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4)
훨씬 더 잘 준비된, 더욱더 대규모의 공세가, 요하 전선과 송화강 전선 사이를 파고들었다.
여기는 그야말로 평원지대다.
“반란군은 진심으로 여길 뚫을 각오인 듯합니다. 공격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된다고……”
“우리가 거기의 취약성을 잘 알듯이, 적들도 잘 알고 있겠죠.”
약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구간이기까지 하다.
비교적 방어가 쉬운, 강을 사이에 둔 두 전선 사이의, 비교적 뚫기 쉬운 지역.
여기를 뚫으면 혁명군의 서부와 북부전선이 끊어진다.
허동주가 심혈을 기울이고, 필사적으로 축적한 물자로 이루어진 공세를 받아내다 보면, 가만히 방어만 한다 해도 출혈을 막을 수는 없다.
“여기서 더 물릴 순 없습니다.”
“그렇다고 구멍이 뚫리게 내버려 둘 수도 없죠.”
잠시 턱에 힘을 주고, 리안은 침묵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뱉는다.
“생산되는 물자, 예비 물자, 다른 전선에 타격이 가지 않는 수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만큼 거기에 쏟아 넣읍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위치 사수를 어리석다고 했는데, 오늘은 위치 사수를 명령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무섭다.
이것이 살무사의 공세인가.
“각하! 하지만 예비 인력과 물자는 향후 우리가 반격에 써야 할…….”
“압니다! 그게 방어에 소모되는 게 좋지 않다는 거. 하지만 무의미한 소모는 아닐 겁니다. 계속 보충하세요.”
그렇게 수백만에서 천만에 달하는 탄환이 소모됐다. 쉽게 보충할 수 있는 물량은 아니었다.
어찌어찌 마지막 공세를 막아낸 6월 1일.
“숫자에서 쓴맛이 날 수도 있군.”
리안은 혁명군 사령부로 올라온 보고를 들으며, 그 기이한 공감각적 표현들을 그렇게 자조했다.
너무나도 많은 피가, 위치 사수를 위해 흘렀다. 적은 물러갔지만 반격할 여력은…… 현 상황에선 남지 않았다.
이 공세를 위한 양동 작전임이 분명했던 남동부의 공세도, 상당히 물러나야 했다. 두만강까지 밀리지 않은 걸 위안 삼아야 할까.
북부 전선에서 버렸거나 파괴된 장비들도, 아픈 손실이었다.
리안은 담담한 어조로 소감을 내놓았다.
“예상치 못한 대공세였습니다만, 어쨌든 허동주는 우리 전선을 붕괴시킨다는 전략 목표의 달성에는 실패했습니다. 또 이런 식의 공세는 할 수 없겠죠.”
장군들은 서로 눈짓을 하다, 잠깐 사이에 극북방위군의 조유관이 말하자는 합의를 보았다.
“그렇긴 합니다만, 전선의 사기 저하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반격도 없고, 끝없이 몰려오던 적에 대한 공포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교착 상태를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사기 저하는 적도 마찬가지겠죠. 저는 이쯤 되면 허동주의 능력에 의심을 품는 자들이 나오리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신가요?”
이번엔 전쟁성 장관 강태훈이 말했다.
“적 내부의 동요는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요행을 바라기보다는 그렇게 만들기 위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신문과 라디오에 반란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라고 크게 선전합시다. 장군들께서는 ‘이제 반격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투항해 온 사람들에 대한 사면령을 선포합시다. 상관을 살해하고 오는 경우에는 포상, 진급, 전역 등 각자 원하는 바도 얻을 수 있다고 선전하는 것도 잊지 말고요.”
계속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리안은 지금 견하가 진행 중인 ‘계획’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허동주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
견하가 재연과 만난 건 대공세가 끝난 다음 날인 6월 2일이었다.
견하는 이런 시기에 만나게 된 게 우연은 아니라 여겼다.
분명히 허동주의 대공세는 리안에게 큰 위기였고, 아군이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허동주도 이걸 자기네 ‘실패’라 볼 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협상에도 응하지 않았겠지.
아니면 견하가 항복 조건을 조율하러 나왔거나.
재연은 제1고 근처 카페에서 보자고 했다. 견하는 효윤과 함께, 재연은 수영과 함께 카페에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응.”
숨어 있느라 꾀죄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타났다. 사복 차림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간 조금 변한 걸까. 어른스러워 보였다.
견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서로 지난 이야기 할 처지도 아니고, 오래 있을 시간도 없어. 그러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그쪽은 평화협상에 응할 마음이 있어?”
재연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도 내전 전과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있으니까 여기 나왔지. 하지만 견하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천손민족협회 소년부의 여러 조장 중 하나에 불과해.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돼 있어. 내가 여기서 결정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면 협상을 계속 미룰 수밖에 없어.”
견하는 한숨을 쉬었다.
“재연아. 이 자리에 나온 사람이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그럼 서서히 말라 죽어라’라고 말하고 나갔을 거야. ……일단 그쪽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말해봐.”
“……먼저 조직의 유지에 관한 거야. 우리는 문하시중 각하의 카리스마를 토대로 뭉친 조직이니까, 그걸 훼손할 만한 일은 없어야 해.”
“체면을 지켜달라는 말이지. 좋아. 그쪽이 항복하는 게 아니라 대등한 협정을 맺는 형태를 취해 줄게.”
애초에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견하는 친구를 기만해야 한다는 데서,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다른 조건은 뭐야.”
“문하시중 각하가 태사가 될 예정이라면, 황제가 독단으로 태사를 파면하거나 체포할 수 없다는 법을 만들어 줘.”
“신변 보장이야 뭐, 어렵지 않지. 이걸로 끝인가?”
