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6)
충격음과 진동에도 동주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불타는 객차들을 바라봤을 뿐이다.
불길이 역사 지붕을 핥았다.
대범한 행동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리안이 탔다고 여겨진 칸의 지붕이 열린다. 동주는 그 의미를 빨리 깨닫지 못했다.
“각하! 위험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경호원이 동주의 가슴팍을 밀어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는 곧 끔찍한 비명과 함께 짓뭉개졌다. 비명의 길이와 기괴함으로 추측건대 상당히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으리라.
성인 남자의 몸통만 한 망치를 든 이단이 눈앞에 서 있다. 그는 질척이는 고깃덩이에서 망치를 들어 올렸다.
허동주 측 이단들도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즉각 대응에 나섰다.
망치와 칼날이 물리 법칙 따위는 무시하고 부딪쳤다.
곧 불꽃과 금속음이 공간을 채웠다. 허동주를 처치하려는 리안의 마수는 이렇게 가로막히는 듯했다.
하지만 미리안 측 이단은 한 명이 아니었다.
열린 지붕 안에서, 동주가 느끼기엔 끝도 없이 이단들이 튀어 올랐다.
백은 될까?
동주도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 못한 건 아니었기에 이단을 배치했다. 하지만 수가 부족했다. 다 모아도 간신히 동주를 호위하며 역에서 빠져나갈 정도의 숫자였다.
당연히 반대편 승강장 쪽을 지원할 여유는 없었다. 그쪽은 대체 얼마나 일방적인 살육이 펼쳐질지.
하지만 동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동주는 이미 죽을 수 있다는 걸 충분히 각오하고 나왔다.
그런 각오여야 태사를 잡을 수 있다.
사람은 예측하고 각오한 범위 내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해진다.
동주는 오른손을 들어 까딱였다.
리안이 건너온 압록강 다리가, 아까 전 폭발 못지않게 큰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
같은 시각, 동명특별시 황궁 자운전.
태사를 제외한 임시 제국최고회의의 중앙집행위원회, 각 성 장관들, 혁명군 사령부의 수뇌진이 모여 있었다.
여기에 아즈텍 연방, 일본 공화국, 몽골 제국, 신성 제국, 로마 제국의 대사들도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배영훈 소령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개 소령의 부름이지만 태사의 소집령이라니 오지 않을 순 없었다. 게다가 외국 대사들도 함께였다. 보통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배영훈 소령은 모인 이들의 긴장과 불편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목시계만 들여다봤다.
이윽고 배영훈 소령은 고개를 들고 손님들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류성일 법무장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사께선 지금 어디 계시는가?”
“죄송하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뭣……? 아니, 동명에 계시긴 한 건가?”
배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술렁임이 어전 안에 퍼졌다.
“안 계시다니. 그럼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태사께선 현재 허동주를 처치하기 위한 비밀 작전을 몸소 지휘하고 계십니다.”
이번에는 외무장관 안세규가 물었다.
“비밀 작전……? 그건 또 뭔가 대체.”
“그 역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사들도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질문을 하기도 어려운 분위기라 그냥 지켜만 보는 수밖에 없었다.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다. 그 말만 하려고 제국의 수뇌들을 모이라 한 건가! 부재 시에 우리가 뭔가 일이라도 꾸미는 게 아닌가 감시하려고?”
항상 침착했던 안세규의 노성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컸다. 사람들은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하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몸으로 체험했다.
“아닙니다. 태사께선 바로 이 시간에, 제국 수뇌부 여러분께 만약을 대비한 지시를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지시? 말해보게.”
“‘현재 시각, 19시 30분부터 외무성 장관 안세규는 태사가 부재할 시 태사를 대리해 국정을 맡는다.’”
모두가 안세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규는 어안이 벙벙해져 일어선 자세 그대로 말을 잃었다.
“‘만약 태사가 사망 혹은 실종되거나, 반란군에 포로로 잡힌 것이 확인되면 태사의 모든 지위와 권한은 즉시 정지된다. 포로가 된 태사의 발언은 전부 강압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라. 태사가 익일 08시 30분까지 연락이 없다면 같은 경우로 보라.
