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최고회의(3)
당연한 말이었다.
허동주가 그렇게 죽고, 적들이 정말로 황제를 옹립하게 된 이상 승패는 정해졌다.
이제 그들은 역적이 된다.
“그러니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해야지. 하지만 그냥 쉽게 물러나진 않을 거요. 처절하게 괴롭혀 줍시다. 그 태사라는 년과 황제가 되겠다는 몽골년 둘 다.”
오늘 처음으로 신수덕에게서 인간적인 감정이 드러났다.
증오.
그는 눈앞에 루우와 리안이 있다면 자신의 이와 손톱으로 찢어놓을 듯한 증오를 뿜어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침략 전쟁을 저지르고도 민족의 독립을 외치는 저열한 무리와 싸우며 배운 점이 아주 많소.
이제 배운 걸 한번 써먹어 봅시다. 삼한반도의 우리 군은 지하 조직화합니다. 끝없는 테러에 밤잠 못 이루게 해 주는 거요.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도 좋겠군.”
신수덕의 시선이 갑자기 움직이자 장군들은 얻어맞기라도 한 듯 움찔했다.
신수덕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산동도 쉽게 넘겨줄 수는 없지. 민족문제의 지옥으로 만들어 영원토록 두 년의 두통거리로 만들어 주겠소.
아, 그리고 키타이와 낭키아스 쪽과도 협상 중이오. 듣자 하니 두 분 칸께선 그 몽골 계집의 숙부 되신다지? 숙부들과 조카가 싸움이라도 벌인다면 아주 볼만하겠군.”
신수덕은 말을 마치고 부드러운, 정말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충동적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모두가 박수 치자 신수덕은 부끄럽다는 듯 손바닥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박수를 멈추진 않았다.
신수덕의 눈은 전혀 웃지 않았으므로.
***
6월 10일 총선거는 고려 제3제국의 첫 선거 치고는 생각보다 별 탈 없이 끝났다. 혁명군이 장악한 지역에 한정된 선거라는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국민 대다수가 선거를 경험한 건 큰 수확이다. 안세규와 고려국민당은 그렇게 평했다.
구석진 시골 마을부터 전선의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어쨌든 투표소에 접근할 수 있도록 상당히 신경 쓴 선거였다.
집계 방식의 미숙함과 다른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결과를 보려면 일주일 정도 걸리겠지만.
“태사께선?”
“주무셔. ‘한고비 넘겼으니 이제 낮잠 좀 자도 되겠지!’라고 한 다음 방으로 들어가셨어.”
효윤의 대답에 견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오늘 하루는 리안을 귀찮게 하지 말자.
소년감찰국의 조직에 관련된 보고와 제국입헌당 조직 개편에 대한 아이디어 등을 잔뜩 들고 왔지만, 시급한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다.
효윤과 견하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효윤은 싱긋 웃으며 턱을 괸다.
“허동주를 잡으러 갔을 때는 정말 죽는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서 너랑 이야기하네.”
“아, 나도 그거 무슨 기분인지 알 것 같아. 설명하긴 어렵지만.”
“딱 방학식을 한 날 저녁의 느긋한 기분…… 에 가깝지 않을까?”
견하는 키득, 하고 웃었다. 효윤은 조금 놀랐다.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소년이구나.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아직. 각하도 안 드셔서 먹을 틈이 없었어.”
“그럼 잘됐네. 마침 도시락 가져온다고 했거든.”
“에? 뭐? 누가?”
그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무리 반 친구라지만 황제가 될 사람에게 도시락 심부름이라니…….”
“왕서라…… 공?”
루우는 도시락이 든 상자를 손에 든 채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존대. 그리고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같은 반 친구로서 그에 맞는 대응을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음…… 그래도…….”
이런 점에서는 생각보다 완고한 효윤은, 격식을 내던지는 게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루우는 고개를 효윤 쪽으로 쓱 내리고 강조하듯 말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루우’.”
견하도 망설이는 효윤의 등을 살짝 밀어줄 겸, 루우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 뭐,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같은 반 친구로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정 마음에 걸린다면 공적인 자리에서는 효윤이가 하고 싶은 대로.”
효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럼.”
루우는 찡그린 표정을 풀곤 양은 도시락통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하나 남은 리안의 도시락은 상자 안에 남겨뒀다.
“근데 웬 도시락이야?”
뚜껑을 열고, 달걀부침과 쌀밥의 따스한 향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효윤이 그렇게 물었다.
“그냥…… 이제 다시 학교에 갈 시간이 날 텐데 반 친구끼리 잘 지내보자는 취지지.”
루우가 시선을 견하의 이마 근처로 보내며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출석 일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옛날 귀족들은 공적인 일이 있어서 빠지게 되면, 그걸 출석으로 치는 제도가 있는데, 아마 그걸 이용해서 우리 출석 일수도 채우지 않을까 싶어. 태사 각하도 그 제도로 지금까지 무사히 진급할 수 있었고.”
“타이시가 그냥 결석하고 싶을 때 써먹은 적은 없는 거야?”
“선대 태사께서 쓰러지시기 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 이후는 장담 못 하겠네.”
“각하야 그렇다 치고 옛날 귀족들은 정말 편했겠구나.”
“부패했다고 여기저기서 쑤군댔을걸.”
견하는 루우의 냉소적인 의견에 피식 웃다가, 있잖아, 하며 말을 돌렸다.
“내전, 이대로 잘 끝날까?”
“잘 끝나야지. 그 고생을 했는데?”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효윤은 견하가 질문을 한 의도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만약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이라는 게, 얼마 남지 않은 거라면 어쩌지, 그런 생각하는 거야?”
루우도 팔짱을 끼고 덧붙였다.
