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과 늑대와 사슴(4)
먼동이 터 오면 새벽하늘은 붉은색에서 보라색으로, 그리고 파란색으로 이어지는 신비로운 빛깔을 뽐낸다. 구름도 그 빛에 물들어 부드러운 자국을 하늘에 남긴다.
루우의 ‘용’은 그런 하늘을 배경으로 흩어졌다.
별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듯한 그 신비롭고 장엄한 광경에, 기자들은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다 누군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카메라를 들고 그 장면을 찍기 시작했다. 다른 기자들도 서둘러 그를 따라 사진을 찍었다.
기자들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와 사뿐히 내려앉는 루우의 모습과, 그런 그녀의 손을 잡은 리안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끊어진 다리 건너편에서 보트를 타고 아군 부대가 하나둘 넘어오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보트에 몸을 싣고 안전한 지역으로 돌아가면서도, 동시에 신문사에 보낼 기사를 서둘러 써 내려갔다.
대동소이하면서도 각자의 추측을 실은 기사가 신문사에 도착하면, 신문으로 먹고사는 모두가 정신없이 찍어서 돌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오후쯤에는 동명에서 호외로 볼 수 있을 거고, 내일이면 전국 주요 도시에는 소식이 전해진다.
리안은 후속 검열 조치는 최소화하기로 했다. 이 승리의 소식과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의 등장이 최대한 빨리 전 국민에게 전해지는 게 중요했으니까. 이미 엄선된 언론과 기자를 동원했던 만큼, 괜한 추가 검열로 시간을 잡아먹을 수는 없다.
그보다 그녀는 살아남은 이단 병력을 위로하고, 강을 건너온 아군을 정리해 여기에 도하 지점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밤의 전투만 놓고 보면 리안과 허동주의 정면 대결이자, 루우의 화려한 등장이었지만, 전체 전선을 놓고 보면 반란군을 격파하고 압록강 도하에 성공한 것이다.
리안은 이 승리에 취하기보다는 전체 전쟁의 승리에 이용하고자 했다.
“그 전에…… 견하를 찾아야 해.”
담담하게 장군들과 접견하고 다음 작전을 논의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점점 더 커져가는 초조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전투 막바지에 그 기계 거인을 타고 뛰쳐나가는 것은 봤다. 혼자 그렇게 뛰쳐나갔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어쩌지? 혹시라도 다쳤다면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한다.
그런 그녀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루우가 먼저 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같이 찾아볼게.”
***
“주견하 국장이 보입니다, 각하.”
고작해야 고등학생에게 꼬박꼬박 ‘국장’이라고 정식 호칭을 붙여 불러주는 이 군인을 뭐라 평가해야 할까.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칠 결정을 머릿속으로 굴려보면서, 리안은 장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6월 6일, 원래는 평화회담이 열리기로 되어 있던 날 아침. 아직도 매캐한 냄새가 가시지 않은 아침 공기 속으로 소년이 보인다.
소년은 지쳤는지 큰 돌덩이 위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소년 앞에는 키 큰 남성의 처참한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신의 상태로 보아 운반하는 동안 망가질까 봐 일단 아군이 와서 수습하도록 내버려 둔 것 같았다.
“……?”
리안을 따라가던 효윤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히 견하가 기갑사를 탈취해서 허동주를 추격하는 걸 봤는데, 지금 그의 근처 어디에도 그 기갑사가 보이지 않는다. 파괴된 걸까?
아니면…… 그의 하얀 괴물이 먹어치워 버린 걸까?
엉뚱한 상상이야, 하고 효윤은 고개를 털어버렸다.
그보다 무사히 소년을 찾았다는 기쁨과 반가움이 앞섰다. 힘겨운 싸움의 밤을 지나, 그녀와 소년은 살아남았다.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지만 조금 아쉽군. 그 기계를 손에 넣어서 우리도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리안도 견하가 기갑사 하나를 탈취한 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단으로서 놀라운 능력을 지닌 황제 후보를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기갑사까지 손에 넣는다면, 내전의 승리는 더욱 확고해진다.
그뿐이겠는가? 고려 제3제국은 주변국에 더욱 높은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된다.
황제 후보 루우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단의 능력과 하얀 괴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녀라면 아마 효윤이 생각한 것 정도는 당연히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 이상도 생각할 테고.
효윤은 딱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소년이 이쪽을 발견한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린다.
그리고 손을 들고, 웃었다. 안도감이 잔뜩 든, 지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자 효윤은 다른 걸 생각하지 못했다. 함께 이 모든 일을 해냈다는 벅찬 느낌과 설명하기 어려운 또 다른 기분이 그녀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녀는 달려가, 부딪치듯 견하를 끌어안았다. 소년에게선 땀 냄새와 살 냄새가 섞여서 났다. 상관없었다. 그냥 반가웠다. 효윤은 소년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그의 등까지 끌어안았다.
견하는 조금 당황했지만, 손바닥으로 가볍게 효윤의 등을 두드리며 리안과 효윤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리안도 효윤의 어리광에 쓴웃음 섞인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루우는……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갸우뚱, 기울였다.
잠시지만, 이렇게 해냈다는 기쁨을 즐겨도 좋겠지.
***
아침 8시, 임시 제국최고회의의 중앙집행위원회를 비롯한 수뇌진은 거의 반쯤 잠든 채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배영훈 소령이 가져온 소식에 몸을 일으켰다.
