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최고회의(1)
볼이 간지럽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볼을 스치듯 누르고 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견하는 눈꺼풀을 천천히 들었다.
햇살을 가리는 누군가가 눈앞에 있었다. 견하는 아직 잠기운에 취해 그림자에 잠긴 그 형체를 보고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형체가 날씬한 소녀임을 알았을 때, 놀라움이 견하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소년의 잠든 얼굴도 보기 좋지만, 너무 긴장감이 없는 게 아닐까?”
그렇게 말하는 소녀는, 견하의 상관이자, 연인…… 은 아직 아닌, 태사 미리안이었다.
거의 늘 제복을 입고 있던 그녀는, 오늘 아침엔 가벼운 셔츠 차림이다.
목덜미와 어깨, 날개뼈, 그리고 허리로 이어지는 날렵한 곡선이 참 예뻤다. 긴 머리카락은 오른쪽 어깨 앞으로 넘겨, 가슴을 따라 흘러내리며 허벅지를 가렸다.
목소리는 느긋했지만, 얼굴은 빨개졌고, 입가의 미소는 간신히 끌어올린 듯하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견하도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어젯밤에 잘 씻고 잤던가?
남은 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아침 공기와 햇살의 영향일까, 묘한 충동이 견하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이대로 저 작은 어깨를 껴안고, 생각보다 탐스러운 골반에서 허벅지로 천천히 손을 뻗고 싶다. 아마 리안은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견하는 그 충동을 억눌렀다.
“남자 방에 막 들어오시다니, 이런 쪽으로도 생각보다 대담하시네요.”
안 그래도 빨간 얼굴이 더 빨개졌다.
“대담한 게 아니라, 그건 우리가……!”
우리가…… 하면서 말을 흐렸다. 그날 밤의 충동적인 입맞춤 후, 연인에 가까운 사이가 된 듯했지만, 또 어떨 때는 여전히 그저 공적인 관계로만 남아 있는 것도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아직 연애 경험이 없어서 뭘 어떻게 이어나가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리안의 정치적 입장도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일 것이다.
섭섭한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래도 견하는 확인하고 싶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거짓은 아니라는 걸.
견하는 왼손을 내밀었다. 리안의 얼굴을 보니, 어쩌면 연인 사이를 공표하지 못하는 그녀 자신을 혐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리안은 큰 눈을 살짝 더 크게 뜨고 견하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마주 잡았다.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마주 잡는 그 행위만으로도 충분했다. 말은 더 필요 없었다.
일어나서 그대로 소녀의 허리를 껴안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도 가라앉았다.
“이제 일어날게요. 내일 선거에 대비해야죠.”
***
고려는 민주적인 절차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던 나라였다.
전통적인 농촌 사회에는 합의제 기구가 있긴 했지만, 그걸 국가 단위로 확대했을 때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전통 사회의 경험을 그대로 국가의 총선거에 대입하다 보니, 마을의 촌장이나 훈장을 선출하는 기분으로 선거에 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민주정이 정착한 나라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각 당의 당원들이 마을마다 돌며 자기 정당에 투표해 달라고 잔치를 열기도 했다. 신발이나 우산 같은 선물을 나눠주는 일도 있었다. 노인들은 대접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옛 사회의 미덕으로, 표를 약속했다.
도시 물을 먹은 사람들은 그나마 근대 민주국가들의 제도를 조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태사 미승휴의 혈통에서 오는 ‘정통성’이라든가 ‘의리’같은 전통적인 가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더구나 제국입헌당은 앞으로 황제가 될 ‘왕서라 공’을 옹립하고 있다. 당연히 제국입헌당이 여당이 돼야 하고, 이 여당이 앞으로 정책을 잘 펼치려면 투표로 힘을 실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게 국민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리안과 제국입헌당은 선거의 패배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급진적인 노동자의 가정은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에 투표하겠지만 이들은 표를 나눠 가지니 그리 큰 세력이 될 수는 없다.
보다 온건한 노동자들이나 민주주의 운동을 해 온 대학생들은 안세규의 고려국민당에 표를 던질 것이다.
고려국민당이 생각보다 많은 표를 얻더라도 한동안은 제국입헌당과의 연합 정권을 유지할 테니, 역시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다음 선거가 걱정이지.”
당 지도부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말대로 다음 선거는 ‘선거 경험이 있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거다.
그렇기에 제국입헌당은 이번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치 환경을 충분히 연습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냥 외국 제도를 본뜨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안일한 생각이었어. 본뜨는 것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세세한 곳까지 신경 쓸 일이 정말 많았다. 학교나 관공서가 있는 마을은 수월했지만, 그렇지 않은 마을은 투표소를 만드는 일조차도 어려웠다.
어떻게 간신히 만들어도, 그 투표소를 관리할 사람들, 투표 절차를 안내하고 감독할 사람들, 투표용지를 안전하게 이동시키고 집계할 사람들을 모으고 교육하는 일도 다 신경 써야 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정당과의 신경전도 만만치 않았다. 혹시라도 자기네 정당에 불리한 요소가 하나라도 있을까, 자질구레한 부분까지 말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내일, 6월 10일이 선거일로 결정된 후 계속 그런 ‘또 다른 전쟁’을 치르느라 리안의 신경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피로가 쌓이면 주견하한테 가서 해소하는 거야?”
눈앞에 앉은 ‘왕서라 공’,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는 그렇게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의 의도를 재면서, 리안은 피식 웃었다.
