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5)
견하는 재연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허동주를 잡으려면 일단 저쪽 지역으로 넘어가야 했다. 다만 평양은 너무 깊이 들어가야 해서 위험했다.
작전이 실패하면 무사히 도망갈 방안도 생각해야 했으니까.
환도시라면, 적당하다. 다리 하나 건너면 바로 혁명군 장악 지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미리 아군을 보내서 준비해 두는 것도 가능하다.
“좋아. 대신 우리 측 부대를 내려보내서 경호 준비를 할 수 있게 해 줘.”
“우리 쪽 장교들의 감독 하에서라면 얼마든지.”
견하와 재연은 그 밖에도 몇 가지 문제들을 논의했다.
평화회담이 외부로 알려지지 못하게 하는 보안 문제나, 양쪽 지도자가 정말 약속을 지켜 그 자리에 나타날지와 같은 문제들을.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문하시중이 하급자니 하루 먼저 환도시에 와서 대기하는 것으로 하자. 우리는 그자가 문하시중의 대역은 아닌지, 분명히 도시에 머무르는지 확인되지 않는 이상 다리를 건너 내려갈 수는 없어.”
“우리 쪽 장악 지역에서 열리는 회담이니까 그 정도는 이해해. 그보다, 지난번에 말했던 ‘법안’ 문제는 어떻게 됐어?”
“평화협정 이후 천손민족협회 사람들이 제국입헌당으로 들어올 수 있게 준비해뒀어. 그러면 선거에서 이기고, 제국최고회의의 제1당이 된 다음, 법안을 다수결로 통과시키면 간단히 끝나.
태사의 황제 즉위는 그다음이고. 여차해서 일이 틀어지면, 제국최고회의 내에 있는 너희 쪽 의원들을 움직이면 돼. 이 정도면 만족하나?”
상부에서 허용해 준 범위 내의 일이었는지, 재연은 수영과 몇 마디 속삭이고는 동의했다.
“회담일은 6월 6일로 하자. 준비에 시간이 걸리는 데다 선거일은 6월 10일이야. 너희 사람들이 제국입헌당에 입당하는 절차를 마치고 선거까지 하려면 이 정도 여유가 필요해. 그러니까 이보다 더 빨리도 안 되고, 더 늦게도 안 돼.”
“알았어. ……만약에 말인데, 견하야. 회담이 잘 끝나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재연의 물음에 견하는 쓰게 웃고는 답하지 않았다.
***
한재연은 평양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혼자 쓸 수 있는 작은 객실을 배정받았다.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그는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애초에 한재연이든 그의 상관이든 누구든, 평양을 회담 장소로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회담 장소는 환도시로 예정돼 있었다. 양쪽 모두 환도시로 만족할 수 있도록, 평양이라는 무리한 안을 미리 내민 것이다.
문하시중이 이 이후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움직일지는 재연도 모른다.
다만 그는, 자신이 농락하게 될 친구의 안전을 걱정했다.
제발 환도시에 오지 마. 견하야.
제발…….
***
동주는 쭈뼛거리며 들어온 소년을, 웃으며 환대했다.
고작 고등학교 2학년생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민족관’에 대한 짧은 논설문. 동주는 세 번이나 그 글을 읽어봤다.
처음에는 단순히 동주의 이론을 반복해서 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 글은 동주가 아직 발표하지 않고 마음속에만 담아둔 생각이나, 소년만의 신선한 발상이 돋보이는 글이었다.
“그래. 앉게, 재연 군.”
소년은 꾸벅 인사를 하고 앉았다. 다소 긴장한 듯했지만, 겁은 먹지 않았다.
젊은 세대. 동주는 소년을 보며 그런 말을 떠올렸다.
그냥 젊고, 자신을 숭배하기만 해서는 진정한 젊은 세대라 할 수 없다. 동주의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동주의 육신이 죽고 없어도, 사상을 지속시킬 수 있다.
