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3)
허동주가 협상에 응하면, 그와 천손민족협회를 제국입헌당에 끌어들여 보면 어떨까.
많은 이들이 허동주의 사상에 공감하고 있으니, 허동주의 합류는 제국입헌당의 승리에 도움이 될 터.
허동주가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는 된다. 그래도 지금의 내전보다는 훨씬 유리한 지점에서 대처할 수 있다.
일단 지금처럼 꼭 무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허동주를 잡을 수 있다.
허동주가 제국입헌당에 들어오면, 허동주와의 갈등을 황궁 내 ‘정치문제’로 처리할 수 있다. 허동주의 수하들을 이간시키거나 이쪽으로 포섭할 시간도 생긴다.
그리고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게 있다.
나이.
허동주는 곧 노년에 접어든다. 하지만 리안은 10년이 지나도 서른이다. 노인과 청년.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노쇠에는 저항할 수 없다.
설령 허동주가 여든까지 팔팔하다 해도, ‘노환으로 인한 사망 처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적을 전부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리안의 절대권력체제를 수립하자. 이것이 견하의 구상이다.
수영은 코웃음 쳤다.
“문하시중 쪽에 의지가 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나라가 두 쪽이 나서 싸우는데, 이제와서 평화협상? 그쪽 태사 각하는 급하실지 몰라도 우리 문하시중 각하는 아닐걸.”
“그래서 일단은 우리 같은 말단끼리 이야기를 해보자는 거야. 이런 역할을 위해 학교에 남아 있는 거 아니야?”
수영은 다시 그 ‘반장의 얼굴’로 돌아갔다.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그래도 내가 우리 쪽에 뭘 이야기해보려면, 견하가 좀 더 매력 있는 재료를 줘야 해.”
견하는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둔 게 있었다.
약점을, 장점으로 전환해보자.
“문하시중 허동주는 태사가 된다.”
견하는 점점 커지는 수영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봤다.
“그리고 태사 미리안은 황제가 된다. 이런 조건으로 하자.”
***
리안은 스타킹 신은 발을 집무실 책상 위에 올린 삐딱한 자세로, 삐딱하게 견하의 계획에 대한 소감을 말했다.
“좋은 의견이네. 여기에 나도 아이디어 하나 보탤게. 황제에 즉위하는 대로 허동주와 결혼식을 올리겠어.”
견하는 정말 오랜만에 당황한 얼굴을 했다.
“결혼…… 이라뇨?”
“왜? 백부님은 황족들 싹 죽여놓고, 나는 그 피비린내 나는 길을 걸어 황제가 되겠다는데, 결혼쯤이야 못할 것도 없잖아?”
견하는 책상 바로 앞까지 다가가 두 손을 짚었다.
“마음에 안 드는 계획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말씀 마세요. 결혼이라니.”
그녀가 허동주의 것이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불쾌했다.
리안은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견하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내가 싫어할 계획이라는 거, 잘 알고 있었잖아.”
소년의 얼굴은 어두웠다. 분명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현명하고, 책임감 있고, 따스한 남자애였지만, 소년은 소년이다. 허동주와 결혼하겠다고까지 한 건 심했을까?
소년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인 끝에 물었다.
“각하는…… ‘그때’ 저한테 하신 거, 아무 의미 없었나요?”
소년이 말하는 ‘그때’가 언제인지, 리안은 모르지 않았다.
어린 남자애한테 멋대로 감정을 쏟아내 버린 게 아닌가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하는 생각보다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의미가 없진 않아.”
그 말에 견하는 조금 놀라는 듯했다. 리안은, 지금 기분이 사그라들기 전에 서둘러 덧붙였다.
“네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나와 같다면, 일단 상황이 좋아지면 정식으로 교제를 생각해볼게.”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연하를 첫 남자친구로 삼아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뭐 어때, 하고 무시해버렸다.
소년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흘끔 보자, 새빨개져 있다. 보고 있자니 다시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다. 음, 귀여운 면도 있어.
리안은 짐짓 사무적인 태도를 가장하며 말을 이었다.