“태사 각하로부터의 입전입니다. 황위 계승권자 왕서라 공(公)의 큰 활약에 힘입어 반역자 허동주 주살에 성공!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간밤의 접전을 통해 반역자 허동주 주살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눈 밑에 검은 그늘이 지고 주름살이 몇 배로 늘어난 늙은 관료 하나는 자기 뺨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되묻는다.
“지금…… 뭐라 한 겐가? 허동주가 죽어? 허동주가 죽었다고 한 겐가?”
배영훈 소령은 흔들림 없는 자세로 의문을 확인해주었다.
“그렇습니다.”
“아니 대체…… 간밤에 어디에 계셨기에…… 비밀 작전이라는 게 그걸 말한 건가?”
“태사께서 자세한 이야기는 동명에 귀환하면 직접 하겠다 하셨습니다.”
다른 관료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보다도…… 황위계승권자 왕서…… 그…… ‘분’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리도 모르게 황위계승권자를 찾아냈단 말인가?”
안세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루우를 지칭하면서 재빨리 ‘분’을 갖다 붙이는 저 관료의 민첩함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빨리 루우의 정체를 눈치채고 활용하기 시작한 리안의 명석함에도.
그나저나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소령이 말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테고, 곤란해진 소령이 안세규 쪽으로 고개를 향하면, 안세규는 다 알면서도 계속 입을 다문 게 된다.
그러니 이쯤에서 안세규도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젊은 외무성 장관의 목소리가 다른 모두의 목소리를 덮어 누르며 실내를 울린다. 수뇌들은 모두 안세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장관, 알고 계셨다는 말이오?”
“태사께서 이런 비밀 작전을 벌이신 건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어제 알았습니다. 제가 미리 알고 있었던 건 황위계승권자의 존재입니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황위계승권자를 찾지 못해 초조해하는 걸 알면서도 감추고 있었다는 말이오?”
“예. 섣불리 공개하면 황위계승권자의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뭐…… 그런 건 이제 지나간 일이니 좋소. 대체 그분이 누구요?”
안세규는 자세를 가다듬고 안경을 고쳐 썼다. 아주 잠시였다.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모두의 긴장은 최고조로 끓어올랐다.
“제 경호를 맡은 것으로 위장했던 이단 소녀, ‘루우’가 바로 왕서라 공입니다.”
술렁임조차 퍼지지 않았다. 다들 신중하게 눈짓만을 주고받았다.
그 계집이 정말 황위계승권자인지, 입증할 수 있는지, 얼마나 순위가 높은 계승권자인지 묻고 싶겠지.
하지만 감히 그런 걸 물어봐서 나중에 곤란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을 것이다.
법무성 장관 류성일이 신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태사께서도 이렇게 언급하셨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안세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정 의심이 드신다면 몽골 제국 정부에서 의심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겁니다. 왕서라 공의 몽골 이름은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 현 카간 폐하의 따님이시죠.
다들 아시다시피 몽골의 황실은 고려 황실과 오랜 통혼으로 상당히 높은 계승권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려 황실 못지않게 고귀한 가문이니, 왕서라 공의 황위계승권자로서의 권위는 다른 누구보다도 높다 하겠습니다.”
안세규는 수뇌들의 표정을 죽 훑어보았다. 하고 싶은 질문이 가득 찬 얼굴들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낼 수 있는 말은 없겠지.
아마 고려 황제로 몽골 혈통을 앉혀도 좋은지, 몽골 카간이 딸을 매개로 내정간섭을 해 올 가능성은 없는지 등등의 우려를 이야기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논의할 자리가 아니다. 몽골 대사를 비롯한 외국 대사들도 여전히 이 자리에 있다.
여기서는 그저 순수하게 기뻐하는 척하고, 승리를 즐겨야 한다.
의문은 좀 더, 개인적인 자리에서 조심스레 풀어놓아야 할 거다.
“그럼, 태사 각하를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개선(凱旋)도 개선이지만…… 아마 곧바로 반격에 나서라는 명령을 내리실 것 같군요.”
분주하게 일어서는 사람들을 보며 안세규는 생각에 잠겼다.
일단 루우의 일은, 마치 외무성 장관인 자신과 태사가 함께 합의한 일인 양 이야기해뒀다.
하지만 태사의 행보는 세규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혹시 루우는 구 민국 정부와 멀어지려는 걸까?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 루우와 태사 양쪽 모두에게 외면당해선 안 된다.
루우와 다시 접촉해서 그녀가 황제가 될 때 이쪽의 공이 적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새 정부에서의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태사와도 협의해서 양보를 끌어내야겠지.
하지만…… 너무 나서면 루우와 리안 사이의 연합만 공고해질 수 있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이 귀찮은 안세규를 제거하려 든다면?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 루우는 황제가 된다면 미리안을 견제하는 데 안세규를 써먹을 것이다.
태사와 협상하는 데 쓸 수 있는 패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태사 쪽으로 파고들 수 있는 틈을 찾아보자.
얼마 뒤에, 한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은 무력화된 ‘야별초’. 거기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미리안의 최측근이라는 소년.
‘소년감찰국’이라는 부서를 신설하고, 거기 국장으로 앉아 있는 주견하라는 소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와 접촉한다. 그리고 길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