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과 늑대와 사슴(2)
지름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은 빛의 기둥이, 역 천장을 부수고 하늘로 치솟았다.
그것만으로도 경이로운데, 부서지지 않은 천장 너머에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무슨 짐승의 울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효윤은 그것이 짐승의 울음소리 같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적과 아군을 막론하고 모두가 그 황금빛 기둥과 울음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효윤은, 기둥 안쪽에 어떤 그림자가 얼핏 비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과 동시에 역 천장의 다른 부분이 내려앉았다.
“……하얀……?”
그 괴물 같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달랐다.
천장을 뚫고 내려온 그것은 얼핏 보기엔 하얀 괴물 같았으나, 비늘인지 털인지 애매한 무언가가 표면을 뒤덮었고, 짐승의 발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도마뱀이나 독수리의 발 같았다.
최소 10미터는 돼 보인다는 걸 빼면.
빛의 기둥은 서서히 적들 쪽으로 나아갔다. 나아가면서 그 길을 따라 천장을 걷어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인지 그 거대한 발을 들어,
천장을 아예 뜯어냈다.
쏟아지는 건물 파편을 박도로 쳐내며 효윤은 그 경이로운 광경을 계속 바라봤다.
적들도 효윤을 상대하기보단 그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보고 놀라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천장 위로 적어도 두 층은 있을 텐데, 그걸 모조리 뜯어 던져버렸다. 들려오는 소음은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그 자체였다.
그리고 천장 너머, 하늘이 드러났다.
아니, 하늘만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이제 빛의 기둥과 거대하고 하얀 발의 정체까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머리 위로 나타났다.
빛의 기둥 안에는 어른거리는 그림자처럼 그 몸이 자리했고, 머리와 두 앞발 만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 얼굴은 역시 발처럼 하얬는데, 하얀 괴물과 달리 제대로 이목구비를 갖췄다. 입은 늑대처럼 길었고, 눈은 금빛 섬광과 벼락에 휩싸였다.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머리 위의 뿔. 사슴뿔과 유사했지만, 그보다는 가지가 훨씬 더 많이 갈라져 나왔다.
한마디로, 용(龍)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루우……?”
그렇게 중얼거리는 견하의 말을 듣고서야 효윤은 용의 턱 아래, 두 팔 사이, 공중에 떠 있는 루우의 모습을 보았다. 저 정체불명의 거대한 무언가처럼, 빛에 물들어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그녀의 눈이, 선명한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저게…… 루우가 만들어낸 거라고?
그렇다면 저 용 같은 것은, 견하의 하얀 괴물이 취했어야 할 원래 형태일까? 견하가 어딘가에서 하얀 괴물들을 불러내듯이 루우도 저런 걸 불러내는 걸까?
어쨌든 루우와 대면할 때 느꼈던 압박감의 정체를 이제 좀 알것 같았다.
효윤은 날렵한 외모의 소녀가 아니라, 그 내면의 용에게서 압박감을 느꼈던 것이다.
“우리 편이다!”
누군가 그렇게 외치며 아군에 전달함과 동시에, 적들도 루우가 자신들의 적임을 인식한 듯했다.
기갑사 몇이 도약해 루우 쪽으로 접근했다. 루우는 그 금빛 눈동자로 그들을 보더니 오른손만 그쪽으로 뻗었다.
루우 뒤의 용이 하늘을 향해 포효했고, 또 다른 빛의 기둥 몇 개가 기갑사들을 향해 내리꽂혔다.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벼락처럼 내려온 빛. 그 빛줄기에 기갑사들은 새카만 재가 돼버렸다.
아군의 힘이라 해도 공포스러울 정도로 강력했다.
루우는 이제 손을 앞으로 뻗었다.
빛의 기둥과 그 안의 용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용은 나아가면서 가볍게 적들을 밟아버렸다.
용의 발과 지면 사이에서 가벼운 반짝임과 함께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적들의 비명은 딱 밟히기 직전까지만 들렸다. 핏자국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할 만큼 허망한 죽음이었다.
이 갑작스럽고 기이한 반전에 효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리안은 다시 기운을 되찾은 무전을 들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생각대로다.
허동주는 역전의 명장이다.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리안보다 더 많은 수를 읽고, 그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해서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아마 리안이 결코 예상할 수 없는 부분까지 모조리 대비한 상태로 나설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했다.
‘상식’이란 선에서 리안의 모든 움직임을 예측하고 봉쇄했을 뿐만 아니라, ‘상식’을 넘어선 영역에서까지 리안을 압도하려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저 이단이 탑승한 기계, 기갑사다. 리안이 예측하지 못하게 하려고 대공세 때마저 기갑사를 동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허동주는 마지막까지 리안을 ‘생포’하려 했다. 거기에 유일하게, 리안이 노릴 수 있는 빈틈이 있었다.
“멍청하긴, 열차째로 터트려서 날 죽였어야지.”
하지만 허동주가 지금 와서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 리안은 이 빈틈을 노려서, 허동주가 자신의 패를 모두 꺼내 보이게 만들었다.
“애초에 ‘상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걸 내놓으면, 아무리 지혜를 쌓았어도 의미가 없지.”
허동주는 진다. 그가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리안을 ‘말살’한다는 결정을 자꾸만 뒤로 미뤘다.
그 덕분에 리안은, 루우라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병기를 찾아낼 시간을 벌었다.