“아니. 마지막으로…… 문하시중 각하가 그냥 동명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먼저 태사가 평양으로 내려와서 성의를 보여줬으면 해.”
“미친 소리 작작해.”
견하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뒤따라 나온 효윤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협상 결렬시킬 거야? 저쪽이 무리한 조건을 내민 건 맞지만……”
“이 작전, 모두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거야. 저쪽이 유리한 조건이 하나라도 있어선 안 돼. 그래도 성공할까 말까야.”
평양에 내려갔다가 인질로 잡히기라도 하면? 아니, 평양에 내려갔더니 그걸 선전하려고 기자와 방송 장비들이 좍 깔려있다면? 그러면 작전의 성패 이전에 그냥 끝장이다.
국민에게 ‘패배자’로 인식된 리안은 태사 자리를 지키긴커녕 제국최고회의에서 의원직 하나도 얻을 수 없을 거고, 제국입헌당은 공중분해…… 혹은, 당에서 리안을 제명하겠지.
“하지만 이러면…… 계획 자체를 실행할 수 없어.”
“급한 건 저쪽이야. 내일 양수영이 다시 접근해올걸.”
“그래도 만에 하나, 접근해오지 않으면?”
“……그땐 양수영을 체포하고 아는 걸 다 토해내게 만들어야지.”
멍하니 바라보는 효윤에게 견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나도 거기까지 가는 건 바라지 않아.”
***
지하에 방치돼 있던 제국태사 전용열차가 지상으로 올려졌다.
수리 후 허동주와의 평화회담에 타고 가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두 달 전 이단 청년이 부순 지붕을 제외하면 큰 손상은 없었다.
리안은 정비고를 방문했다.
열차를 보며, 그녀는 거기서 희생된 이들을 마음속으로 애도했다.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반드시 살아남아, 그대들이 가치 있는 인간을 위해 죽었음을 입증하겠다.
문득 어떤 생각이 리안의 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책임자를 불러 물었다.
“수리하는 김에 말인데, 열차를 좀 개조할 순 없을까?”
“할 수야 있겠지만 어떤 개조인가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다릅니다.”
“열차 지붕 말이야. 어차피 다시 다는데 이거 개폐식으로 만들 순 없나?”
“아, 그거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기관포 수납 부분을 응용하면 되니까요. 대신 위쪽 장갑의 두께는 포기하고 그 자리에 개폐 기능을 위한 장치를 넣어야겠습니다만…….”
“장갑이 얇아지는 건 상관없어. 대신 열리는 속도를 빠르게 해 줘.”
“알겠습니다.”
리안은 열차 내부를 들여다봤다.
리안의 휴게실이나 탕비실, 고급장교들의 대기실을 전부 걷어내고, 벽에 등을 붙인 의자들을 빼곡히 채워놓았다.
여기에 각종 장비를 둘 수 있는 선반이나 거치대가 남은 공간을 차지했다.
조금도 공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리안은 뒤쪽의 일반 객실을 쓸 예정이었다. 일반실이라 해도 국빈이나 고위급 인사가 쓰는 만큼 호화로운 객실이다.
리안은, 이제는 충실한 부관으로서 경력을 밟아가는 장교를 불렀다.
“배영훈 소령, 돌아가자마자 이단 차출 현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좀 알아봐 줘.”
“알겠습니다.”
전선이 간신히 버틸 만큼 이단을 뽑아서, 이 열차에 잔뜩 태워 회담 장소로 향한다.
승부는 거기서 난다.
정권 다툼은 결국 사람의 문제. 사람이 사라지면 분쟁도 기세가 꺾인다. 게다가 허동주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던 조직은 허동주가 없어지면, 큰 혼란에 빠지겠지.
북, 서, 남 중 어느 한쪽의 전선만이라도 무너뜨린다면, 이 팽팽한 교착은 끝난다. 남은 전선들은 시간이 걸릴 뿐 충분히 밀어낼 수 있게 된다.
해볼 만한 작전이다.
허동주의 목을 비틀자. 고통스럽게 죽여, 그 시신을 만천하에 돌리며 욕보이자.
리안은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
견하가 자리를 박차고 나온 다음 날인 6월 3일.
점심시간에 양수영이 견하를 불렀다.
두 사람은 같이 점심을 먹으며 사이좋게 식사하는 남녀 학생의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다 수영이 먼저 흘리듯 말했다.
“오늘도 같은 장소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데.”
“장소는 바꾸자.”
일방적인 통보에 수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견하는 무시했다. 어제 그 카페에 무슨 수작을 부려뒀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럼 어디로 할 건데.”
“방과 후에 알려줄게.”
그리고 방과 후가 되자마자 견하는 수영에게 다시 간단하게 통보했다.
“내 기숙사로.”
견하가 말하는 ‘내 기숙사’란, 제1대학 부지 내에 있는 리안의 별장 겸 기숙사였다. 리안은 이 기숙사의 사용 허가를 내주었다. 견하는 거기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땐 마음껏 썼다.
견하와 효윤은 먼저 와서 응접실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연과 수영도 들어왔다. 재연은 이번엔 지도를 내밀었다.
“환도(丸都)시로 하자. 우리도 그 정도가 한계야.”
환도시. 옛날 고구려 왕조의 수도 국내성과 환도성이 있던 도시다.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서북쪽이 구시가지, 동남쪽이 신시가지다. 구시가지에는 고구려 왕릉 같은 유적이 많아 수학여행지로 선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압록강 하구에서 환도시까지 강을 따라 이어져 오던 전선은, 환도시 동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꺾여 개마고원을 가로지른다.
“두 분의 만남은 신시가지에 있는 기차역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