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과 늑대와 사슴(3)
미리안을 황제로 옹립하지 않기로 한다면, 또 다른 구상을 세워야 했다.
동주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도 생각해보긴 했다.
그러나 동주는 황제가 된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볼 때마다, 어쩐지 무척 어색하다고 느꼈다.
하늘의 뜻이라든가, 신성함이 내포된 그런 자리는 자신과 맞지 않았다.
그럼 아예 이 어설픈 군주정을 폐지하는 건 어떨까.
“그래. 내전에서 이기면 나의 권력과 권위는 정점에 달한다.”
동주에게 내심 반대하는 자라 해도, 그때엔 동주가 유일무이한 절대권력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동명에 입성하는 날, 승리를 선언할 그 날, 군주정의 폐지와 제국의 재탄생도 천명하자.
칭호는 어떤 게 좋을까? 아즈텍 연방 통치자의 칭호를 번역한 ‘통령’이 좋을까? 조금 어감을 다르게 해서 ‘총통’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칭호든, 군주가 아니라 국민과 민족의 지도자라는 느낌을 주면 된다.
한숨이 나왔다. 자신의 세대는, 이 내전의 상처를 극복하고 국가를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바쁠 것이다. 민족의 영광을 실현하는 건 자신이 좀 더 늙어서거나, 다음 세대의 과업이 될 테지.
아쉽긴 했지만 후대를 위한 기반을 남긴다는 점이 뿌듯하기도 했다.
동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치, 그리고 국가의 미래에 대해 상상하는 일은 골치 아프다. 하지만 진심으로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 일을 즐길 수 있었기에 지금의 허동주가 있는 것이다.
그 미소를 비웃기라도 하듯,
쿵, 하고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앞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운전병이 핸들을 꺾자 차가 옆으로 넘어질 듯 기울어지며 방향을 틀었다.
동주는 잡을 수 있는 것은 뭐든 잡고 버텼다. 포격인가? 따라잡혔나?
차가 멈췄다.
길고, 굵고, 뾰족한 무언가가 차의 옆구리를 꿰뚫고 들어와 운전병과 그 옆에 앉은 장교의 목숨을 끊었다.
정체불명의 적은 이번엔 차의 엔진을 통째로 뜯어내 멀리 던져버렸다. 멀리서 폭발음이 들린다.
동주는 그 와중에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정체가 뭔지 모르지만 일단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
하지만 동주에겐 불행히도, 정체불명의 적은 폭발의 불빛 덕에 동주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적은 도약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쿵, 소리를 울리며 동주의 앞에 내려왔다.
“…….”
이제는 동주도 적의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동주가 아는 것이긴 했지만, 아직까진 보고서와 사진으로밖에 접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 눈앞에 있다.
“기갑사의 ‘불가살’ 단계…….”
강철 상자 같은 투박한 외양은 사라지고, 근육, 혹은 내장 같은, 살덩어리의 질감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붉은색 혹은 보라색으로, 어찌 보면 박동하는 듯해 역겨운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역겹기 이전에 동주는 분명한 사실 하나를 먼저 떠올렸다.
죽음이 눈앞에 있다.
***
카메라 불빛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리안은 생각에 잠겼다.
일단 허동주를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그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데려온 기자들이 열심히 루우의 찬란한 모습을 찍는다. 이제 그녀의 화려한 등장, 활약, 그리고 황제의 귀환이 대대적으로 선전될 것이다.
“질문, 해도 되겠습니까?”
기자 하나가 손을 들어 묻는다. 물론 엄선된 언론사, 거기서도 엄선된 기자가, 미리 짜여진 각본을 바탕으로 하는 질문이다.
껄끄러운 질문이 나올 리 없다.
“이번 출전은 왕서라 공의 의지였습니까?”
기자는 루우의 고려식 이름을 말한다. 루우는 고려의 황제가 되려는 만큼, 몽골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되도록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다.
아직 공중에 떠 있는 루우를 대신해, 리안이 대답한다.
미리 만들어 둔 각본대로.
“황족의 말예로서,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전장에 서는 것이야말로 황족의 의무라고.”