“생각보다 모순이 많은 남자네. 그럴 거면 학교 안에 자기 조직은 왜 뿌리 내렸어?”
모순…… 하고, 견하는 되뇌었다. 모순이다.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면서, 소년감찰국 조직을 확대하고 학교에, 아니 제1고로도 모자라 수도 내 각 학교에 조직원들을 심어두면서도, 그게 실제로 활용될 일은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조직의 확장을 즐기고, 또 조직이 활약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이 이상 앞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에는 두려움과 짜릿함이 공존한다.
손이 따스한 무언가로 덮였다. 효윤의 손이다.
효윤이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견하의 손을 잡고 있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는 곧 퍼득, 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거뒀으니까.
“너무 침울하게 생각하진 마. 뭐, 우리가 평범한 고등학생다운 추억은 못 만든다 치더라도, 견하 네 말대로 우리 셋은 반 친구고, 좀 특이한 추억을 우리끼리 만들면 되는 거지.”
“그래. 누가 황제의 여고생 시절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겠어.”
마냥 희망에 찬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견하는 미소지었다.
“그래. 그렇겠네.”
***
나제홍 예비역 중장은 아직은 낯선 새 집무실을 한 번 둘러본 후, 자리에 앉았다.
태사부 정치경찰실 실장.
오늘부터 그의 직함이었다. 원래 ‘야별초’였던 중세식 이름을 이번에 정치경찰실로 바꾸고 조직이 개편되는 중이었다.
그거야 내전이 마무리되고 개혁이 시작됐으니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전역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이 자리에 앉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생각해보자. 이건 좌천인가?
별 탈 없이 군 경력을 쌓아가던 사람을 갑자기 군에서 나가라고 하니 어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역일 때 나제홍이 활동한 무대는 기껏해야 군단사령부, 가끔 참모본부에 들락거리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직속 상관이 태사, 대원수다. 그러니 좌천은 아니다.
군이 아니라 정계라는 전혀 다른 분야에 들어와서 얼떨떨한 것이지, 어쨌든 핵심부에 더욱 접근한 위치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왜 나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정치경찰실은 국민의 정치적 여론을 감시하고 언론을 검열하는 등의 일을 맡는다. 나제홍이 군에 있을 때 정보 관련 업무를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이건 그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나제홍은 이 분야는 아는 게 없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고려 최고의 명문이라는 제1고. 그 교복을 입은 소년이 들어왔다.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다, 나제홍은 ‘온화한 미소’라는 가장 무방한 대응을 골랐다.
다행스럽게도 상대도 온화한 미소로 답해준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새 집무실에 불편하신 점은 없으신지.”
“아, 괜찮네. 내가 뭐 그렇게 짐이 많질 않아서. 일단 예편 전에 쓰던 걸 옛 부하들에게 가져다 달라고 했으니 한동안은 별문제 없을 걸세.”
“원하시면 옛 부하들을 실장님 휘하로 배치하는 일도 가능합니다.”
“오…… 그건 정말 고맙군. 혹시 부하 중 이쪽 일을 해보고 싶은 친구가 있는지 알아볼 테니, 그때는 꼭 좀 부탁하겠네.”
새로 비서를 뽑는 것보다 전부터 자신을 보좌해서 손발이 맞는 사람을 데려오는 게 더 낫다. 나제홍은 그런 배려를 해 주는 소년을 찬찬히 살펴본다.
군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온화한 인상의 미소년. 이름이 주견하라고 했던가. 나이보다 훨씬 의젓하다. 아들이 있다면 이런 아들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나이에 비해 의젓한 소년’은 그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성숙하다는 건 좋은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보이는 것보다 교활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들리는 바에 따르면, 주견하의 이력은 참 재미있다.
이단. 그것도 꽤 전투력이 높은 자다. 실제로 허동주의 멱을 딴 자는 이 소년이라는 소문이 있다.
그러니까, 저렇게 곱상하게 웃고 있어도 손에 피를 묻혀 봤다는 말이지.
암살당할 뻔한 태사를 구하는 공을 세우는 것부터 시작해서, 옛 야별초 본부 진압 작전에 참여하고, 환도시에서는 허동주를 처형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나제홍이 여기 오기도 전에 소년감찰국이라는 걸 만들어서 거기 국장으로 앉아 있다.
그래, 소년감찰국하니 하니 생각났다. 나제홍은 정치경찰실의 조직도를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지금 정치경찰실의 하부 조직으로는 소년감찰국 단 하나만이 있다.
말하자면 주견하는 지금 나제홍의 직속 부하지만, 정치경찰실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실권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소년은 얼마 전에도 소년감찰국에 소속된 인원을 두 배 이상으로 늘리더니, 이젠 밑에 대학교를 담당하는 고등과와 중고등학교를 담당하는 중등과를 신설했다.
연령대 별로 나눠서 업무를 보려는 것 같았다. 물론 보고는 모두 사후 보고였다.
그래도 나제홍은 주견하에게 불평 한마디 할 수 없다. 그냥 보통 부하를 대하듯 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주견하는 태사의 최측근 중 한 명이니까.
들리는 말로는 태사의 애인이라고도 한다. 스무 살, 열일곱 살, 뭐 태사가 데리고 놀기에 딱 적당한 나이이기도 하다. 생김새도 그럴듯하고.
그러다 보니 나제홍은 자연스럽게 ‘주제를 파악했다’.
정치경찰실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건 소년감찰국이라는, 주견하의 자리를 감싸기 위한 그럴싸한 포장이었다. 옛 부하들을 데려오는 일도 주견하의 ‘허락’을 구해야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실제로 모든 일은 태사와 주견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나제홍 자신은 그 일들의 가림막이 된다.
기분이 나쁜가?
전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