이는 혈통을 잇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버지의 사상을 부정하고 대립하는 아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그건 아버지의 사상에 대해 생각은 해봤다는 뜻이니 그나마 낫다.
세상에는 아버지의 사상은 생각도 않고 지위와 부만 상속받으려는 아들들이 넘친다.
호랑이에게서 난 개의 자식들을 허동주는 용납할 수 없었다.
사생아들을 결코 친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
반면 눈앞에 앉은, 한재연이라는 소년은 어떤가.
동주는 어린 이해자를 두고 뿌듯함을 넘어 희망까지 느꼈다. 지도자감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잘 기르면 적어도 다음 세대의 튼튼한 들보가 될 것이다.
“그래, 그쪽 실무자와 이야기는 잘 되었나?”
“예. 전보로 받아보셨겠지만, 장소는 예정대로 환도시 신시가지에 있는 신환도역이고, 날짜는 6월 6일입니다. 각하께서 장소에 도착하시는 게 확인되는 대로 그쪽도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합니다.”
이미 아는 정보였지만, 동주는 재연의 성실한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게 오가느라 요기도 못 했을 텐데, 저녁 들고 가게.”
자정이 가까워 저녁 식사시간이라기엔 늦었지만, 그래도 동주는 소년에게 한 끼 대접하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전쟁기념관에서 제공하는 나름 고급스러운 요리를 먹으며, 동주는 소년과 친목을 다지기 위한 가벼운 화제를 입에 올렸다. 요리의 맛이나 재연이 쓴 글에 대한 칭찬, 그리고 교우 관계 같은 것들이었다.
“태사 측 실무자로 나온 사람이……”
재연은 감출 필요도, 소용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솔직히 대답했다.
“예, 제 친구입니다.”
“안타깝군. 그런 영특한 소년들을 이쪽으로 더 많이 불러들였어야 했는데.”
동주는 재연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더는 그 친구에 대해 묻지 않았다.
오히려 재연이 몇 번 무언가 말하려 하는 것 같았지만, 곧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마도 친구에 대한 탄원이었을 거라고, 동주는 생각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재연이 나간 뒤, 동주도 집무실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정말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했다.
대공세를 통해 태사파가 반격할 수 있는 역량은 소멸시켰다. 물론 아군의 피해도 컸지만, 덕분에 미리안을 협상 자리로 끌어낼 수 있었다.
“이 회담에는 많은 게 걸렸다.”
키타이와 낭키아스가 언제 지원을 중단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조금 초조해지긴 했다.
“하지만 그 초조함 때문에 평화를 구걸해선 안되겠지.”
미리안은 이 평화협정의 결과로 주도권을 얻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주도권은 내가 쥔다.”
미리안은 이 평화회담에서 동주를 잡을 생각으로 상당한 병력을 끌고 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척준경 프로젝트의 결과물들을 모두 환도시에 집결시킨다.”
동주는 역시 살무사였다. 평화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없었다. 평화는 충분한 힘을 통해 관철하는 것이다.
그도 보낼 수 있는 모든 병력을 환도시로 보낼 것이다. 보내고, 자신도 가서, 직접 지휘한다.
살무사가 지휘하는 이 작전으로, 미리안을 잡는다.
그녀를 죽이지는 않는다. 허동주는 태사가 되고, 미리안은 황제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협상은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단지, 미리안이 허동주의 꼭두각시 황제가 되는 게,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겠지.
미리안은 궁궐에서 우아한 삶을 누리되, 태사 외 정치인들과의 접촉은 제한된 채, 각본이 있는 인터뷰를 하고, 연출된 사진을 찍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민족의 황제’로 선전되고, 민족의 우상이자 신앙이 될 것이다.
태사가 된 동주 자신은 그렇게 민족의 열망을 끌어모아, 하나 된 민족의 힘을 온 아시아 대륙에, 전 세계에 투사할 것이다.