“왕서라 공께선 고려 황제의 자리에 오를 생각이십니까? 태사 각하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국민이 원한다면, 그리고 그 즉위가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추대를 받아들이겠다 하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문답 한편으로, 리안은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허동주를 못 잡을지도 몰라.
그래도 리안은 절망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수단을 생각했다.
루우를 새로운 황제로 세우고, 허동주 주살의 명령을 내릴 것이다.
실제 전력은 허동주에게 밀릴지 모르지만, 이런 조치를 통해 적의 내분을 기대해볼 수 있다.
그래도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허동주가 루우의 ‘몽골 혈통’을 문제 삼지 않을까 하는 것.
뭐 그거야 무마할 수 있는 흠집이다.
그러나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황제 루우가 허동주 주살에 황제의 권위를 실어준다 해도, 결국 죽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걸로 모든 일이 끝날까?
허동주가 죽는다면 허동주의 사상도 죽는가?
글쎄.
리안도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권력 투쟁, 이해득실을 벗어나 사람이 광적으로 매달리는 사상의 영역은 가늠하기 어렵다.
물론 허동주라는 인간의 목숨이 스러지는 것이 곧 그 사상의 패배라 생각하는 인간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물리적인 힘의 승패가 곧 정신의 승패를 의미한다.
가장 쉬운 유형의 인간들이다. 압도적인 물질 앞에서 쉽게 저항 의지가 분쇄되어 투항하겠지.
반대로 허동주가 죽는다 해도, 그 사상이 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인간들은 정신의 불멸을 믿는다.
그들은 허동주가 만든 이상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정말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그런 인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예측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 봐야 알 수 있겠지.
당장 떠올리기 어려운 문제는 잠시 접어두자. 그 외에도 생각해야 할 것은 많으니까.
막상 투항자가 생겨도 어떻게 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있고, 전쟁까지 벌인 군인들 사이의 적대감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남는다.
파괴된 건물, 전답, 기타 시설의 재건과 보상 문제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이다. 이런 문제를 소홀히 하면 곧바로 국민의 반감으로 이어진다.
전쟁 중에 일어난 범죄의 처리도 리안을 고민하게 했다.
반란군의 범죄야 그냥 처형해버리면 그뿐이지만, 리안 밑에서 목숨 바쳐 싸운 병사들이 저지른 범죄는?
덮어두면 향후 수십 년 이내에 반드시 문제가 터져 나온다. 리안이 중년이나 노년의 정치가라면 모르겠지만, 그녀는 스무 살이다.
리안이 아직 현역일 때 그녀를 괴롭힐 문제가 터질 수 있다는 말이다.
많은 불만을 사더라도 그들 역시 처형할 수밖에 없겠지.
내전이 끝나면 그녀는 황제의 재상이자, 정부 수반으로 돌아간다. 자리에 어울리는 일을 해야 한다.
쉬운 일이 없군.
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허동주를 죽이더라도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젯거리는 승패와 관계없이 국가가 유지되는 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한 끝없이 생겨난다.
그렇게 보면 일단락이란 없는 것이다.
권력을 쥔 자의 숙명이겠지. 권력을 쥔다는 것은, 결정을 기다리는 끝없는 문제들과 함께한다는 것이니까.
***
불가살 단계.
흉측한 외양의 ‘저것’은, 보고에 따르면, 기갑사와 탑승자 모두 폭주 상태에 이른 것이라 한다.
안 그래도 막강한데 더욱 막강한 능력을 선보이는 상태지만, 통제는 전혀 되지 않아 몇 차례 사고만 일으켰다.
그래서 동주는 보고서로만 접해봤다.
인간의 감정을 마모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갑사는, 어쨌든 그런 방식으로는 결국 위험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 감정이 끝까지 마모되어 정신이 붕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의외로 강력하다. 그런 위험에 처하면, 정신은 그냥 붕괴하지 않고 자신을 방어할 수단을 마련한다. 더는 감정이 마모되지 못하게 막는다.
하지만 ‘이’를 조작하는 문은 정신 한가운데에 여전히 열려있다. 이 문은 탑승자의 정신을 기반으로 탑승자의 육신과 기갑사를 연결한다.