이상의 경우 태사와 임시 제국최고회의 의장직은 안세규 외무장관이 승계하라.’”
안세규는 자리에 앉았다.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주도면밀한 여자 같으니.
이렇게 정파를 초월해 모인 자리, 외국 대사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안세규의 지위를 규정했다.
이렇게 되면 리안의 정적들이 손을 쓸 수가 없어진다.
세규는 태사가 동명에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즉각 그녀의 불신임을 떠올렸지만, 이제 그럴 수 없게 됐다.
태사의 대리인이 태사를 해임하자는 안건을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저 외국 대사들은 각자 대사관으로 돌아가면, 본국에 암호문을 쏘아 보내겠지.
정말, 안세규는 태사의 ‘공식적’ 명령을 충실히 받들어 그 정권을 수호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건 고려에 대한 외국의 평가도 바꾸겠지.
그간 외국에선 이 정부가 미리안과 안세규의 대립을 연합정권으로 간신히 봉합해 놓았을 뿐이라 평가했다.
하지만 오늘 이 모습을 보고, 고려 제국 정부는 소문보다 훨씬 더 잘 단합되어 있고, 안정적이다, 그렇게 평가를 바꾸지 않을까.
세규는 리안의 집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시간제한이 있다는 건 그 시간 안에 허동주를 처치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리안은 분명 자신이 죽었을 경우도 대비했다. 그 경우 후계자는 안세규고.
세규는 리안과 정치적 지향은 달라도, 허동주에 맞설 또 다른 이념의 산맥이다.
최종적인 승리는 어렵겠지만, 죽어서도 끝까지 허동주를 괴롭히겠다는 리안의 의지가 느껴졌다.
“태사 각하의 명령을…… 받들겠네. 무운을 빌도록 하지.”
그게 세규가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이제 미리안이 성공하거나 실패할 때까지, 초조한 기다림만 남았다.
***
견하와 효윤은 고개를 돌려 무너져 내리는 다리를 보았다.
허동주 또한 함정을 파두리라 예상은 했다. 그렇지만 막상 저런 광경을 보고 나니 조급해졌다.
어둠과 승강장의 불빛 사이에서 효윤은 검붉은 덩어리가 되었고, 견하는 하얀 괴물 수백 마리를 뿜어내는 괴물이 되었다.
수십 마리를 쓸 때는 못 느꼈는데, 수백 단위가 되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신이 또렷한 생각을 하며 하얀 괴물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아이들’이 만족할 때까지 놀도록 풀어놓는 중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구분할 수 있던가?
“정신 차려, 주견하!”
효윤이 어깨를 잡아 흔들자 견하는 주위를 다시 또렷이 인식했다.
호흡이 멎기라도 했었다는 듯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지금 헐떡이고 있는데, 아까부터 그랬던 건가, 막 숨을 돌리려 헐떡이기 시작한 건가.
모르겠다. 의식하지 않아서.
“들어봐. 이상해.”
효윤의 말을 따라 귀를 기울였다. 우우우우웅, 하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머지않아, 기계음과 어울리는 기계들이 역의 지붕과 벽을 부수고 돌입했다.
“저건……!”
땅딸보처럼 생긴 쇳덩이. 하지만 실제로 그 높이는 2미터에서 3미터에 달한다.
리안 측 이단 하나가 그 정체불명의 기계를 베기 위해 달려들었다. 이단은 강철 정도는 어렵지 않게 자르니까.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리. 기계는 이단의 공격을 손쉽게 막았다.
뜨거운 증기가 기계 뒤쪽으로 뿜어져 나온다.
이단들이 쓰는 냉병기와 같은 무기를 든 기계가, 이단의 무기를 막는다.
그 이단은 당황에 찬 목소리를 낼 틈도 없이 두동강이 났다.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빠르기, 힘, 모든 측면에서 이단에 뒤지지 않는, 아니 그 이상인 ‘기계’.
“뭐야 저건……!”
리안 측 이단들 사이로 당황이 번져간다.
‘기계’들은 이제 대열을 갖추고 역으로 리안 측 이단들을 포위했다.
