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최고회의(2)
백성의 위임이 아니라, 귀족들이 좋아하는 신의 권세를 빌리면, 고려 땅의 황제, 라는 형식을 취할 수 있다.
그런데 루우가 이렇게까지 그 형식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몽골 황실에서 자랐기에 그 관습을 지키려는 것만은 아닐 터.
루우는 총대주교와 친인척 정도만 참석한 대관식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루우의 대관식은 친인척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의식이라는 것이다.
“몽골 카간이나 키타이, 낭키아스 칸의 눈에 새겨주고 싶은 건가? 루우 네가 황제가 되었다는 걸?”
“그래.”
“결국 그래서 대체 뭘……”
노리느냐고 질문을 하려다, 리안은 깨달았다.
분명히 지금 몽골의 황위 계승권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낭키아스의 게레센제 칸이다. 현 카간의 동생.
지금 카간은 외동딸 하나뿐.
“……카간 계승이라도 노리는 거야?”
“부정하진 않을게.”
루우도, 리안도 입을 다물었다.
함부로 입에 담을 소리는 아니었지만, 몽골 합병을 노리던 허동주의 주장과 별다를 게 없지 않나?
차이가 있다면 루우는 개인의 권리를 인정받고자 하는 거고, 허동주는 침략 전쟁의 시작으로 삼고자 하는 것 정도였지만,
몽골 병탄이라는 결과는 같다.
허동주를 죽였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듯, 허동주와는 다른 곳에 뿌리를 둬도 생각이 닿는 곳이 같다면 그 또한 허동주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리안의 머릿속에는 유럽 역사에서 몇 번인가 있었던 사건이 떠오른다.
왕위 계승 전쟁.
물론 루우를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일 수는 없다. 죽이려 들면 내가 죽는다. 루우는 물리적이든 정치적이든, 리안의 생명을 끝장낼 수 있다.
국민들은 이미 루우를 황제로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루우의 화려한 등장 무대는 리안이 마련해 준 것 아니던가.
내전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수덕 주살을 선포하려면, 황제의 존재가 필요하다. 루우가 옥새를 찍어서 권위를 실어주는 절차가 필요하다.
‘이때를 노렸나.’
이를 갈 수도 없고, 노려볼 수도 없다. 어쨌든 자신은 루우와 타협을 하려고 이 자리에 불렀으니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리안의 마음속에 자리한 권력을 향한 열망이 고개를 든다. 루우가 지금 이 자리에서 리안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안세규는 이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안세규가 거절한 것을 자신은 받아들일 기회가 왔다. 안세규에게서 완전히 루우를 분리하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당길 수도 있다.
루우의 몽골 황위 계승권과 자신의 권력을 사이에 놓고 벌이는 거래.
받아들인다면, 나도 허동주와 마찬가지인가? 아니면 이런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고 윤리나 도덕을 따지는 쪽이 멍청이인가?
고민은 길게 할 수 없다. 고민할 시간이 충분했다면 누구나 다 원하는 바를 이루었을 것이다.
시간은 자꾸만 결단을 재촉하고, 금방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린다.
“좋아. 대관식, 그런 식으로 하는 거 협조할게. 하지만 몽골 황위 계승은 피를 적게 흘리는 방법으로만 추구해야 해. 안 될 것 같으면 깨끗하게 접어야 하고.
내전이 끝난 고려가 황위 계승 전쟁 같은 걸 할 역량이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허동주 같은 방식은 절대 안 돼. 그 외의 방법이라면 나도 협력을 아끼지 않겠어.”
이십 대 중반에 루우를 낳은 몽골 카간의 나이는 이제 사십 대 초반이다. 근대 의학과 카간의 건강을 생각하면 카간의 수명은 아직 꽤 남았고, 그 사이에 카칸이 루우의 ‘남동생’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루우는 몽골 황위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루우 역시 짧은 고민에 잠겼다. 리안이 제시한 이 조건을 안세규가 알았을 때, 안세규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것인지 아닌지 재 보는 듯했다.