점점 구체화하는 미래상이 동주를 미소짓게 했다.
아까 전 약간 수줍은 듯, 하지만 어른스럽게 처신하려 노력하던 소년의 모습이 그려진다.
동주가 만든 미래는 그런 소년들이 누릴 것이다. 그 소년들이, 동주의 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하여 진정한 ‘천손민족’의 영광을 대대손손 전하리라. 그렇게 영원토록 번창하리라.
그것이 동주의 ‘제3제국’ 구상이었다.
***
“독대는 처음인가.”
리안은 루우를 앞에 두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루우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 넣고, 리안의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두려움이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다 관심 밖의 일이라는 건지 모를 태도군.”
“우리는 지금 대등한 계약관계지. 안세규 주석과 내가 그랬던 것처럼. 태사는 내 주인이 아니야.”
리안은 작전에 참가할 이단의 목록을 들어 올렸다.
“그래. 그 계약에 의거해서 말야, 이번 작전에선 내 경호 역을 맡아줘야겠어.”
루우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최효윤 중장이 아니라?”
“그 애는 견하와 같이 행동할 거야.”
“왜 굳이 그런 배치를? 나와 느긋하게 담소라도 나눌 생각?”
“그럴 여유가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쓸 ‘비장의 한 수’로 갖고 있고 싶어.”
“이단이 거기서 거기지.”
“아닐걸. 너 혼자 안세규 장관을 경호해서 황궁에 들어왔을 때는, 안세규도 너도 참 대담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비웃음인지 재미있다는 웃음인지, 루우는 모호한 웃음을 지었다.
“너 혼자 데려온 것만으로도 안세규는 충분한 경호라고 생각했다는 거지. 바로 그 부분에 착안해서 머리를 굴리다가, 몇 가지 조사를 좀 해봤어.”
“조사 결과는 어땠어?”
대답은 없었다. 두 소녀는 아주 닮은 웃음을 서로에게 보여줬다. 하지만 그 웃음은 서로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
환도시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다리. 아래로는 압록강이 흐른다.
다리에 철로가 다시 놓였다. 혁명군은 적이 철도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다리 위의 철로만 치워두었었다. 언젠가 진격을 하게 될 때를 대비해 양측 모두 다리 자체를 파괴하지는 않았다.
미리안은 잠깐 열차에서 내려 저녁 바람을 쐬었다. 그 모습을 반란군 측 장교가 확인했다.
그는 태사가 정말로 환도시에 왔음을 아군에게 알렸다.
다리 남쪽 건너편에서 열차를 통과시킬 준비를 했다.
혁명군 장교도 신환도역에 도착한 허동주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 역시 북쪽 건너편으로 연락을 넣었다.
제국태사 전용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6월 5일, 즉 오늘 저녁 신환도역에 도착. 다음 날인 6월 6일부터 정식으로 평화협상을 벌인다는 게 두 세력 사이에 ‘합의된 일정’이었다.
압록강 다리 위를 지날 때 태사는 긴장했다. 허동주가 자신을 죽이려 마음먹었다면 다리를 폭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허동주는 그러지 않았다. 열차는 다리를 무사히 통과했다.
리안은 허동주를 비웃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평화협상을 꿈꾸는가? 아니면 나를 생포하겠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나?”
리안이 어떤 생각을 하든, 허동주가 어떤 꿍꿍이를 품고 있든, 열차는 신환도역 승강장에 들어왔다.
허동주는 평회회담에 임하는 우호적인 웃음을 얼굴 가득 걸어놓았다. 표본 같은 웃음이었다.
리안이 내릴 열차 출입문 앞에 카펫이 깔렸다. 경호의 배치며, 동선이며 무엇하나 국가원수에 대한 의전에서 어긋난 점은 없었다.
허동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그때,
전용열차의 객차들이 첫 한 칸만 남기고 모조리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