물론 엄선된 이단들인 만큼, 아까 죽은 이단처럼 쉽게 죽진 않았다. 그렇지만 공격이 제대로 먹히질 않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질 것이다.
“주견하, 저것 봐 봐.”
기계가 가까이 다가오니 그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강철 상자들을 엮어 장갑을 만든 투박한 외양.
그 가운데에, 사람의 얼굴이 박혔다.
“이단……? 이단이 타고 있는 건가?”
어떻게 보면 탑승했다기보다는 강철 상자를 옷처럼 ‘입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탑승한 이단의 눈은, 왜인지 몰라도 빛이 옅었다.
“대체 저건…….”
그 괴이한 모습에 의문을 품어도 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마냥 의아해할 시간도 없다.
쏟아지는 기계들의 공세에, 방어만 하기에도 벅찼으니까.
***
침착을 유지하던 동주의 얼굴에 희열이 가득 찼다. 목숨까지 건 결과, 마침내 완벽한 승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실전 투입은 오늘이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기우였군.”
척준경 프로젝트, 그리고 그 결과물, ‘기갑사(機甲士)’.
척준경은 제1제국 시기의 장군으로, 고려 역사상 가장 무예가 뛰어난 자였다. 아니, 거의 괴물에 가까웠다.
보통 홀로 수백 명의 적을 베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야사(野史)나 설화에만 남는다. 그러나 척준경이 흑수말갈 재정복 전쟁이나 거란과의 전쟁에서 보인 무예는 정사(正史)에 남았다.
아직 퇴계 이황이 이단에 관한 탐구를 하기 수백 년 전이라, 그가 이단이라는 근거는 빈약하다. 그러나 그 업적이 ‘이단’이 아니고서는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허동주는 ‘기갑사’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척준경의 이름을 붙였다.
척준경 프로젝트는, 이단의 능력과 기계를 결합해 그 능력을 최대로 끌어내고자 하는 일련의 연구다.
이미 세계대전 때 태평천국 공군이 이단의 능력을 활용했었다. 하지만 태평천국의 방식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이단이 세계의 ‘이치’에 간섭하는 것은, 이단의 생명을 소모한다.
단순히 체력의 소모가 아니라, 금단의 영역에 접근한 대가로 더 중요한 것을 소모한다.
인간의 근본 구성원리인 ‘이’, 그리고 형상을 유지하는, ‘기’.
이단의 능력은 쓰면 쓸수록 자신의 원리와 형상을 왜곡한다. 심한 경우 신체의 세포들이 그냥 흩어져 버리는 붕괴 현상으로 인해 사망한다.
아니면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되거나.
물론 이단이 무기를 소환해서 쓰거나 총알을 막는 정도로는 건 평생 부작용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거기서 벗어나, ‘기계’까지 간섭할 때 일어난다.
저 ‘기갑사’는 그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했다. ‘기갑사’는 기본적으로 이단의 전투력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사용자인 이단의 육신이 붕괴하는 것도 막아준다.
기갑사를 이루는 투박한 강철 상자들은 장갑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단이 짊어지는 ‘부담’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기능을 한다.
‘기’는 육신이라는 형상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희노애락애오욕, 즉 칠정(七情)을 형성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갑사는 육신을 유지하는 대신, 이 감정을 마모시킨다.
육신이든 칠정이든 둘 다 ‘기’니까.
칠정이 마모된 인간은 육신과 ‘이’만 남는다.
‘이’는 인간의 물질적 구성원리이기도 하지만, 정신적 구성원리,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 사양지심과 같은 사단(四端)을 형성하기도 한다.
칠정의 마모, 사단의 재조정.
그렇게 된 인간은 ‘민족’과 ‘국가’를 위해 절대적 충성을 바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충효.
그야말로 육신과 정신이 최적화된 전투 기계.
폭주의 가능성 때문에 기갑사를 사용한 이단들은 모두 정신과 진료를 받게 하고 있지만, 한나절 쓰는 정도로 큰 문제는 없겠지.
허동주는 만족스럽게 명령을 내렸다.
“태사의 무력을 제거하라. 태사는 신체적 손상 없이 생포하도록.”
무감정한 응답들이 무전으로 돌아왔다. 동주는 느긋하게 전투를 지켜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