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과 늑대와 사슴(6)
“북부 전선에서는 반란군이 조금씩 서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남부 전선의 주요 거점이면서, 반란군 전체의 사령부가 되는 평양이 함락된다면, 더는 북쪽에 이렇게 광대한 전선을 유지할 순 없으니까요.”
“반란군 입장에서는 그 전에 전선을 좁히고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도 무리한 추격이나 교전은 피하면서, 반란군이 빠져나간 자리를 점령해나갑시다.”
서부 전선은 조유관 대장이, 남부 전선은 김천열 중장이 맡고 있다. 그들은 혁명군 사령부의 방침을 충실히 수행하는 중이다.
그러나 소규모 접전까지 막을 순 없었다.
물론 그 대상이 된 부대들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했거나 버림받은 부대에 지나지 않아서 금세 항복하거나, 전멸했지만.
“서부 전선과 북부 전선 사이의 반란군을 끊고, 먼저 북부의 반란군 포위섬멸, 그러고 나서 서부의 반란군을 바다로 몰아넣어 수장시키는 걸 기본 방침으로 해야 합니다.”
이 방침은 모두가 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강한 적의 저항에 부딪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쉽긴 하지만 적이 알아서 물러서고 있는 마당에 굳이 몰아붙여서 큰 피해를 볼 건 없겠죠.”
그래서 혁명군은 일단 적이 물러나는 대로 따라가 그 빈자리를 점거하며 전진했다.
북부에서 적이 다 빠져나가자, 꽤 오래된 문제가 다시 부각됐다.
서북부 지역 일부를 점령한 몽골군의 문제였다.
“국경침범으로 보고 몰아내야 하는가, 아니면 뭔가 협상을 해서 양보를 얻어내야 하나?”
류성일도 안세규도,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잠겼다.
“애매하군요. 루우…… 왕서라 공은 저쪽 카간 폐하의 따님이신데 굳이 일을 이렇게 처리해서 따님을 곤란하게 할 이유가 없는데…….”
안세규의 말에 류성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불법 점령 상태가 계속되면, 언론을 검열해도 반몽골 감정이 국민 사이에 번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왕서라 공의 황제 즉위에도 차질이 생깁니다.”
신수덕을 비롯한 허동주 잔당들이 저렇게 날뛸 수 있는 건, 아직 루우가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우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칙령이라는 이름으로 신수덕 주살의 명령이든 뭐든 내려서 그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하지만 몽골의 서북 지역 점령이 길어지고, 반몽골 감정이 퍼져나가면 루우의 즉위에 차질이 생긴다. 즉위한다 해도 국민의 지지를 상당히 잃은 상태로 오를 것이고, 신수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루우의 혈통을 문제 삼아 그녀를 헐뜯는 선동을 시작할 것이다.
적어도 허동주 잔당이 점령 중인 곳에서는 황제 루우 테무르의 권위가 서지 않겠지.
“그런 사정을 최대한 빨리 몽골 측에 알리고 철수를 요청해보겠습니다.”
안세규가 그렇게 말했지만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테이블 어느 한 지점을 노려보고 있었다.
“혹시 루우를 빨리 즉위시키라고 압력을 넣는 걸까요?”
류성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몽골군 철수에 대한 협의도 그 방향에서 접근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만, 이게 몽골 쪽에서 자기네가 언제든 고려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례를 남겼다고 착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리안은 계속 테이블 한구석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만약 정 반대라면?”
“예……?”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몽골 측에서 왕서라 공의 즉위를 바라지 않는다면요?”
이 질문을 던지고 리안은 눈을 들어 각료들을 봤다.
한 명 한 명 시선을 줬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꺼번에 놓고 표정을 보니 혼자 이질적인 사람이 있다.
안세규.
다른 각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이 안세규 혼자 리안에게 날카로운 안광을 날리고, 침묵한 다음, 한발 늦게 주위에 맞춘 표정을 짓는다.
안세규는 몽골의 사정에 밝다. 분명히 이 일의 깊은 내막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리안은 견하가 내놓은 ‘루우의 고려 혈통 강조’ 방안을 여기서 쓰기로 했다.
“일단 왕서라 공과 좀 이야기를 해봐야겠네요. 서북부를 점거 중인 몽골군에 대해서는 교전도 불사하겠다면서 대규모 병력을, 바싹 전진시킵니다.
그러면 적어도 왕서라 공이 몽골보다는 고려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인상은 줄 수 있겠죠.”
***
북부의 반란군이 서부의 반란군과 합류했다.
비로소 서부군의 철수도 시작됐다.
“지금까지의 철수 경로를 통해 추측한 바로는, 일단 모두 용성에 집결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용성에 집결한 후, 대릉하를 방어선으로 삼으면서 발해만의 항구까지 모두 남하. 거기서 해로를 통해 산동으로 모조리 퇴각할 생각이겠죠.”
“그러고 나면 산동에서 독립국을 건설하겠다고 농성하든지, 아니면 병력을 삼한반도로 다시 실어 보내서 남부전선을 강화하든지 하겠지.”
“하지만 몽골이 여기서 어떤 이유로든 수작을 부릴 가능성을 무시해선 안됩니다. 칸발리크를 통과하는 육로를 열어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혁명군 사령부에서 나온 논의였다.
“몽골, 안세규, 루우…….”
집무실에 홀로 앉아, 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셋 모두 어떤 꿍꿍이인지 알기 전까지는 어떠한 가능성도 내려놓을 수 없겠네.”
만약 몽골이 고려의 내전을 가능한 한 오래 끌면서 신수덕과 리안 사이의 세력 균형을 맞추고자 시도한다면, 서북부 국경에서의 전면적인 충돌도 불사해야 한다.
