 하는 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 너는?”

“나는 선배랑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키득, 하고 웃으면서 걸음을 빨리해 앞서 나간다. 그러나 빙글, 돌아보면서 짓는 소녀의 미소는, 장난스럽지 않았다.

***

오랜만에 깊은 휴식을 취하고 난 리안은, 견하를 보자마자 바로 임무를 줬다. 견하는 조금 연인 같은 일을 기대했지만, 실망한 표정은 짓지 않았다.

“남부 전선에서 큰 진전이 있었어. 이제 산동을 제외한 전국을 곧 장악할 거고, 내전은 끝나. 우리는 그 수습을 해야겠지. 견하 군도 맡아야 할 역할이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소년감찰국이겠죠?”

“그래. 소년감찰국이 맡아줘야 할 임무야.”

“어떤 건가요?”

“구성원 모두가 고결한 정의의 군대라면 참 좋겠지만, 인간이라는 짐승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서. 유감스럽지만 여러 가지 전쟁범죄를 저지른 병사들이 있을 거야. 그걸 색출해내.”

“체포나 즉결처형 권한 같은 것도 주시나요?”

“설마 내가 견하 군더러 그런 것도 없이 무방비한 상태로 군부대를 감찰하라고 하겠어? 당연히 있지. 어쨌든 이 범죄자들을 골라내서 처리해야, 적어도 나중에 ‘우리는 공평무사하려고 노력했다’는 변명을 할 수 있어.”

견하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조직 구상에 약간 수정을 가할…… 지도 모를 여백을 확보했다.

바라트에서는 정치장교라는 걸 둬서 군을 감시한다고 하는데, 앞으로 소년감찰국도 그런 방향으로 확장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또, 견하는 친구 재연을 생각했다. 어느 골목에서 옛 태평천국 출신 전쟁범죄자를 처형하던 그 모습을.

내가 하는 일이 재연과 다른가?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결국 재연이 하던 일을 내가 하는 것 아닌가?

“마침 적당한 악명과 존재감이 필요했는데 잘됐네요. 그런데 잘못하면 ‘우리는 태사를 위해 죽도록 싸웠는데 돌아오는 대접은 겨우 이거다’라는 반발이 있지 않을까요?”

“그에 대한 대비도 당연히 있지. 오늘 바로 서부 전선으로 출발해서 전선 시찰을 할 거야. 야전 병원에도 위무를 갈 거고.

적당히 그럴싸한 사진만 찍고 오는 게 아니라 병사들 사이에 감격스러운 일화가 퍼지도록 제대로 하고 올 생각이야. 미안하지만 악명은 주견하 군이 고스란히 감수해줘.”

견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어요. 음…… 본격적으로 임무에 착수하기 전에, 대학에 다니다가 입대한 군인들을 좀 살펴보고 싶어요. 적당히 한 명 골라내서 일을 맡겨보고 싶거든요.”

“인재 발탁인가. 좋아. 그렇게 해. 그런데 말이지…….”

견하는 긴장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아무리 중학생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리안이 진지해질 땐, 견하 역시 그 위압감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조직을 불리는 것도 좋고 영향력 확대도 좋아.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사람을 받아들이진 마. 때로는 믿을만한 소수 정예가 나을 때도 있어.”

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의 말도 옳다. 물론 지금은 이런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애들’을 모아서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며, 견하에게 충성하도록 경쟁을 유도하는 방식이 통하고 있지만, 영원한 방법은 아니다.

항상 그들보다 더 발전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 교묘하고, 정교하며, 때론 악랄하고, 또 때론 너무 인간적으로 따스해서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인간 조련법을 익혀나가야만 한다.

그렇기에 유능하고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군에서 국가와 태사에 대한 충성을 주입받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 그중 유능한지 아닌지를 따져서 소년감찰국에 데려와 고등과 과장을 맡겨보자.

그리고 견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면, 고등과를 토대로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겠지.

