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과 늑대와 사슴(1)
비명에 가까운 다급한 무전을 들으며, 리안은 루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네가 나갈 차례야, 루우.”
“글쎄. 내가 이제 나간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을 텐데. 나, 확실히 강하지만 그냥 한 명의 이단이야.”
리안은 똑바로 세운 루우의 언월도 끝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을걸.”
“뭘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타이시(太師).”
루우는 ‘태사’를 몽골어로 발음한다.
리안은 객실 문 장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식을 보는 게 아니라, 생각을 더듬고 있었다.
“견하 군이 너에게서 이단의 전투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때, 너는 고려와 몽골 황실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지.”
“용의 혈통이나, 푸른 늑대와 흰 암사슴?”
“그 ‘하얀 괴물’에 대해 가르쳐주면서 그런 비유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글쎄.”
“거기서부터 수상쩍다고 생각한 견하는, 가능한 모든 경우를 상정하고 자료를 긁어모았어. 기특하기까지 한 노력이었지.”
고려민국 임시정부가 황제 후보를 찾아냈다는 걸 ‘사실’이라 보고, 몽골 내에서 보호 중이라는 루우의 말을 재검토했다.
만약, 루우의 말이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은 거짓이라면?
몽골에서 찾긴 했지만, 몽골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고려에 들어와 있다면?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그대로 여기서 사실이 되었다면?
“우리는 별의별 자료를 다 찾아봤어. 심지어 마르코 폴로가 작성했다는 전설의 「쿠빌라이 문서」까지 말이야.”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던 루우가, 그 이름을 듣자 처음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쿠빌라이 카간은 고려 황실을 이상할 정도로 우대했지. 고려 황실이 강하게 저항했음에도 멸망시키지 않고, 고려 왕을 사위로 삼고 각종 특혜를 선물했어.
물론 쿠빌라이 카간이 몽골 황위 계승 전쟁에서 이기는 데 고려가 많은 도움을 주긴 했지. 하지만 쿠빌라이 카간의 그 행동은…… ‘용의 혈통’을 얻으려는 계산도 깔렸던 게 아닐까.”
루우는 까딱이는 리안의, 스타킹을 신은 발끝에 시선을 던졌다.
“어쨌든 황실 간 혼인이 반복되면서 몽골 황실에도 고려 제국 황위에 대한 ‘계승권’이 생겼어. 제3제국 성립 초에 카간이 황위를 넌지시 요구했다가 백부님의 반대에 부딪혀 물러선 일도 있지. 하지만, 카간이 그걸로 포기했을까?”
“포기했을 리가.”
“맞아. 자그마치 19년 동안, 백부님이든 허동주든 고려 내 황족을 죽여댔으니, 설령 남아 있다 해도 ‘계승 순위’는 몽골 황실에 밀릴 가능성이 커.
고려민국 임시정부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몽골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는 사람이면서, 고려의 황위 계승권자이기도 한 사람을 찾아낸 게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추측해봤어.”
“정말 열심히 조사했네.”
“……성은 밝히지 않았지만, ‘루우’는 몽골어로 ‘용’이라는 뜻이지. 기묘한 이름이지만 의도는 확실한 이름이야.”
루우는 하,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웠다.
이제야 알아차린 건가. 아니면 ‘여기서’ 알아차린 것으로 하려고 이렇게 데리고 온 건가.
리안은 루우와 눈을 마주했다.
리안의 눈동자는 승리와 권력을 향한 의지로 빛났다. 루우의 눈동자는 그녀만 쓸 수 있는, 혈통에서 오는 이능의 황금빛으로 빛났다.
“이제 연극은 그만하고 우리의 황제가 되어 줘.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 고려식 이름은 ‘왕서라’인 공주님.”
***
리안 측 이단들은 허동주가 투입한 ‘기갑사’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이단을 태운 기계라는 애매한 인식 속에서 수세에 몰렸다.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 즉 기갑사를 타지 않은 반란군 이단들이 포진한 자리를 공격해서 성과를 내더라도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였다.
인위적으로 양산된 이단이었을까. 그때 류성일의 총장실에서처럼, 시체들이 ‘하얀 괴물’을 뿜어냈기 때문이다.
“물러서! 물러서라고!”
효윤이 소리높여 경고했지만 시체에서 나온 그 괴이한 물체에 이단들은 얼어버렸다. 견하와 효윤이 사전에 충분히 그 위험성과 특징을 가르쳐주었지만, 이야기로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건 다르다.
물론 그들이 얼어붙은 건 아주 잠깐의 일이지만, 전투에서 ‘아주 잠깐’은 생사를 가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어, 엇……?”
유언을 남길 틈도, 심지어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하얀 괴물에 꿰뚫린다. 몸이 붕괴해 진흙 비슷한 무언가로 변해 흘러내린다.
루우가 이야기했던, 신체를 구성하는 ‘원리’의 붕괴 현상인듯했다.
“큭……!”
견하가 작은 하얀 괴물들을 더 뻗어 그 하얀 괴물을 휘감고 짓눌렀다. 빨려들듯 사라진다.
하지만 누가 봐도 견하가 무리하고 있음은 명백했다. 효윤은 견하의 눈을 보며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하얀 괴물에 온 감각이 쏠려 정작 눈앞의 것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시각이 뭔가 다른 것을 보는 데 쓰이고 있다.
견하 뿐만 아니라 모두가 지쳐갔다. 이단도 감당하기 어려운 기갑사의 완력은, 어떻게든 ‘이’, 즉 인간 근력의 기본 원리에 대한 왜곡을 더욱 강하게 해서 맞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 비례해 리안 측 이단들의 힘은 급격히 감소해갔다.