그때 리안은 루우에게서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의 정체성을 완전히 없애고, 오로지 ‘왕서라’로서, 고려의 황제로서 살도록 강요해야 할 테고.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자.”
안세규는 만나서 이야기한다고 절대 그 속을 다 알아낼 수 없겠지만, 루우라면 비교적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 목적도 알 수 있겠지.
목적을 알아내면, 일치점도 찾아낼 수 있다.
“잘하면, 안세규의 꿍꿍이까지 캐낼 수 있을지도 몰라.”
***
아직은 ‘황위 계승권자’ 신분일 뿐 정식으로 황제가 된 것은 아니기에 ‘공(公)’이라 불리지만,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는 벌써 ‘폐하’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지 않더라도 아주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모두 반쯤은 아첨이 섞인 행동이었지만, 황궁 안을 돌아다닐 때 제약이 줄어든다는 유용함 때문에 루우는 별말 없이 그런 대우를 받아들였다.
루우는 커다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그녀를 부른 사람, 외무장관 안세규가 있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안세규의 집무실은 주견하의 집무실과 그 느낌이 무척 비슷하다.
책상 위에는 각종 서류와 책들이 쌓여 있고, 그것들이 만든 장벽 안에서 책상 주인이 분투 중이다.
주어진 일을 처리하면서도, 관련된 지식을 늘리기 위해 독서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일과 공부가 구분되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
안세규와 주견하가 다른 점이 있다면, 안세규는 좀 더 정리된 느낌이고, 주견하는 그렇게까지 정리되지는 않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야 안세규는 공부의 기반이 튼튼하고 요령도 붙어 지식을 흡수할 체계가 잡혀있지만, 주견하의 기반은 기껏해야 고등학교 2학년 수준이니까. 닥치는 대로 읽고는 있어도 체계가 잡히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
루우가 들어와 걸어오자 안세규는 읽고 있던 서류를 치우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성대하게 일을 벌이셨더군.”
루우의 독단으로 리안과 거래를 해 허동주를 처리한 일을 말하는 거겠지.
루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이 내전은 그쪽이 시작한 일이지. 나는 마무리를 지은 것뿐이고.”
세규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변명을 해봐야 소용없었다.
리안을 공격한 건 어떤 파벌이든,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소행이었으니까.
그리고 안세규는 그 상황을 잘 이용해 지금 외무장관의 자리에 앉았다.
세규가 입을 열어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루우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렇게 얻어낸 자리에 만족은 하는지?”
외무장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달라진 것은 없어. 완전한 공화국이 아니라 입헌제국으로 한발 물러서고, 군사 귀족 정권을 몰아낸 게 아니라 그들과 타협해서 그들 정권의 내부에 들어왔을 뿐이다.
이제 시작이야. 내가 2대, 혹은 3대 제국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완전한 민주주의 정권을 만들어내기 전까지 만족이라는 건 없어.”
울림이 깊은 그 목소리를 감상하듯 듣던 루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나태해졌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니라니 다행이네.”
세규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리 사이의 ‘거래’를 잊지 마. 민국 정부는 네가 이용만 하고 버릴 만큼 허수아비가 아니다.”
“어차피 거래라는 게 합의하에 서로를 이용하자고 맺는 거지. 주석도 내가 없었으면 이 위치까지 오긴 어려웠을걸.”
“그렇다고 해서 네가 전제군주정으로 복고하도록 손 놓고 있진 않을 거다.”
“걱정하지 마. 입헌군주정이라는 ‘형식’을 파괴하진 않을 테니. 나는 그저, 입헌군주제라는 무대 위에서 내가 자유를 누릴 공간을 조금 확보하고 싶을 뿐이야.”
“그래서 태사와 협력한 건가.”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겠다는 신하를 적극 지원하는 게 임금 된 자의 도리 아닌가?”
“어물쩍 말 돌리지 마. 나와 미리안을 충성경쟁이라도 하게 만들겠다는 거잖아. 그리고 그 경쟁 사이에서 너는 권력을 강화하고.”
미리안은 백부의 황족 살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황제에게 어느 정도 충성을 보이며 양보할 것이다.
세규도 마찬가지로 임시정부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루우에게 충성이라는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다.
미리안과 세규가 계속 협력하며 서로 평화적으로 정권을 주고받는다면 몰라도, 두 사람의 이상과 성격은 그런 결과를 추구하지 않는다.
신수덕이 이끄는 허동주 잔당이 완전히 토벌된다면 곧바로 정쟁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미리안은 이제 스무 살. 아마 노년이 될 때까지 계속 장기집권을 하고 싶겠지.
반면 세규 역시 민주주의 달성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이상이 있다.
지금도 묘한 신경전을 하는데, 공동의 적마저 사라지면 반드시 서로를 없애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려 들 것이다.
루우는 충성하는 쪽, 혹은 약한 쪽에 힘을 실어주겠지. 그러다 너무 강해지면 반대쪽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균형을 맞추고, 그렇게 조정자로서 권력과 권위를 강화한다.
“부정하진 않을게.”
루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할 이야기가 길다는 뜻이다. 세규도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쪽으로 갔다.
“전제군주가 되려는 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황권을 강화하고 싶어 하지?”
“우리가 거래를 시작할 때 이야기했던 ‘목적’은 더 말할 필요는 없겠고. 또 다른 야망이 생겼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또 다른 야망……?”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이제 고려의 황제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더 많은 걸 갖고 싶더라고. 내가 가져야 하는 데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심도 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