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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4화 (54/541)

용과 늑대와 사슴(7)

루우가 가져야 하는데 갖지 못한 것.

세규는 그게 무엇일지 생각하다 눈썹을 찡그렸다.

“너 설마……”

루우는 공식적으로는 고려식 이름인 ‘왕서라’를 쓴다. 하지만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

그렇다. 그녀는 자신을 ‘보르지긴’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보르지긴 가문 사람이기에, 그 가문에서 취할 수 있는 최고 권위에 대한 열망을 가슴에 품었다.

“카간께선 네가 몽골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고려로 가는 걸 허락하시지 않았나?”

“‘고려에서 황제가 된 다음 그 기반을 바탕으로 저도 황위 계승권을 요구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아바마마가 나를 보내주셨을까?”

처음부터 약속 따윈 어길 생각이었나.

하긴 그럴 생각을 품고 있기에 아주 어릴 때부터 카간에게 주의를 들어왔겠지.

여자는 카간 자리에 오를 야심을 보여서는 안 된다. 너는 카간 계승 순위 3위다. 우선순위는 숙부들에게 있다.

“나의 아버지, 몽골의 카간. 그런 말들이 오히려 어린 나의 야망을 자극할 줄은 모르셨겠지.”

이제 루우 역시, 숙부들, 키타이의 울제이 칸과 낭키아스의 게레센제 칸처럼 자신만의 영지를 보유하기 일보 직전이다.

“그렇다면 해볼 만하지 않겠어?”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드는 것도 당연하다.

“고려의 내전이 끝나면 다이온(大元)의 계승 전쟁인가.”

다이온. 대원(大元)의 몽골식 발음.

지금 몽골 제국은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쿠빌라이 카간 이래 단 한 순간도, 고려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하던 원나라의 이름을 버린 적이 없다.

“계승전쟁까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지. 그러려면 내가 고려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도록 일정한 권력이 필요하고.”

세규는 루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루우 역시 전혀 위축되지 않고, 즐기기라도 하듯 그 시선을 맞받았다.

지금 당장 입으로 꺼낼 수는 없지만, 세규는 루우의 야망을 저지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고려, 일국의 황제로 남아야 한다. 하지만 막을 수 있을까?

루우와 리안이라는 일종의 이중전선…….

살무사를 주살했더니, 이번에는 용이 이를 드러낸다.

***

지나는 견하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설명하긴 어렵지만,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마음가짐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견하가 보여주는 태도 자체는 지나가 처음 견하를 알았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생각을 깊이 하고, 늘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러면서도 어떤 열정 같은 게 있다.

하지만, 신환도역 전투를 겪고 난 견하는 어딘가 좀 달랐다.

“선배?”

“왜?”

“그때 전투 이후로 좀 쉬시긴 한 거죠?”

“……내가 그렇게 피곤해 보이나?”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그 왜…… 음, 군인들이 전쟁터 갔다 오면 겪는다는 정신적 문제들 있잖아요. 우울증이나 무기력 같은 거. 그런 느낌이기도 하고.”

견하는 지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지나는 뭔가 꾸중을 들을까 목을 움츠렸지만, 견하는 그저 생각에 잠긴 것뿐이었다.

“지난 전투 이후 좀 이상하긴 해. 몸 자체는 건강하다고 느끼지만, 정신 어딘가가 좀 무뎌졌다고 해야 하나…….”

전투에서 사람을 죽여도 첫 살인을 저질렀을 때처럼 손이 떨리지 않았다.

전투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별로 좋은 현상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분명히 안다.

지금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것도,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지겹다는 느낌 정도는 들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해야 할 일이고, 처리한다, 그뿐.

“음…… 병원을 좀 가보든가 해야겠어. 약도 먹고 오늘은 좀 쉬어야지.”

눈꺼풀 위를 양손 끝으로 비비는 견하를 보며, 지나는 자신이 받았던 느낌이 그저 기분 탓이었겠거니 하고 넘겨버렸다.

견하 선배는 차가운 기계가 되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렇게 안도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며칠 뒤에는 그…… 총선거도 있잖아요. 그 전에 좀 피로를 풀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견하는 다시 눈을 떴다. 그 전에, 하고 입을 열며, 견하는 방금 떠올린 ‘일’에 대해 물었다.

“내가 꼭 확보하라고 했던 사람들, 지금 강당에 좀 모아줘.”

***

수영은 갇혀 있던 방의 문이 열리자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시렸기 때문이다.

“나와.”

짧은 말에 그녀는 복도로 걸어 나왔다. 또래의 소년과 소녀가 수영의 양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고 잡아끌었다.

어디를 가는 걸까.

이 소년감찰국이라는 집단에 멋대로 형을 집행할 권리는 분명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건 불법이라고 외쳐보았자 먹힐 턱이 없다.