“정리해보자. 일단 견하 군이 세운 계획엔 몇 가지 문제가 있어. 허동주에게도 ‘젊은 후계자’가 있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점. 허동주가 호락호락 우리의 음모에 넘어가 주진 않을 거라는 점. 내 황제 즉위를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가 없다는 점.”
견하의 얼굴에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른다. 저렇게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받아들인다면 괜찮다. 이 아이는 성장할 것이다.
“모두 지나치게 운에 의존한 계획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어. 허동주를 제국입헌당에 끌어들이고 어찌어찌 제거한다 쳐도, 그 지지자들이 어디로 증발하는 건 아니야. 나는 그들의 요구에 응해줘야 해. 그럼 내가 전쟁이라도 일으킬까?
견하 군. 내가 하고 싶은 건 허동주 사상의 패배를 온 나라에 보여주는 거지, 그들과 타협해서 권좌만 연명하는 게 아니야.”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다 문득, 리안의 생각이 어딘가에 닿았다.
“잠깐…….”
리안은 씩 웃었다.
내전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고, 때론 약해져 누군가에게 기댈지라도, 그녀 내면에 자리한 본질, 권력을 향한 집념은 뿌리 뽑을 수 없다. 그녀는 그렇게 태어난 인간이다.
견하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이 계획, 한번 써먹어 보자. 이걸 기초로 작전 하나 짜 봐.”
***
“그쪽에 있는 한재연이라는 사람에 대해 듣고 싶은데.”
“……나름 유명해. 충성심도 충성심이지만, ‘이론가’로서의 명성도 상당해.”
이론가로 유명하다, 라……. 견하는 수영의 말을 곱씹었다. 재연은 언제 그렇게 깊이 들어간 걸까.
“그 사람과 친분이 있어. 같이 만나면 의논이 빨리 진전되리라 보는데.”
수영은 반듯한 자세로 앉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어떤 청춘 소설에 나오는 청초한 반장 같다고 생각했으리라.
“알았어. 한 번 이야기해볼게. 너무 기대하진 마. 우리 협회원 대부분은 평화협정은 생각도 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반장은 생각하는 쪽이지?”
수영은 눈을 흘겼다.
“능청스럽네, 진짜.”
“칭찬 고마워.”
견하도 자신이 이런 데 소질이 있는지, 내전이 시작하고서야 알았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와는 전혀 다른 공부. 처음으로 공부에 온전히 몰두하고 재미를 느꼈다.
“오늘은 이만 일어나자. 연락 기다릴게.”
“…….”
수영은 말없이 치마 매무새를 다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는 루우와 효윤이, 다른 학생들이 들어오지 않나 지키고 있었다.
수영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피식 웃었다.
“소녀 친위대라도 데리고 다니는 거야? 재미있네.”
그러고는 효윤, 루우와 한 번씩 눈을 마주치고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주황빛으로 물든 방과 후 교실. 효윤의 항의가 울려 퍼졌다.
“내가 왜 주견하 네 애첩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적한테서?”
루우는 효윤을 따라 교실로 들어오며 덧붙였다.
“가까운 사이로 여겨져서 내심 좋았던 거 아니야?”
“전혀 아니거든?”
“본처가 아니면 만족을 못 하나?”
“그러니까, 아니라구우!”
이마를 감싸 쥐는 효윤을 보며 견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끌어들여서 미안해. 하지만 내전을 끝내려면, 이 계획에 너희 두 사람이 꼭 힘을 보태줘야 해.”
“나야 같은 편이니까 그렇게 간곡히 부탁할 건 없지만…….”
효윤은 그렇게 말하며 루우를 곁눈질했다. 루우는 알겠다는 투로 말했다.
“이 자리에 나까지 부른 건, 협력을 구하기 위해서겠지.”
루우의 얼굴을 보며 견하는 심각하게 말했다.
“보통 협력이 아니야.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라. 도박에 가까운 계획이거든.”
루우는 말없이 견하를 내려다봤다. 노을 탓일까. 루우의 눈동자가 또다시 금빛으로 반짝이는 것 같다.
“뭘 대가로 내놓을 수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
“몽골이 원하는 서북부 영토를 줄 수는 없어. 국민의 반발도 문제지만, 고려에서 정치적 문제의 해법으로 타국에 영토를 할양했다는 선례를 남길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도산서원’을 장악하면 그 자료를 전부 공유할게.”