기갑사를 계속 구동하려고 열려있는 상태와, 더 이상의 감정 마모를 막으려는 정신이 충돌을 일으켰을 때, 폭주가 발생한다.
육신과 기갑사는 연결되어 있으니, 이 폭주는 육신으로 향할 수도 있고 기갑사로 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은 자신이 머무르는 육신을 희생할 수 없기에 이 폭주의 방향을 일방적으로 기갑사에게 돌린다.
여기서 기갑사를 이루는 ‘이’가 왜곡되고 붕괴를 일으켰다가, 육체와 같은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불가살’ 단계의 살점과 점막 같은 저 외양은, 그런 재구성의 결과다.
“…….”
동주는 불가살 단계 기갑사에 탑승한 이단의 얼굴을 보았다.
모르는 얼굴이다.
동주는 이번 작전에 동원한 이단의 얼굴과 이름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기갑사는 귀중한 자산인 데다, 이 작전에 엉뚱한 사람이 끼어드는 걸 방지해야 했으니까.
꽤 곱상하게 생긴 소년인데, 안타깝군. 미리안 측 이단이 하나 탈취했다가 이 꼴이 된 모양이다.
오래지 않아 가동을 멈출 터. 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상태에 이른 이단은 앞으로 절대 멀쩡한 삶을 누릴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견하는 기갑사를 잘 작동시켰다.
동주를 보호하기 위해 몰려드는 병력이 보인다. 기갑사도 몇 있다. 견하는 그들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아무리 정성 들여 만든 기계라 해도 기계의 관절은 투박하다. 하지만 불가살 단계에 이른 견하의 기갑사는…… 훨씬 유연하게 관절을 움직였다.
견하는 동주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불가살’ 단계를 만들었다. 하얀 괴물을 직접 기갑사에 주입하는 방식은, 도산서원에서도 아직 실험해보지 못한 바였다.
점막 틈으로 하얀 괴물 같은 무언가가 흘러나왔다가, 딱딱해지며 칼날 형태를 만든다. 견하는 그걸 휘둘러 다른 기갑사들을 토막 냈다.
탄환은 아주 두꺼운 가죽에 부딪히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를 낸다. 피, 같은 무언가를 흘리긴 하는데 뚫진 못한다.
동주 측 병사들은 견하의 거대한 칼날에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뭉그러졌다. 기갑사나 되니까 그나마 ‘베이는’ 것이지, 인간의 육신이 받아낼 힘은 아니었다.
멍하니, 동주는 전멸하는 부대를 바라봤다. 끝까지 자신들의 지도자에 충성하며 목숨 바치기를 꺼리지 않았던 자들은, 문자 그대로 그 목숨을 다 바쳤다.
비명과 폭발음이 온 사방을 울리다, 허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동주의 눈은, 징그러운 붉은 살덩어리가 이리저리 날뛰는 것 정도만 분간할 수 있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주는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도망칠 수 있을까? 없다. 자포자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냉정하게, 살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공허한 눈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정해야 한다. 그게 그가 할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단 한 순간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적은 없었다.
고통스러운 죽음이 두려웠고, 시신이 끔찍하게 훼손되는 것이 두려웠고, 이름 없는 산야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죽음’이 눈앞에 선 순간, 생각했다.
이 죽음에 의연하게 맞서는 것이 그의 할 일이라고.
동주는 죽음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그는 삶을 가능한 열정적으로 불태우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죽음 앞에 의연하게 행동하는 것. 그것이 죽음에 대한 최대한의 투쟁이자, 삶의 불꽃을 가장 성대하게 태우는 순간임을 알게 된 것뿐이다.
코앞까지 다가온 소년을 향해 그는 한껏 가슴을 내밀었다.
“……봐라, 네가 원하는 나의 혼이 이렇게 뛰고 있다. 가져가라.”
견하는 망설이지 않고 그 가슴에 칼날을 찔러넣었다. 동주는 비명을 지르되 물러서지 않았다. 상반신의 형체가 뭉개졌지만, 그는 고개를 하늘로 세우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