더 큰 문제는, 기갑사는 이러한 소모를 보완하기 위한 기계라는 점이다. 기갑사를 입은 허동주 측 이단들은 전혀 지친 기색 없이 공격을 계속했다.
지치긴커녕 감정조차 없는 얼굴이었지만.
머뭇거림 없이 흐르는 시간은 이 불균형을 점점 더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 갔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은 허동주의 영역. 허동주의 명령을 받은 다른 부대들이 포위망을 강화한다면, 퇴로가 끊긴 리안과 그녀의 부대원들은 끝장이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뚫고 나가야 한다.
“저, 기계…… 말인데……,”
효윤은 숨을 헉헉 몰아쉬는 견하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정신을 차리려 안간힘을 쓰는지, 견하의 눈은 다시 또렷해져서 눈앞의 적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출된 이단의 얼굴 부분을 노려보자. ……두세 명이 동작을 봉쇄하고, 나머지 하나가 머리를 격파하면, 그래도 움직이는지 보자고.”
곧바로 견하의 의견대로 움직였다.
넓지 않은 공간, 난전이 되지 않도록 대열을 유지하며 딱 기갑사 하나가 들어올 만한 공간을 벌려 놓는다. 물론 저쪽도 바보는 아니라 하나만 유인당하지 않았다. 그 공간을 더 벌리고 대열을 무너뜨리려 여럿이서 비집고 들어온다.
견하와 여러 이단들이 목표 외 다른 기갑사들의 진입을 저지한다. 아주 잠시지만, 한 놈만 앞으로 돌출된다. 견하는 외쳤다.
“오래는 못 버텨!”
그 잠시의 틈 동안 이단 두 명이 기갑사의 양팔을 상대하고, 효윤이 빠르게 기갑사의 몸 가운데, 탑승한 이단의 얼굴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양쪽 광대뼈를 잇는 깔끔한 선을 그리며 그 얼굴을 쪼개놓는다.
기갑사는 양팔을 발작하듯 부르르 떨더니, 이내 몸을 굽히며 늘어졌다. 상당량의 피가 뿜어져 나와 기계의 곳곳을 적시다, 이내 힘을 잃고 줄줄 흘러내린다.
이렇게 해서야 겨우 한 놈 처치.
무리한 돌진으로 피해를 보자 적들은 신중하게 물러서서 대열을 바로잡는다. 효윤은 혀를 찼다. 다음 공격은 아주 질서정연하게 밀려왔다.
기갑사 하나를 잡았다고 기뻐할 틈도 없이, 적은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워졌다.
이제 아까 같은 작전은 두 번 다시 쓸 수 없다고, 그녀는 직감했다.
***
루우는 웃음을 그치고 리안을 빤히 보았다.
“시치미는 떼지 않을게. 태사의 추측은 맞아. 하지만 그게 이 상황을 해결할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일단 네가 황위 계승 후보임을 드러내고 교전 중단을 명하는 건 어떨까. 그러고 나서 저들에게 허동주 체포를 명하는 거지.”
루우는 리안의 표정을 날카롭게 훑었다. 리안 자신도 믿지 않는 계획이다. 대충 생각하고 대충 내뱉었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리안은 자신이 아니라 루우가 해결책을 보이길 원하는 것 같다.
“……「쿠빌라이 문서」, 얼마나 모았고 어디까지 알아낸 거야?”
이번엔 리안이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이런 여자와 앞으로 계속 손을 잡아야 한다니 조금 피곤하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루우는 입을 열었다.
“확실히 보통 이단보다 강하다는 점은 인정할게.”
“그뿐이 아닐걸. 자, 어서 본래 능력을 보이지 않으면 나도 죽겠지만 루우 테무르 당신의 ‘희귀하고 흥미로운 자료’인 견하도 죽어. 빨리 결단을 내리는 게 좋지 않을까?”
루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사, 견하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글쎄.”
정말 견하를 이 사지까지 데려오기 위한 속임수였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연정마저 희생할 만큼 지독한 각오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걸까.
어느 쪽인지 가늠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견하가 지금 위기라는 건 명백하다. 루우의 ‘목적’에 꼭 필요한 견하라는 자료를 여기서 잃으면 뼈아픈 손실이다.
리안은 대체 어디까지 알아낸 걸까. 무슨 속셈인 걸까.
루우는 이 싸움이 끝나면 반드시 알아내겠다고 마음먹으며 언월도를 원래의 공간으로 돌려보냈다.
“보면 깜짝 놀랄 거야. 여기서 구경하고 있어. 황금 가문, 보르지긴이 수 세기 동안 실험한 이종교배의 결과물을.”
***
효윤은 리안이 탄 열차를 보호하는 형태로 부대원들을 물렸다. 처음 기습에 나섰을 때의 기세를 생각하면 순식간에 처지가 뒤바뀐 셈이다.
효윤은 초조감을 숨기려 노력하면서도, 허동주에 대한 생각을 그치지 못했다.
잡아야 하는데. 여기서 놓치면 정말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도주했으면 어쩌지.
힘겹게 기갑사의 칼날을 막아낸 뒤, 박도를 다시 고쳐 쥐었다. 이제 그녀의 체력도 그 끝이 보이는 듯했다.
이대로 흐트러지면 대열이 무너지고, 그러면 난전이 되고, 그렇게 되면 끝내…… 누구한테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겠지.
“……그건 안 돼.”
그건 리안의 죽음, 혹은 몰락을 의미했다. 리안이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남에겐 말할 수 없는 이유를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효윤을 지쳐서 자꾸만 땅바닥으로 향하는 눈을 치켜올렸다. 땀이 눈썹을 건드린다. 손등으로 훔쳐냈다.
한 번 더, 공격을 시도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리에 힘을 넣는데,
역 천장에 구멍이 뚫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