미리안의 정부에 적대하는 조직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법의 보호를 바랄 만큼 뻔뻔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끌고 가는 이들에게 한 방 먹여줄 만한 기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수영의 눈동자는 텅 비었다.

존경하는 문하시중, 신념의 상징인 허동주가 죽었다.

문하시중을 죽인 자들에 대한 증오 이전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신념의 탑이 먼저 무너졌다.

물론 허동주도 인간이니 언젠가는 죽겠지. 하지만 그의 사상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고, 시체가 욕보이는 방식은 상상하지 못했다.

무너지지 말아야 할 것이 그토록 쉽게 무너지는 것이라면, 대체 무엇에 기대어 저들에게 저항할 수 있을까?

한재연은 어떻게 됐을까? 도망쳤을까? 아니면 저들과 싸우다 죽었을까? 어딘가에 체포되어 있을까?

아니면 지금 이렇게 어디론가 끌려가는 나보다 먼저……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당했을까.

갑자기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죽는 걸까? 죽는 거라면 죽기 전에 한 번 그 소년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한재연이 갑자기 이 시설에 쳐들어와서 자신을 구출해주는 상상을 잠깐 한다.

그렇게 잠깐 소녀다운 상상을 하고 나서, 다시 현실로 눈을 돌렸다. 복도의 무채색이 현실감에 힘을 실어줬다.

역시,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구나.

얼마나 걸었을까. 계단을 오르고 또 다른 복도를 지나,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강당 같은 공간이 나왔다.

사람들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수영의 자리는 강당 앞쪽인지, 양옆의 소년과 소녀는 계속 그녀를 앞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걸어가면서 둘러보니 서 있는 사람들은 대개 아는 사람이었다.

천손민족협회 소속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

다시 앞을 봤다. 연단 앞, 양손이 묶인 채 서 있는 사람들을 마주 보고, 일렬횡대로 늘어선 이들은 소년감찰국 소속 조직원들일 터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단 위에 선 한 소년.

주견하였다.

수영을 끌고 온 두 사람은, 주견하와 거의 마주 보는 위치에, 그녀를 세워놓고 옆으로 빠졌다.

수영은 눈을 크게 뜨고 주견하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주견하는 그녀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소년감찰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가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아직은 아무도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너희들은 앞에 있는 너희 ‘선배’들의 지도를 받아, 앞으로 소년감찰국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된다.”

침묵에도 성격이 있다. 받아들임을 표시하는 침묵과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을 잃어버린 침묵.

그 둘은 아주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낸다.

누군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기 직전에, 주견하는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그가 설명을 시작했으니 사람들은 다시 입을 다물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밖에 없다.

“너희들이 전향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니고, 이제부터 소년감찰국에서 일한다니 무슨 헛소리인가 싶겠지. 일리 있는 말이다. 이런 일은 먼저 사상 검증부터 하고 들어가야 하니까.”

주견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방법을 써볼까 한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말하자면 징집이지. 강제로.”

한 청년이 소리를 질렀다.

“그런다고 너희를 위해 일해줄 줄 아는가!”

수영은 그 사람이 두들겨 맞고 강당에서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년감찰국의 소년과 소녀들도, 그 우두머리인 주견하도 무표정한 얼굴로 소리를 지른 사람을 바라만 봤다.

“그것도 상관없다.”

“뭣……?”

“‘밖’에 있는 너희의 동료들에게 중요한 건, 소년감찰국에서 너희들이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야. 나를 실컷 방해하고, 내 명령에 불복종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어.

나는 서류에,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너희를 내 부하 명단에 올릴 거다. 그리고 너희의 동료들은 그걸 좀 더 중요시하겠지.”

수영의 손끝이 떨렸다. 주견하는, 저 소년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리고 나는 너희 중에 전향한 이가 없다는 말을 하진 않았어. 정말 없을까? 글쎄. 어쩌면 지금 아주 멋진 기개를 보여준 저 남자가 사실은 이미 나의 충실한 개가 됐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돌아보지 않아도 수영은 그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리라는 걸 알았다.

“내 명령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도 좋고, 탈출을 시도해도 좋고, 동료들과 접촉해도 좋다. 마음껏 해. 하지만 너희들 중에 너희를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어쩌면 이 기회를 틈타 아예 허동주의 잔당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암약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

음, 자결하면 좀 아쉬울지도 모르겠군. 확실히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뭐, 우리도 손을 더럽히지 않으니 상관없나.

어쨌든 무슨 일을 하든, 이제 너희는 ‘소년감찰국’의 구성원이 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아. 열심히 일해서 내 신뢰를 얻고 감시를 느슨하게 만들려 시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주견하는 다시 웃었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일단은 살아남았다는 안도보다 먼저, 섬뜩한 오한이 수영의 어깨를 덮쳤다.

“그 와중에 새로운 일이 적성에 맞아서 충성의 대상을 변경해주면 고맙겠어. 자 어쨌든, 다시 한번 말하는 거지만, 소년감찰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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