유능한가만 따지자면 양수영도 나름 괜찮지만, 아직 견하와 같은 고등학생인 데다 미숙한 점이 없는 건 아니다. 게다가 이쪽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견하의 얼굴을, 리안 역시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곧 리안은 엄숙한 얼굴을 풀고 미소지었다.

“뭐, 정 안되면 나한테 도와달라고 해. 시행착오 정도는 수습해 줄 테니. ……여자친구잖아?”

***

겉보기엔 친절하고 예쁜 여자애들에 둘러싸인 행복한 학교생활이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옆자리의 소녀는 자기가 꽤 귀여운 여성임을 강조하듯 틈만 나면 은근슬쩍 몸을 붙여오지만, 앞으로 황제가 될 때를 대비해 무언가 속내를 품고 있다.

거기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자칫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일단은 그 친밀한 접근을 그냥 기분 좋게 받아들이되, 최소한의 계산 정도는 하는 선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엔 반 아이들도 루우가 곧 황제가 되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쉬는 시간만 되면 와글와글 몰려든다. 이것 역시 견하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저 안에 또 다른 속내를 품고 루우에게 접근한 사람이 없진 않을 테니.

“내가 황제가 되더라도 존대하거나 과도한 예절은 삼갔으면 좋겠어. 여기 있는 반 친구들은 그냥 지금처럼 루우라고 부르고, 친구로 대해줘.”

루우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몇몇 여자애들이 ‘귀여워~’하면서 루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파묻혀 있으니 정말 다른 애들보다 어려 보이긴 한다. 아직 생일이 안 지나서 열여섯 살이기도 했고.

어쨌든 루우는 ‘잘 웃지 않고 무뚝뚝해 보여도 실은 겸손하고 착한 애구나’하는 평을 얻어 생각보다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

문제는…… 누가 루우에게서 견하의 정보를 빼내려 할지 모른다는 점.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쉬는 시간에 찾아와 은근히 루우를 견제하는 효윤의 태도.

뭐 효윤이 루우 개인을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아마 루우와 리안의 사이의 정치적 문제가 반영된 거겠지.

어쩌면 효윤은 따로 루우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수도 있다.

환도시에서의 전투 이후 견하를 포함한 세 사람이 확실히 친해진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우와 리안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건 공적인 문제니까.

게다가 견하 개인도, 효윤의 눈치를 조금 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루우가 견하와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효윤에게 슬쩍 흘린다거나, 아니면 효윤 자신이 목격한 걸 리안에게 보고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일이다.

‘내가 놀아주지 않는다고 학교에서 그럴 줄은 정말 몰랐는걸.’

리안이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면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얼굴 앞에 불쑥 들어온 소녀의 얼굴에 놀라 견하는 고개를 확 뒤로 젖혔다. 효윤이었다.

“아, 효윤이구나. 별생각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지난번처럼 견하의 책상 위에 턱 걸터앉아 내려다보고 있다. 다른 애들처럼 하복을 입었다. 짧은 블라우스 소매 아래 하얀 팔이 시원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시원한 다리도 눈앞에 있었지만 거기로 시선을 내리진 않기로 했다.

“피곤하다고?”

효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팔을 뻗었다. 이마에 그녀의 차가운 손바닥이 닿는다. 짧은 소매 안쪽으로 효윤의 겨드랑이가 보이는 것 같아 견하는 눈을 감았다.

이성 친구의 호의는 기분 좋은 일이다. 순수하게, 이 시원한 호의를 잠깐 만끽하다 견하는 눈을 떴다.

효윤은 뭔가 감상하듯 눈매를 부드럽게 풀고 있었다.

“왜 그래?”

효윤은 어, 하면서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였다. 다른 애들과 이야기를 마친 루우가 슬쩍 효윤의 팔짱을 꼈다.

볼을 비빌 듯이 효윤과 밀착한 루우는 한 번 싱긋 웃더니 견하에게 말했다.

“좀 있다가 점심, 셋이 같이 먹으러 가는 건 어때?”

효윤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고, 견하도 효윤의 조금 전 표정에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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