이윽고 루우는 안세규가 그럴 사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기에 안세규는 지나칠 정도로 원칙주의자였다. 황위 계승 전쟁 같은 걸 생각할 사람이 아니다.
“고마워. 그럼 나도 타이시가 제시할, 내 권리를 인정해 준 대가에 대해 들어보고 싶은데.”
“종신 태사. 어때?”
“너무 비싼데.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몽골 카간 자리를 대가로 평생 타이시의 꼭두각시가 되라고? 황위 계승 전쟁까지 협력해주겠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협력 수준으로는 아니야.”
“좋아. 그렇다면 ‘제국최고회의 의장이자 태사 자리는, 황제 개인의 의사가 아니라 제국최고회의의 의결을 통해서만 해임할 수 있다’는 건 어때.”
“제국최고회의가 추천한 의장 및 태사 후보에 대한 거부권을 황제에게 준다면.”
“…….”
리안은 다시 말이 없었다. 거부권을 준다, 라.
루우는 거부권을 행사할까? 그러니까 거부권을 행사해서 리안을 방해할 수 있을까? 방해는 할 수 있겠지만 영원하진 않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태사인 리안의 권위도 손상되지만 황제도 논란에 휩싸일 것이다.
국민의 손으로 뽑은 제국최고회의와 대립한 셈이니까.
하지만 충분히 위험하긴 했다.
그렇다면, 제국최고회의 첫 의장으로서의 임기 동안 제국입헌당의 입지를 충분히 다져두고, 루우가 등을 돌렸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
“거부권 발동에 제한을 둔 상태라면, 황제에게 거부권을 부여하도록 하지.”
루우는 정말 오랜만에 미소를 보였다.
“만족스러운 협상이야.”
***
서부군에 함락됐던 용성을 탈환하고자, 혁명군도 북부 전선을 정리하고 집결하기 시작했다.
“허동주의 사망 후 기세 좋게 반란군을 몰아붙였지만, 서북부의 몽골군과 대치하느라 전력을 분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세가 다소 사그라드는 건 감수해야지.”
“반란군은 우리가 집결하는 틈을 타 남쪽의 항만시설을 이용해 산동으로 탈출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탈출할 아군을 지키기 위해 용성과 대릉하 강기슭의 방비도 강화하는 중입니다.”
대릉하는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흐르다 남쪽으로 물줄기가 꺾여 발해만으로 나간다.
용성의 시가지 주요부는 이 대릉하의 북안에 있어, 서부군이 용성을 함락시킬 때는 남쪽에서 대릉하를 건너는 한편 북쪽에서도 포위하는 방식을 취했다.
“하지만 지금은 반란군이 수세에 몰렸습니다. 용성은 북쪽으로 홀로 돌출된 형국이죠. 반란군 측에선 다리를 끊고 대릉하를 방어선으로 삼을지, 아니면 용성에서 최대한 우리의 출혈을 강요할지 계산할 겁니다.”
조유관 대장이 받은 보고에는, 결국 반란군이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보기로 했다는 결론이 담겨 있었다.
“신중하게 공격하면 결국 보급과 사기 면에서 우세한 아군이 결국 이기겠지만. 정치적 문제가 끼어 있는 전투다 보니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겠지.”
조유관은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그에겐 상급자의 명에 복종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에 충실해야 하는 군인의 의무가 있는 한편으로, 죽어간 동지나 선배들의 이념을 지켜야 한다는 인간적인 의무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옛 민국 정부가 새 정부 안에서 지분을 확보할 수 있도록 극적인 전투를 ‘연출’해야 했다.
정치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 순수한 군인으로 있겠다는 건 멍청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물론 정치 권력의 눈치만 보느라 부하를 개죽음으로 몰아가는 장교도 있지만.