게다가 리안은 허동주에게 다시 기회를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오직, 허동주의 ‘말살’만을 생각했다.
***
루우는 먼지를 쓸듯 가볍게, 기갑사를 멀리 튕겨버린다. 견하는 그런 루우의 공격을 보며, 허동주는 어디에 있을까 생각했다.
추격해야 하는데, 생각은 했지만 몸이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다른 하얀 괴물들을 처치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기력이 소모된 듯했다.
게다가 견하는 이렇게 긴 시간 이단으로서의 능력을 사용해 본 건 처음이었다.
재연의 동료를 죽일 때나 야별초를 공격할 때처럼 짧게 능력을 썼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 능력은 아무래도 장기전에는 부적합한 것 같다.
아니면 아직 전투원으로서의 역량이 부족하거나.
어쨌든 허동주를 잡아야 이 전투도 끝난다. 절대로 도망치게 해서는 안 된다.
허동주가 도망친다면 여기 있는 적을 전부 죽이고 무사 귀환한다 해도 리안의 패배였다. 그냥 루우의 멋진 모습만 공연한 셈이 된다.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
여기서 허동주를 죽이지 못하면 계속 평행선을 그리는 내전으로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뿐이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이 내전을 끝내려면 길은 오직, 허동주를 죽이고 저들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뿐.
아니, 오늘 본 기갑사의 존재를 생각해봤을 때, 이게 양산돼서 모든 전선에 투입된다면 이 내전은 리안이 진다.
루우의 강함은 진짜 놀랍지만, 그녀가 모든 전선에 동시에 나설 수는 없으니까.
간신히 움직이는 하얀 괴물들을 이용해서, 견하는 아까 쓰러뜨린 기갑사를 열어보려 했다.
이걸 열고, 안에 든 이단의 시체를 꺼낸 뒤, 직접 탑승한다. 그러면 좀 더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을 테고, 어쨌든 허동주를 잡을 수 있게 된다.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건 어떻게 여는 거지……”
이렇게 버벅대는 동안에도 허동주는 전속력으로 도망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초조한 기분으로 여기저기 눌러보던 중, 갑자기 찰칵,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늘어진 시체만 치우고, 견하는 몸을 움직여 그 자리에 올랐다. 좌석에 묻은 피를 닦아낼 여유는 없었다.
아까와 비슷한 요령으로, 기갑사가 자신의 온몸을 감싸도록 견하는 기계들을 닫았다. 갑옷을 걸친 느낌이었다.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견하는 이단의 힘을 그냥 기계에 주입해보기로 했다. 마침 몸 주변 여기저기 닿는 기관들이 그런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견하는 자신의 능력이 대체 무엇인지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기갑사라는 기계가 탑승자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몰랐다.
기갑사가 견하에게 탈취당한 것은 허동주에게도 불행이었지만, 견하에게도 썩 행복한 일은 아니었다.
***
동주는 처음 보는 ‘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당황했다.
누구라도 예상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게 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
그러나 당황했다는 사실이 파멸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런 곳에서 파멸하는 자들은 자신이 ‘당황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동주는 분명하게 자신이 당황했음을 인식했다.
그렇다면 자신을 당황케 할 정도로, 이 상황은 위급하다. 동주는 그렇게 사고를 진전시켰다.
이런 냉철한 사고방식이,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허동주가 살아남은 원동력이었다.
“……퇴각한다.”
패주는 분명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정신없이 도망치는 것과 적의 공격을 방어하며 물러서는 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계속 버티다가 섬멸당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고.
동주는 깔끔하게 퇴각을 명했다. 미리안을 붙잡는 데 더 미련을 두지 않았다.
호위를 받으며 역 밖으로 나와 차에 올랐다. 한 번 더 저 거대한 용을 본다.
도산서원에서 추진한 이단의 인위적 양성에 관한 연구에는 동주도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그는 용의 정체를 거의 정확하게 추리해냈다.
“도산서원이 조악하게 베낀 것과는 확실히 다르군.”
하지만, 하면서 동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용의 턱 근처를 부유하는 작은 형체에 눈길을 주었다.
소녀.
아마 용은 저 이단 소녀의 것일 터였다.
그 모습을 보며 동주는 리안과 견하 모두 우려하던 지점까지 사고를 움직였다.
일단 여기선 물러선다.
아마, 아니 분명 저런 규격 외 이단은 저 소녀 하나뿐일 것이다. 우리의 기갑사는 저 소녀 하나를 감당해내지 못하겠지만, 수가 많다.
‘하나’라는 것은 한 번에 한 장소밖에 나타날 수 없다는 뜻이다. ‘여럿’은 한 번에 여러 장소에 배치할 수 있다는 뜻이고.
즉 동주는 기갑사를 양산해서 여러 전선에서 압박해나갈 수 있지만, 저 소녀와 용은 한 번에 한 전장밖에 맡을 수 없다.
비록 희생은 크겠지만, 그래도 이 내전은, 동주의 승리로 끝나리라.
승리만 굳힌다면 저 용과 소녀는 아무리 강해도 그냥 야생 맹수와 다를 바 없어진다.
“다만…… 구상은 바꿔야겠지.”
미리안을 새로운 황제로 세우고 자신이 태사가 되어 고려 ‘민족’의 제국을 건설한다는 구상.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고집만 세울 수 없다.
동주는 비로소 미리안을 생포한다는 계획을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