“글쎄, 그런 걸까.”
일부러 애매한 대답을 흘렸다. 루우에게 자신과 견하가 어느 정도로 깊은 사이인지는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루우의 추측보다 좀 더 농밀한 사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고, 견하가 리안의 약점이 될 수는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답을 내놓았다.
미래의 황제라 해도 정치적으로는 대립할 여지가 꽤 컸기 때문에.
루우도 별로 분명한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는지, 그 화제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루우를 자신의 집무실로 부른 건, 확실하게 안세규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일시적이라고 해도 루우가 안세규보다 리안과 더 가까운 쪽에 서게 된다면, 그 이득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리안은 그 목적을 당장 꺼내는 것보다, 다른 화제를 먼저 이야기하기로 했다.
물론 루우라면 리안의 목적 정도는 짐작하고도 남겠지만, 그걸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머저리들이나 ‘내 말이 틀렸어?’라고 되묻는다. 말은 이치에 맞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게 아니다.
꺼내서 상황이 나빠지는 말은 ‘틀린’ 말이다.
“즉위식에 대한 이야기야.”
“외무장관보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네.”
안세규가 먼저 루우를 불렀었나.
루우는 안세규의 제안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낀 듯하다. 지금 루우의 관심은 고려의 황위에 있다. 안세규는 그와는 별 관계가 없는 제안을 했거나, 루우의 황위에 대한 갈망을 견제하려 한 걸까.
그렇다면, 루우의 저 말은 안세규와는 다른 제안을 꺼내 보라는 뜻.
그게 루우의 흥미를 끌어당긴다면 루우도 어느 정도는 리안에게 더 협조적으로 나올 것이다.
“즉위식은 총선거가 끝나고 제국최고회의가 구성된 이후에 하는 것이 좋겠어.”
“정식으로 국민의 대표가 된 집단이, 다시 황제를 추대하는 형태를 취하기 위해서?”
“맞아. 그렇게 하면 국민의 지지를 받는 황제라는 점을 내세울 수 있어. 국내든, 외국에든.”
루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는 했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다는 눈치였다.
“타이시(太師). ‘고려의 황제’와 ‘고려인의 황제’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아?”
이번에는 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군주제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리안은 잘 모르는 이야기였다.
“같은 거 아닌가? 실제로는 어떻든지 간에, 이념상으로는 국민은 국가의 근간이니까.”
“근대 국가의 이념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건, 옛 제도에서 ‘황제’라는 ‘작위’에 대한 이야기야.”
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루우의 설명을 기다렸다.
“‘고려인의 황제’는 고려 제국 국민, 그러니까 ‘사람의 황제’지. 하지만 내가 잇는 건 제국 국민이 곧 제국이라는 식으로 이해되기 전부터 있었던 황제의 자리야.
즉, 내가 말하는 ‘고려의 황제’라는 건 고려인의 황제가 아니라 ‘고려라는 땅의 황제’지.”
여기까지 설명을 듣자 리안도 이해했다.
“‘백성의 황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귀한 황제라……. 뭐 그런 식이라면 즉위식을 좀 더 일찍 치를 수도 있지. 기존 정부를 구성하던 관료들과 나, 태사의 추대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그래서 거둘 수 있는 이익은 고려 국민의 황제보다는 적지 않을까?”
혈통이야 확실히 고려 태조를 이었으니, 핏줄의 고귀함 측면에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루우는 다른 고귀한 핏줄도 잇고 있는 점이 문제였다.
칭기스 카간과 쿠빌라이 카간, 즉, 보르지긴 가문의 핏줄을.
“네가 몽골 황족이라는 걸 완전히 비밀로 할 수는 없어. 어쨌든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거나 앞으로 알게 될 테고, 그럼 우리로서는 그게 가능한 부각 되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야.”
부각 되지 않도록 하려면 다른 면을 강조해야 한다.
‘고려 민족’의 의지로 추대된 황제.
사실이야 어쨌든 그렇게 내세워야 한다. 그렇기에 총선거와 제국최고회의 구성, 그리고 제국최고회의가 국민의 이름으로 황제를 추대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밟는 것이다.
“말이 옛 황위를 계승하는 거지. 사실상 새로운 나라의 태조나 다름없다고.”
이 정도 설명하면 루우도 못 알아듣지는 않는다. 루우 역시 입씨름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타협책을 제시했다.
“좋아. 일단은 타이시나 제국최고회의의 그 방침을 따르도록 할게. 하지만 ‘개인적으로’ 여지는 남겨줬으면 좋겠어.”
“여지? 어떤 식으로 남겨줬으면 좋겠다는 거지?”
“공식 기록 영상으로 남고, 라디오로 방송될 즉위식은 고려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할 거지? 면포에 면류관 쓰고.”
“그렇겠지?”
“그것과는 별개로, 가까운 친척을 모아두고 하는 ‘대관식’을, 황궁 안에서 비공개로 했으면 해.”
“대관식……?”
그게 무엇인지 알고는 있다. 신성 제국 황제를 비롯한 유럽의 군주들이 즉위할 때, 로마 교종이 그, 혹은 그녀의 머리 위에 관을 씌워주는 의식.
그렇게 해야 군주는 정식으로 신의 인정을 받았다 여겨지게 된다.
“그래. 나도 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한 보르지긴 가문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공식적으로는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신자야.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카라코룸 총대주교를 초청해서 대관식을 치르고 싶어. 아바마마나 숙부들도 초청해서 그분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