어떤 이는 ‘정치’는 더러운 무언가고, 그 ‘정치’라는 영역에서 분리된 ‘순수한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헛된 망상이다. 사람은 숨이 붙어 있는 한 정치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가장 자유로워 봤자 정치의 노예다.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타협 지점을 찾아야 한다. 정치적으로도 현명하고, 전술 혹은 전략적으로도 올바른.
지휘소의 부하 장교들을 보며 그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는 용성의 적 주력이 반격을 가해 북상할 가능성은 배제해도 좋겠지. 북쪽 포위망을 유지하면서 대릉하의 다른 도하 지점을 찾아 돌파한다.
발해만의 항만시설을 우선 장악하면, 남쪽으로도 포위망을 만들고 적의 전략도 저지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용성의 적을 포위 섬멸하도록 하지.”
대규모 항복을 받아내도 좋을 것이다. 극북방위군은 조유관의 주력인 동시에, 옛 민국 정부를 지지해 줄 유권자들이기도 하니까.
헛되이 죽게 하지 않고 내전을 마쳐, 무사히 집에 돌려보내야 한다.
***
치청(淄靑)의 산동총독부는 옛 시골 마을 하나를 완전히 밀어버린 가운데, 섬뜩할 정도로 하얀 외관을 자랑하며 서 있다.
치청이라는 도시 이름은 고구려 유민 출신 절도사 정권의 이름에서 따왔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총독부는 옛 태평천국의 흔적까지 말살하려는 정책의 총본산이다.
홀의 거대한 샹들리에부터 구석진 방의 문고리 하나에 이르기까지 지배자의 위압감을 상징하는 건물 내부.
그 어떤 기개 높은 한족 독립운동가라도 일단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우아한 자세로 가장 가혹한 폭력을 행사할 계획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곳임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회의실 안에서 대략적인 전황을 주고받고 대책을 의논한 장성들은, 이제 이야기할 거리가 떨어지자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보고하고 이 자리를 해산시켜 줄 주인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너무 잘 알았고, 또 그걸 즐겼다.
이윽고 주인이 들어왔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렷 자세로 주인을 맞이했다.
산동 총독 신수덕이었다.
키는 컸지만 허동주처럼 단단한 느낌은 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깡말랐다는 느낌이다.
갸름한 얼굴과 단정한 가르마, 그리고 안경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재무성의 엘리트 관료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그의 눈을 본다면, 누구도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형수술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이 선 눈매에, 포유류가 아닌 것 같은 눈동자.
허동주의 눈도 무시무시했지만, 거기엔 적어도 인간이 이해할만한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신수덕의 눈은 그냥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육로를 통과시켜달라는 요청은 끝내 거부된 거요?”
의례적인 인사도 없이 일단 질문부터 던진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예. 몽골 정부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을 듯합니다.”
“너무 그렇게 생각할 건 없소. 방해하지 않겠다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지. 저쪽 사정도 어지간히 복잡한 모양이오.”
신수덕은 자신의 농담에 만족한다는 듯 입가를 비틀어 웃음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장성들도 따라서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도 나름 잘났다 자부하는 사람들이건만.
여기 총독부의 공기는 도저히 멀쩡한 정신으로 들이마실 만한 게 아니었다.
신수덕은 자리에 앉았다. 장군들도 자리에 앉아 그의 입만 바라본다.
“문제는 서부 전선에서 아군을 철수시킨 다음이오. 어떻게 논의가 되었소?”
“그…… 두 가지 방향으로 좁혔습니다. 하나는 다시 삼한반도에 파견해 그쪽 전선을 보강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 산동에서 수비를 굳힌다는 것입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수염을 밀어낸 피부를 천천히 만지며, 신수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슬프게도,”
과연 슬픔이라는 걸 느끼긴 할까 모두가 의심했지만, 감히 입 밖으로 꺼내는 자는 없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돌아가신 문하시중 각하의 복수를 할 수도, 그분의 이상을 실현할 수도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