루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산서원에 얼마나 높은 가치의 자료가 있는지는 미지수야. 오히려 몽골이 이미 앞지른 기술이라면 좋은 조건이 아닌데.”
“그렇다면 여기에 더해서, 몽골이 아니라 루우, 너 개인이 원하는 걸 줄게. 이 조건은 어때?”
“내가 원하는 게 뭔 줄 알고?”
“그야 모르지. 하지만 네가 ‘원하는 무언가’가 있어서 본국의 방침과는 다른 행동을 하는 것 정도는 알아.”
“……좋아. 거래에 응할게. 하지만 아주 비쌀 거야.”
***
1929년 5월 27일. 허동주는 준비했던 대공세를 시작했다.
남동쪽 전선에서는 적을 돌파한 후, 그대로 동해안을 따라 북상, 용원을 점령한다는 작전이 전개됐다.
“우리가 그렇게 올라가는 동안, 압록강 쪽에서는 다리들을 두고 쟁탈전이 벌어질 거다.”
반란군 측 소위 하나가 그렇게 병사들에게 설명했다.
“우리든 태사 쪽이든 쉽게 물러서지 않겠지. 그렇지만 우리가 일단 적의 남동쪽 끄트머리를 짓눌러버리면, 이 교착은 깨져. 태사군은 병력을 뒤로 빼든지, 우리 쪽으로 돌리든지 하겠지.”
“그러면 우리도 막히는 거 아닙니까?”
“그때는 또 다른 방향에서 아군이 두들겨댈 테니까, 우리 쪽으로 무턱대고 전력을 집중할 수는 없어. 태사군은 사방에서 정신없이 두들겨 맞다가 끝나는 거야.”
대충 전쟁의 방향을 그렇게 예상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곧 돌격이 시작됐다.
소위는 10분 뒤, 질문을 던진 병사는 12분 뒤에 각각 머리가 날아가거나 고기 조각이 되어 전사했다.
북쪽의 훨씬 더 넓은 전선엔 허동주의 정예 병력이 분포해 있었다. 여기도 비슷한 일들이 반복된다.
“여기선 확실히 우리가 우위군.”
전차장은 그렇게 말하며, 적진을 살피던 쌍안경에서 눈을 뗐다. 좌우로 아군 전차들이 멋지게 속도를 내며 돌진한다.
“요하 전선 쪽에는 포격을 가해 적의 발을 묶어놨다고 하니까, 우리 앞의 적이 보강될 일은 없겠지.”
머리 위로는 아군 항공기가 일직선으로 날아간다. 기갑, 항공 전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어마어마한 공세다.
이번엔 뚫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전차는 곧 포격을 받고 폭발했다. 전차장은 아군이 적의 전선을 뚫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전차와 운명을 같이 했다.
***
“점진적 후퇴를 명령할 수밖에 없습니다!”
쏟아지는 급보에 혁명군 사령부가 내린 결론이었다.
“현위치 절대 사수를 명령하면…….”
상경 방어전의 추억을 잊지 못한 몇몇 노장이 그런 의견을 냈지만, 리안은 혀를 찼다.
“정말로 병사들이 죽기는 하겠죠. 죽었으니 지키진 못할 거고. 사수는 그런 겁니다. 후퇴, 승인합니다.”
수도의 지휘부야 항상 적절한 명령을 내리려 고심하지만, 말단 병사의 사격 자세까지 감독할 수는 없다.
“우리 혁명군 사령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명령을 내려놓고, 아군이 완전히 붕괴하지만 않기를 바라는 것뿐인가요.”
리안의 탄식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엎치락뒤치락, 퇴각이 아니라 패주를 시작하면 그야말로 적의 좋은 먹이가 된다.
제발 그럴 일은 없기를.
다행히 후퇴는 며칠 만에 무사히 이루어졌다.
“송화강 및 흑룡강 중하류를 끼고, 다시 북쪽과 마주 보는 전선을 형성했습니다.”
그런 보고에 안심하고 있을 때,
두 번째 공세가 시작됐다.